강(姜)씨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簒位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隋焬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오니라. 시조(始祖) 이식으로부터 三十一대 자손 세의(世義)가 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六대에 진창(晋昌)ㆍ우창(愚昌)ㆍ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곳에 살았도다.
1871년
이곳은 예로부터 봉래산(蓬萊山)ㆍ영주산(瀛洲山) 일명 신선봉(一名 神仙峰)ㆍ방장산(方丈山)의 세 산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어 오던 곳이로다.
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에 망제봉(望帝峰)과 영주산(瀛洲山)이 우뚝 솟으니 그 뒷기슭과 함께 선인포전(仙人布氈)을 이룩하고 있도다. 망제봉(望帝峰)의 산줄기가 기복연면하여 시루산을 이룩하였도다.
이 시루산 동쪽 들에 객망리(客望里)가 있고 그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판재 너머로 연촌(硯村)ㆍ강동(講洞)ㆍ배장골(拜將谷)ㆍ시목동(柿木洞)ㆍ유왕골(留王谷)ㆍ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오. 그리고 이 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 사거리(德川四巨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고 그 옆 골짜기가 쪽박골이로다.
객망리에 강씨 종가인 진창 어른부터 六대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탄강하셨으니, 상제의 성은 강(姜)씨이요, 존휘는 일순(一淳)이고 자함은 사옥(士玉)이시고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니라. 때는 신미(辛未)년 九월 十九일인 즉 이조 고종(李朝高宗) 八년이며 단기로서는 四千二百四년이고 서기로는 一千八百七十一년 十一월 一일이로다.
그리고 그 탄강하신 마을을 손바래기라고 부르며 당시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라고 부르더니 지금은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井邑郡德川面新月里) 새터로 고쳐 부르도다.
객망리는 상제께서 탄강하시기 이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하더니 후에는 객망리라 하고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로 고쳐 부르고 오늘에 이르도다.
부친의 휘는 문회(文會)이며 자는 흥주(興周)이고 그는 범상에 우렁찬 음성을 가진 분으로서 그의 위엄은 인근 사람만이 아니라 동학의 의병들에게까지 떨쳤도다.
모친은 권(權)씨이며 휘는 양덕(良德)이니 이평면(梨坪面) 서산리에 근친가서 계시던 어느 날 꿈에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몸을 덮으면서 천지가 밝아지는도다. 그 뒤에 태기가 있더니 열석 달 만에 상제(上帝)께서 탄강하셨도다.
상제께서 탄강하실 때에 유달리 밝아지는 산실(産室)에 하늘로부터 두 선녀가 내려와서 아기 상제를 모시니 방 안은 이상한 향기로 가득 차고 밝은 기운이 온 집을 둘러싸고 하늘에 뻗쳐 있었도다.
상제께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시고 관후하시며 남달리 총명하셔서 뭇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으셨도다. 어리실 때부터 나무심기를 즐기고 초목 하나 꺾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지 않으실 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도다.
상제께서 일곱 살 때에 어느 글방에 가셨는데 훈장(訓長)으로부터 놀랄 경(驚)의 운자를 받고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
이라고 지으셨도다.
상제께서 글방에 다니실 때 훈장으로부터 들으신 것은 그 자리에서 깨우치시고 언제나 장원하셨도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도다. 훈장이 서동(書童)들의 부모에 미안함을 느껴 속으로 다음 서동에게 장원을 주려고 시험을 뵈었으나 역시 상제께서 장원하셨던바 이것은 상제께서 훈장의 속셈을 꿰뚫고 그로 하여금 문체와 글자를 분별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하도다.
상제께서 열세 살 되시던 어느 날 모친께서 짜 놓은 모시베를 파시려고 이웃사람 유 덕안(兪德安)과 함께 정읍(井邑) 장에 가셨도다. 그는 볼일이 있어 가고 상제께서 잠시 다른 곳을 살피시는 사이에 옆에 놓았던 모시베가 없어진지라. 유 덕안이 곧 돌아와서 상제와 함께 온 장판을 찾아 헤매었으나 날이 저물어 찾지를 못한지라. 상제께서 덕안의 귀가 권유를 물리치고 덕안에게 일러 돌려보내고 그 길로 다음날이 고창(高敞) 장날임을 아시고 고창에 행하셨도다. 포목전을 두루 살피시는데 마침 잃으신 모시베를 팔러 나온 자가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그것을 찾아 파시고 집에 돌아오셨도다.
상제께서는 어렸을 때 남달리 장난을 즐기셨도다. 강 연회(姜然會)와 강 기회(姜驥會)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가끔 상제님과 힘자랑을 하였느니라. 상제께서는 돌로 만든 맷돌 밑짝의 가운데 중쇠를 이에 물고 올리시니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고 멍하니 보고만 있더라. 때로는 마당에 서서 발로 지붕 처마 끝을 차기도 하고 때로는 한 손으로 용마름을 지붕 위로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발뒤꿈치와 두 팔을 땅에 대고 떠 있는 몸으로 장정 十여 인으로 하여금 허리를 땅에 닿게 하였으나 장정들은 힘만 빠지고 상제의 허리는 흔들리지도 아니하니라. 어느 날 여럿이 상제와 장난하는데 상제께서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를 돌리듯이 하시더라고 김 광문은 전하도다.
상제께서 여러 글방으로 자주 드나드실 때 글씨의 청을 받으시면 반드시 글줄 끝마다 한두 자쯤 쓸 만한 빈 곳을 남기고 써 주셨도다.
상제께서 부친이 정읍의 박 부자로부터 수백 냥의 빚 독촉에 걱정으로 세월을 지내는 것을 아시고 부친에게 五十냥을 청하여 박 부자의 집으로 찾아가서 갚으시고 그의 사숙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도다. 이때 훈장이 학동에게 시를 짓게 하니 상제께서 청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니 그 시격의 절묘에 훈장과 서동들이 크게 놀라니라. 박 부자도 심히 기이하게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지라. 상제께서는 마지못해 며칠 머물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그는 이에 감동되어 증서를 불사르고 채권을 탕감하였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교운을 펼치신 후 때때로 종도들에게 옛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그 사람들 중에는 강 태공(姜太公)ㆍ석가모니(釋迦牟尼)ㆍ관운장(關雲長)ㆍ이마두(利瑪竇)가 끼었도다.
이 치안(李治安)이 상제의 예지에 감탄하여 상제를 좇게 되었도다.
전주부중에 들어가시다가 어떤 사람이 황급하게 가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집으로 곧 돌아가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는도다. 상제께서 「그대가 지금 혼사로 중매인을 찾아가나 그가 그대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느니라. 그리고 오늘 중매인을 만나서 결정하지 않으면 그 일은 허사가 되리라」 하시니라. 그 사람이 매우 경탄하여 일러주신 대로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니 과연 중매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도다. 그 후 그 사람은 감복하여 상제를 찾아뵈니 이 사람이 바로 이 치안이니라.
상제께서 구천에 계시자 신성ㆍ불ㆍ보살 등이 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호소하므로 서양(西洋)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셔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三十년을 지내시면서 최 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셨다가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리기로 정하셨도다.
상제께서 대순하시다가 선망리의 한 여인이 근친하러 갔을 때 그 여인의 몸을 하늘의 불덩어리로 덮고 이상한 향기와 맑은 기운이 가득히 찬 방에서 신미년 九월 十九일에 광구천하하기 위해 강세하실 것이 예시되었느니라.
1887년
상제께서 정해(丁亥)년 어느 날 외가에 행하셨도다. 어떤 술주정꾼이 까닭없이 상제께 욕설을 퍼붓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아무 대항도 하지 아니하시니 난데없이 큰 돌절구통이 떠 와서 그의 머리 위를 덮어씌우니 그는 절구통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니 상제께서 몸을 돌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도다.
상제께서 송광사(松廣寺)에 계실 때 중들이 상제를 무례하게 대하므로 상제께서 꾸짖으시기를 「산속에 모여 있는 이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치고 있는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 하시고 법당 기둥을 잡아당기시니 한 자나 물러나니 그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백배사죄하였도다. 그 뒤에 물러난 법당 기둥을 원상대로 회복하려고 여러 번 수리하였으되 그 기둥은 꼼짝하지 않더라고 전하는도다.
1894년
상제께서 갑오(甲午)년에 정 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의 서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이 비범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도다. 글방은 처남의 집이고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金溝郡草處面內主洞)에 있었도다.
이해에 고부인(古阜人) 전 봉준(全琫準)이 동학도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시정(時政)에 반항하니 세상이 흉동되는지라. 이때에 금구인 김 형렬(金亨烈)이 상제의 성예를 듣고 찾아뵌 후 당시의 소란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글 읽으시기를 청하므로 글방을 폐지하고 전주군 우림면 동곡(全州郡雨林面銅谷) 뒷산에 있는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 그곳도 번잡하기에 다른 곳으로 떠나셨던바 그곳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도다.
갑오년 五월 어느 날 밤 상제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중에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나도 후천 진인이라. 천지현기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의논할 일이 있노라」고 아뢰는도다.
전 봉준(全琫準)이 학정(虐政)에 분개하여 동학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흉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때에 상제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알으시고 여름 어느 날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상제의 말씀을 좇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ㆍ광찬ㆍ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 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 공신ㆍ황 응종ㆍ신 경수 들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 주시고 또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들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十二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들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보다 많아지리라. 풀어 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
상제께서 「선천에서 삼상(三相)의 탓으로 음양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거주성명 서신사명 좌상 우상 팔판 십이백 현감 현령 황극 후비소(居住姓名西神司命 左相右相八判十二伯 縣監縣令皇極後妃所)」라 써서 광찬에게 「약방의 문지방에 맞추어 보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일이 헛일이라」고 말씀하시기에 경학이 「여백을 오려 버리고 글자 쓴 곳만 대어보는 것이 옳겠나이다」고 말하기에 그대로 행하니 꼭 맞으니라.
한번은 상제께서 임 상옥에게 사기그릇을 주신 뒤에 공우를 대동하고 전주로 가시는 도중에 세천에 이르시니 점심때가 되니라. 공우가 상제를 고 송암(高松菴)의 친구 집에 모시고 상제께 점심상을 받게 하였도다. 상제께서 문득 「서양 기운을 몰아내어도 다시 몰려드는 기미가 있음을 이상히 여겼더니 뒷골방에서 딴전 보는 자가 있는 것을 미처 몰랐노라」 하시고 「고 송암에게 물어보고 오너라」고 공우에게 이르시고 칠성경에 문곡(文曲)의 위치를 바꾸어 놓으셨도다.
상제께서 최 익현과 박 영효(朴泳孝)의 원을 풀어 주신다고 하시면서「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일월 최 익현 천포 천포 천천포 만포 만포 만만포 창생 박 영효(千歲千歲千千歲 萬歲萬歲萬萬歲 日月崔益鉉 千胞千胞千千胞 萬胞萬胞萬萬胞 蒼生朴泳孝)」라 쓰시고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만국 창생들의 새 생활법으로서 물화상통을 펼치셨도다. 종도들이 상제의 명을 좇아 공신의 집에서 밤중에 서로 번갈아 그 집의 물독 물을 반 바가지씩 퍼내 우물에 쏟아 붓고 다시 우물물을 반 바가지씩 독에 붓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여러 우물과 독의 물을 번갈아 바꾸어 갈아 부었도다.
신 원일이 개벽공사를 빨리 행하시기를 상제께 간청하니라. 상제께서 「인사는 기회가 있으며 천시는 때가 있으니 그 기회와 때를 기다릴 것이니 이제 기회와 천시를 억지로 쓰면 그것은 천하에 재화를 끼치게 될 뿐이며 억조의 생명을 억지로 앗아가는 일이 되리라. 어찌 차마 행할 바이냐」고 말씀하셨으되 원일이 「방금 천하가 무도하여 선악을 분별하기 어려우니 속히 이를 잔멸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주시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말하면서 간청하니 상제께서 심히 괴로워하셨도다.
공신의 집에서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 뒤에 전쟁이 있겠느냐 없겠느냐」고 물으시니 혹자는 있으리라고도 하고 혹자는 없으리라고도 아뢰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천지 개벽시대에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라고 하시고 전쟁 기구를 챙겨 보신다면서 방에 있는 담뱃대 二十여 개를 거두어 모아 거꾸로 세우고 종도들로 하여금 각기 수건으로 다리와 머리를 동여매게 하시고 또 백지에 시천주를 써서 심을 비벼 불을 붙여 들게 하고 문창에 구멍을 뚫어 놓은 다음에 모두 담뱃대를 거꾸로 메게 하고 「행오를 잃으면 군사가 상하리라」 이르고 종도들로 하여금 뒷문으로 나가서 부엌으로 돌아와서 창 구멍에 담뱃대를 대고 입으로 총소리를 내게 하고 다시 변소로 돌아와서 창 구멍에 담뱃대를 대고 다시 총소리를 내게 하고 또 헛청으로 돌아들어 그와 같이 하되 궁을(弓乙)형을 지어 빨리 달리게 하시니 늙은 사람이 씨근덕 거리더라. 다시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이 말세를 당하여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 뒷날 대전쟁이 일어나면 각기 재조를 자랑하리니 재조가 월등한 나라가 상등국이 되리라.」 이 공사가 끝나자 천고성이 사방에서 일어났도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 문 공신의 집 벽에 붙이고 이를 정의도(情誼圖)라고 이름하셨도다.
또 하루는 경석에게 가라사대 「갑오년 겨울에 너의 집에서 三인이 동맹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렇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그 일을 어느 모해자가 밀고함으로써 너의 부친이 해를 입었느냐」고 하시니 경석이 낙루하며 「그렇소이다」고 대답하니라. 또 가라사대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좇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 하시니라. 경석이 세 아우와 함께 옆방에 모여 서로 원심을 풀기로 정하고 상제께 고하니 상제께서 「그러면 뜰 밑에 짚을 펴고 청수 한 동이를 떠다 놓은 후 그 청수를 향하여 너의 부친을 대한 듯이 마음을 돌렸음을 고백하라」 하시니 경석의 네 형제가 명을 좇아 행하는데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방성대곡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너의 부친은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을 괴로워하니 그만 울음을 그치라」 이르시니라. 그 후에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란 글을 써서 벽에 붙이시며 경석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에 두게 하셨도다.
1895년
고부 지방의 유생들이 을미(乙未)년 봄에 세상의 평정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斗升山)에서 시회(詩會)를 열었을 때 상제께서 이에 참여하시니라. 이때 한 노인이 상제를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모셔가더니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그 책을 통독하셨도다.
유생들은 세상이 평온하다고 하나 세도는 날로 어지러워졌도다. 상제께서 이때 비로소 광구천하하실 뜻을 두셨도다.
五월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을 떠나셨으나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도다. 그리하여 매우 염려하는 상제의 부친을 보고 유 덕안(兪德安)은 대신하여 상제를 찾으려고 의관을 갖추고 객망리를 떠났도다. 그가 태인(泰仁) 강삼리에 이르렀을 때 관군은 의병 두 사람을 잡고 덕안을 동학군으로 몰고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 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두 사람이 먼저 참형되고 덕안의 차례가 되었을 찰나에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지라. 관군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어 사방이 보이지 않아 덕안이 정신을 차리니 두 사람의 시체만이 짙은 어둠 속에 뒹굴어 있었도다. 무서움에 쫓겨 그는 먼 곳에서 비치는 등불을 향하여 지친 몸을 이끌어가니 날이 새기 시작하니라. 등불은 간데온데없는 산중이었도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그는 이 재생의 인도를 호랑이가 불빛을 비춰 준 것으로 믿었도다. 얼마 후 상제께서 객망리에 홀연히 돌아오셨도다. 상제께서 덕안을 보시고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도다」 말씀하며 위로하시니 그는 더욱 자신의 재생을 상제의 덕화라고 굳게 믿으며 재생의 감격을 되새기니라. 당시는 가릴 사이 없이 마구 죽이는 판국이었도다.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하신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ㆍ창녕ㆍ남지에 이르러 천계산ㆍ안국산ㆍ여항산ㆍ삼족산ㆍ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ㆍ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
1897년
상제께서 정유(丁酉)년에 다시 정 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형렬(亨烈)의 아들 찬문(贊文)과 그 이웃 서동들을 가르치셨도다. 이때에 유불선음양참위(儒佛仙陰陽讖緯)를 통독하시고 이것이 천하를 광구함에 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시고 얼마 동안 글방을 계속하시다가 인심과 속정을 살피고자 주유의 길을 떠나셨도다.
금구 내주동을 떠나신 상제께서는 익산군 이리(裡里)를 거쳐 다음날 김 일부(金一夫)를 만나셨도다. 그는 당시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교법을 문도에게 펼치고 있던 중 어느 날 일부가 꿈을 꾸었도다. 한 사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일부에게 강 사옥(姜士玉)과 함께 옥경(玉京)에 오르라는 천존(天尊)의 명하심을 전달하는도다. 그는 사자를 따라 사옥과 함께 옥경에 올라가니라. 사자는 높이 솟은 주루금궐 요운전(曜雲殿)에 그들을 안내하고 천존을 배알하게 하는도다. 천존이 상제께 광구천하의 뜻을 상찬하고 극진히 우대하는도다. 일부는 이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 돌연히 상제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도다. 일부는 상제께 요운(曜雲)이란 호를 드리고 공경하였도다.
상제께서 이곳에 며칠 머무시고 다시 계속하여 경기(京畿)ㆍ황해(黃海)ㆍ평안(平安)ㆍ함경(咸鏡)ㆍ경상(慶尙)도의 각지에로 두루 유력하셨느니라. 어느 날 상제께서 전주부에 이르시니 부중 사람들이 상제를 신인으로 우러러 모시니라.
주유하시다가 상제께서 함열(咸悅)에 이르셔서 「만인 함열(萬人咸悅)」이라 기뻐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내장산(內藏山)에 가셨을 때에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라고 읊으셨도다.
또 어느 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步拾金剛景 靑山皆骨餘
其後騎驢客 無興但躊躇
를 외워 주시니라.
1900년
상제께서 三년 동안 주유하신 끝에 경자(庚子)년에 고향인 객망리에 돌아오셔서 시루산 조모님의 묘를 면례하시니 이때 류 서구(柳瑞九)가 지사(地師)로서 상제를 보좌하였도다. 이후에 상제께서 항상 시루산 상봉에서 머리를 푸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호둔하고 앉아 계셨을 때 마침 나무꾼들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기겁하여 상제의 부친께 아뢰는지라. 부친께서도 당황하여 시루봉에 오르니 범은 보이지 않고 상제께서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공부하고 계시는 것만이 보였도다.
상제께서는 객망리 시루봉에서 공부하시다가 밤이 되면 간간이 유 덕안의 집에 내려가셔서 쥐눈이콩 한 줌을 얻어 냉수와 함께 잡수시곤 하셨도다. 상제께서 덕안의 아들 칠룡(七龍)을 바라보시고 「네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구나」고 말씀하셨느니라.
상제께서 시루봉에 오르시면 산천이 크게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셨도다. 이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두려워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도다.
상제께서 시루산에서 공부하시다가 이따금 산 밑에 있는 샘터 너머에서 우시기도 하셨는데 한번은 부친께서 밥을 가지고 시루봉에 오르다가 그 광경을 보았도다.
그러시다가도 다시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어느 날 시루봉에서 진법주(眞法呪)를 외우시고 오방신장(五方神將)과 四十八장과 二十八장 공사(公事)를 보셨도다. 이 후에 상제께서 목에 붉은 수건을 걸고 쌍정리(雙丁里)에 있는 김 기진(金基鎭)의 집에 가셔서 그에게 공사에 관해서 말씀하셨도다. 이 집에 동리 사람들이 많이 모이곤 하였도다.
상제께서 공부하시는 소문이 그 지방에 전해지자 고부(古阜) 경무청은 상제께서 요술공부를 한다 하여 붙잡으려고 순검들을 보내오니 상제께서는 순검이 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삿갓을 쓰고 길가에 나가서 안개를 짓고 앉아 계셔도 순검들이 몰라보고 지나가곤 하였도다.
1901년
상제께서 신축(辛丑)년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 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 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四十九일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 마침내 七월 五일에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으시고 방 안에서 금곡을 불러 미음 한 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반겨 곧 미음을 올렸느니라. 잠시 후에 상제께서 밖으로 나오시니 그 입으신 옷이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남루한지라. 주지승 금곡이 곧 상제의 본댁에 사람을 보내 의복을 가져오게 하였더니 부인 정씨(鄭氏)는 의복을 내어놓으며 불경한 말을 하니라. 이것은 평소에 상제께서 가사를 돌보시지 않았던 불만에서 나온 소치였도다. 금곡이 그 의복을 상제께 올리니 가라사대 「이 옷에 요망스러운 계집의 방정이 붙었으니 속히 버리라」 하시고 입지 않으셨도다. 이 일을 금곡이 다시 사람을 시켜 부인에게 전하니 그제야 비로소 부인 정씨가 뉘우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새옷을 올렸도다.
그 후 어느 날 금곡이 상제를 정중하게 시좌하더니 상제께 저의 일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청원하였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九十세가 넘어서 입적하리라」 하시니라.
하루는 상제께서 가라사대 「대범 판 안에 있는 법을 써서 일하면 세상 사람의 이목의 저해가 있을 터이니 판 밖에서 일하는 것이 완전하리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짜기에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희 무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려 함인가」 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이는도다. 상제께서 「알았으니 물러들 가 있거라」고 타이르시니 수많은 금수들이 그 이르심을 좇는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어느 날에 가라사대 「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아래 입술을 내어 보이시니 거기에 붉은 점이 있고 상제의 용안은 금산사의 미륵금신과 흡사하시며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白毫珠)가 있고 왼 손바닥에 임(壬) 자와 오른 손바닥에 무(戊) 자가 있음을 종도들이 보았도다.
김 형렬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정(鄭) 집전이라 하는 사람은 지식이 신기한 사람이외다. 저의 증조가 계실 때에 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나이다. 동리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앞에 두고 걱정하였는데 이 걱정을 알고 금광을 가리켜 주어서 고생을 면케 하였으며 많은 영삼(靈蔘)을 캐어 병든 사람을 구제하였고 지난 임술(壬戌)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민란을 미리 말하였나이다. 저의 증조께서 그의 지식을 빌어 명당 하나라도 얻어서 그 여음을 후세에 끼치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이 오늘날 저의 한이 되는 일이로소이다」고 여쭈는지라. 듣고만 계시던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런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남인 너의 집의 밥을 헛되게 먹으리오.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형렬에게
夫用兵之要在崇禮而重祿
禮崇則義士至祿重則志士輕死
故祿賢不愛財賞功不逾時則士卒並敵國削
을 외워 주시고 기억하라고 이르셨도다.
김 도일(金道一)이 앓고 난 뒤에 어느 날 지팡이를 짚고 상제를 뵈러 갔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그 지팡이를 빼앗아 꺾어 버리시니 그는 할 수 없이 서 있게 되었도다. 이후부터 그는 요통이 쾌차하였느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도일에게 가라사대 「문밖에 나가서 서쪽 하늘에 붉은 구름이 떠 있나 보라」고 하시니 그가 나가보고 들어와서 그러함을 아뢰었도다. 다시 상제께서 가라사대 「금산(金山) 도득(圖得)하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하셨도다.
시속에 말하는 개벽장은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을 건지는 개벽장(開闢長)을 말함이니라.
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신 신축(辛丑)년 겨울에 창문에 종이를 바르지 않고 부엌에 불을 지피지 않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전폐하고 아흐레 동안 천지공사를 시작하셨도다. 이 동안에 뜰에 벼를 말려도 새가 날아들지 못하고 사람들이 집 앞으로 통행하기를 어려워하였도다.
상제께서 이듬해 四월에 김 형렬의 집에서 삼계를 개벽하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이때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서 행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그것을 비유컨대 부모가 모은 재산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얻어 쓰려면 쓸 때마다 얼굴이 쳐다보임과 같이 낡은 집에 그대로 살려면 엎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불안하여 살기란 매우 괴로운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벽하여야 하나니 대개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하시고 「너는 나를 믿고 힘을 다하라」고 분부하셨도다.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고 김 형렬에게 말씀하시고 그 중의 명부공사(冥府公事)의 일부를 착수하셨도다.
상제께서 삼계의 대권(三界ㆍ大權)을 수시수의로 행하셨느니라. 쏟아지는 큰 비를 걷히게 하시려면 종도들에게 명하여 화로에 불덩이를 두르게도 하시고 술잔을 두르게도 하시며 말씀으로도 하시고 그 밖에 풍우ㆍ상설ㆍ뇌전을 일으키는 천계대권을 행하실 때나 그 외에서도 일정한 법이 없었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명부의 착란에 따라 온 세상이 착란하였으니 명부공사가 종결되면 온 세상 일이 해결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뒤부터 상제께서 날마다 종이에 글을 쓰시고는 그것을 불사르셨도다.
공사에 때로는 주육과 단술이 쓰이고 상제께서 여러 종도들과 함께 그것을 잡수시기도 하셨도다.
상제께서 김 형렬의 집에서 그의 시종을 받아 명부공사를 행하시니라. 상제께서 형렬에게 「조선명부(朝鮮冥府)를 전 명숙(全明淑)으로, 청국명부(淸國冥府)를 김 일부(金一夫)로, 일본명부(日本冥府)를 최 수운(崔水雲)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노라」고 말씀하시고 곧 「하룻밤 사이에 대세가 돌려 잡히리라」고 말씀을 잇고 글을 써서 불사르셨도다.
이해 七월에 이르러 쌀값이 더욱 뛰고 거기에 농작물마저 심한 충재가 들어 인심이 더욱 사나워지기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신축년부터 내가 일체의 천지공사를 맡았으니 금년에는 농작물이 잘 되게 하리라」고 이르시니라. 이해에 비가 적절히 내리고 햇볕이 쪼이더니 들판에서는 온통 풍년을 구가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면서부터 일체의 아표신(餓莩神)을 천상으로 몰아 올렸으니 이후에는 백성이 기근으로 죽는 일은 없으리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언제나 출타하시려면 먼저 글을 써서 신명에게 치도령(治道令)을 내리시니라. 상제께서 계셨던 하운동은 원래 산중이라 길이 매우 좁고 험하고 수목이 우거져 길에 얽혀 있느니라. 치도령을 내리시면 여름에는 나무에 내린 이슬을 바람이 불어 떨어뜨리고 겨울에는 진흙길이 얼어붙기도 하고 쌓인 눈이 녹기도 하였도다.
최 운익(崔雲益)의 아들이 병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므로 운익이 상제께 달려와서 배알하고 살려주시기를 애걸하니라. 상제 가라사대 「그 병자가 얼굴이 못생김을 일생의 한으로 품었기에 그 영혼이 지금 청국 반양(淸國潘陽)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니 어찌하리오.」 운익이 상제께서 병자를 보신 듯이 말씀하시므로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굳이 약을 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상제께서 마지못해 사물탕(四物湯) 한 첩을 지어 「九月飮(구월음)」이라 써 주시니라. 운익이 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니 아들은 벌써 숨을 거뒀도다. 운익이 돌아간 후에 종도들이 구월음의 뜻을 여쭈었더니 가라사대 「구월 장시황어 여산하(九月蔣始皇於驪山下)라 하니 이것은 살지 못할 것을 표시함이로다. 그 아들이 죽을 사람이지만 만일 약을 굳이 원하다가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원한을 품을 것이므로 다만 그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약을 주었노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경석을 데리고 농암(籠岩)을 떠나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三十리 되는 곳에 이르러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 하시고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의 재실에 거주하는 박 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셨도다. 공우와 경석에게 가라사대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라」 또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종도들과 함께 동곡으로 가시는데 길이 진흙으로 심히 험하거늘 치도령을 내리시니 질던 길이 곧 굳어지니라. 마른 짚신을 신고 동곡에 가실 수 있었도다. 그 당시 쓰신 치도령은 「어재 함라산하(御在咸羅山下)」의 여섯 글자인바 상제께서 이것을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농암에 머무르시며 공사를 마치시고 그곳을 떠나려 하실 때에 차 경석이 와서 배알하고 「길이 질어서 한 걸음도 걷기 어렵나이다」고 아뢰는도다. 상제께서 양지에 「칙령 도로 신장 어재 순창 농암 이우 정읍 대흥(令道路神將 御在淳昌籠岩 移于井邑大興里)」라 쓰시고 물에 담궜다가 다시 끄집어내어 손으로 짜신 후에 화롯불에 사르시니라. 이때 갑자기 큰 비가 내리다가 그치고 남풍이 불더니 이튿날 땅이 굳어지는도다. 상제께서 새 신발을 신고 경석을 앞장세우고 정읍에 가셨도다.
그 후에 상제께서 김제 반월리(金堤半月里) 김 준희(金駿熙)의 집에 계셨을 때 전주 이동면 전룡리(全州伊東面田龍里)에 사는 이 직부의 부친이 상제를 초빙하는도다. 상제께서 그 집에 옮겨 가셨는데 그 집 훈장이 상제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아셨도다. 상제께서 줏대를 갖고 산을 두시며 그 동네 호구와 남녀 인구의 수를 똑바로 맞추시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줄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라. 그와 직부가 이상히 여겨 동네 호구를 조사하니 一호 一구의 차이도 없었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죽었도다.
상제께서 아우 영학(永學)에게 부채 한 개에 학을 그려 주시고 「집에 가서 부치되 너는 칠성경(七星經)의 무곡(武曲) 파군(破軍)까지 읽고 또 대학(大學)을 읽으라. 그러면 도에 통하리라」고 이르셨도다. 영학이 돌아가는 길에 정 남기의 집에 들르니 그 아들도 있었는데 아들이 부채를 탐내어 빼앗고 주지 않으니라. 영학이 그 부채의 내용 이야기를 말하니 아들은 더욱 호기심을 일으켜 주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영학은 빼앗기고 집에 돌아왔도다. 아들은 부채를 부치고 대학의 몇 편을 읽지도 않는데 신력이 통하여 물을 뿌려 비를 내리게 하며 신명을 부리게 되는지라. 남기는 기뻐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상제의 도력을 빼앗고자 아들과 함께 하운동에 가는데 때마침 상제께서 우묵골(宇默谷)로부터 하운동에 오시는 길이었도다. 남기의 아들이 상제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겁을 먹고 도망가거늘 남기가 붙들고 와서 상제께 배알하니 상제께서 그의 속셈을 꿰뚫고 남기의 무의함을 꾸짖으시며 그 아들의 신력(神力)을 다 거두신 후에 돌려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전주 용두치(龍頭峙)에서 우사(雨師)를 불러 비를 내리는 공사를 보셨도다. 이 치복이 전주 김 보경을 찾고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런 때에 나이 적은 사람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절을 받느니라.」 치복이 상제께 사배를 올리니 상제께서 「금년에 비가 극히 적으리라. 만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천지에 동과혈(冬瓜穴)이 말라 죽으리라. 그러므로 서양으로부터 우사를 불러서 비를 주게 하리라」 말씀하시고 술상을 차리고 치복에게 술 두 잔을 주시며 한 잔을 요강에 부으셨도다.
백 남신의 친족인 백 용안(白龍安)이 관부로부터 술 도매의 경영권을 얻음으로써 전주 부중에 있는 수백 개의 작은 주막이 폐지하게 되니라. 이때 상제께서 용두치 김 주보의 주막에서 그의 처가 가슴을 치면서 「다른 벌이는 없고 겨우 술장사하여 여러 식구가 살아왔는데 이제 이것마저 폐지되니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통곡하는 울분의 소리를 듣고 가엾게 여겨 종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어찌 남장군만 있으랴. 여장군도 있도다」 하시고 종이에 여장군(女將軍)이라 써서 불사르시니 그 아내가 갑자기 기운을 얻고 밖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지르는도다. 순식간에 주모들이 모여 백 용안의 집을 급습하니 형세가 험악하게 되니라. 이에 당황한 나머지 그는 주모들 앞에서 사과하고 도매 주점을 폐지할 것을 약속하니 주모들이 흩어졌도다. 용안은 곧 주점을 그만두었도다.
상제께서 김 덕찬ㆍ김 준찬 등 몇 종도를 데리고 용두리에서 공사를 행하셨도다. 이곳에 드나드는 노름꾼들이 돈 八十냥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윷판을 벌이기에 상제께서 저희들의 속심을 꿰뚫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저 사람들이 우리 일행 중에 돈이 있음을 알고 빼앗으려 하나니 이 일로써 해원되니라」 하시고 돈 五十냥을 놓고 윷을 치시는데 순식간에 八十냥을 따시니라. 품삯이라 하시며 五푼만을 남기고 나머지 돈을 모두 저희들에게 주며 말씀하시니라. 「이것은 모두 방탕한 자의 일이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서 직업에 힘쓰라.」 저희들이 경복하여 허둥지둥 돌아가니라. 종도들이 상제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윷이 되는 법을 궁금히 여기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던지는 법을 일정하게 하면 그렇게 되나니 이것도 또한 일심이라」 하셨도다.
박 공우가 한때 일진회의 한 간부였으나 상제를 따른 후의 어느 날 가만히 일진회 사무소에 일을 보고 돌아왔는데 상제께서 문득 공우에게 이르시기를 「한 몸으로 두 마음을 품은 자는 그 몸이 찢어지리니 주의하라」 하시기에 공우는 놀라며 일진회와의 관계를 아주 끊고 숨기는 일을 하지 않으니라.
상제께서 어느 날 공우를 데리시고 태인 새울에서 백암리로 가시는 도중에 문득 관운장(關雲長)의 형모로 변하여 돌아보시며 가라사대 「내 얼굴이 관운장과 같으냐」 하시니 공우가 놀라며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늘 상제께서 세 번을 거듭 물으시니 공우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관운장과 홉사하나이다」고 아뢰니 곧 본 얼굴로 회복하시고 김 경학의 집에 이르러 공사를 행하셨도다.
상제께서 「내가 삼계 대권을 주재(主宰)하여 선천의 모든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선경을 만들리라」고 종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도다. 그 때가 더딘 것에 종도들이 한탄하면서 하루 바삐 상제께서 개벽을 이룩하시기만 기다리는도다.
상제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동곡에 돌아와 계시던 어느 날 「풍ㆍ운ㆍ우ㆍ로ㆍ상ㆍ설 ㆍ뇌ㆍ전(風雲雨露霜雪雷電)을 이루기는 쉬우나 오직 눈이 내린 뒤에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린 뒤에 서리를 오게 하기는 천지의 조화로써도 어려운 법이라」 말씀하시고 다시 「내가 오늘 밤에 이와 같이 행하리라」 이르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과연 눈이 내린 뒤에 비가 오고 비가 개이자 서리가 내렸도다.
상제께서 어느 해 여름에 김 형렬의 집에 계실 때 어느 날 밤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강 감찬은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며 좌우 손으로 좌우 무릎을 번갈아 치시며 「좋다 좋다」 하시니 제비봉(帝妃峰)에서 번개가 일어나 수리개봉(水利開峰)에 떨어지고 또 수리개봉에서 번개가 일어나 제비봉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된 후에 「그만하면 쓰겠다」 하시고 좌우 손을 멈추시니 번개도 따라 그치는지라. 이튿날 종도들이 제비봉과 수리개봉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번개가 떨어진 곳곳에 수십 장 사이의 초목은 껍질이 벗겨지고 타 죽어 있었도다.
신 원일이 건재 약국을 차리고 약재를 사려고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에 김 보경의 집에 들러서 상제께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러 이야기 끝에 「길이 질어서 행로에 불편을 심하게 받았나이다」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웃으시고 아무 말씀이 없었는데 원일이 이튿날 아침 길에 나서니 길이 얼어붙은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기뻐하였느니라.
상제께서 농암에 계실 때에 황 응종과 신 경수가 와서 배알하고 「눈이 길에 가득히 쌓여 행인이 크게 곤란을 받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장근(壯根)으로 하여금 감주를 만들게 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잡수시니라. 쌀쌀하던 날씨가 별안간 풀리면서 땅의 눈이 녹아서 걷기가 편하여졌도다.
한겨울에 상제께서 불가지 김 성국의 집에 계셨도다. 김 덕찬과 김 성국은 꿩이 많이 날아와서 밭에 앉기에 그물을 치고 꿩잡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너희들은 잡는 공부를 하라. 나는 살릴 공부를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꿩이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니라.
상제께서 약방에 계시던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해가 앞산 봉우리에 반쯤 떠오르는 것을 보시고 종도들에게 말씀하시니라. 「이제 난국에 제하여 태양을 멈추는 권능을 갖지 못하고 어찌 세태를 안정시킬 뜻을 품으랴. 내 이제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고 담배를 물에 축여서 세 대를 연달아 피우시니 떠오르던 해가 산머리를 솟지 못하는지라. 그리고 나서 상제께서 웃으며 담뱃대를 땅에 던지시니 그제야 멈췄던 해가 솟았도다.
1902년
상제께서 임인년 어느 날 김 형렬과 함께 금산사(金山寺) 부근의 마을에 가서 계셨도다. 이 부근의 오동정(梧桐亭)에 살고 있던 김 경안(金京安)이란 사람이 기독교의 신약전서를 가지고 있었던바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신약전서 한 권을 구하게 하시니라. 그는 이르신 대로 그로부터 책을 빌려다 상제께 드렸더니 상제께서 그것을 불사르셨도다.
그 후 어느 날 형렬은 상제를 모시고 오동정을 찾아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이 자리에 경안이 찾아와서 빌려준 신약전서를 돌려달라고 말하기에 형렬이 우물쭈물하면서 딱한 표정만 짓고 앉아 있노라니 상제께서 가름하시면서 「곧 돌려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마침 이때에 그곳을 한 붓 장수가 지나가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불러들이고 음식을 권한 다음에 그 붓 상자를 열어보이라고 청하시니 그가 분부에 좇으니라. 상제께서 「그대는 예수를 믿지 아니하니 이 책은 소용이 없을 터이므로 나에게 줄 수 없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음식 대접을 받은 터이어서 기꺼이 응하는지라. 상제께서 그 책을 경안에게 돌려주시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하였도다.
상제의 신성하심이 하운동(夏雲洞)에도 알려졌도다. 이곳에 이 선경(李善慶)이란 자의 빙모가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주인을 찾고 「그대의 아내가 四十九일 동안 정성을 들일 수 있느냐를 잘 상의하라」 분부하시니라. 주인은 명을 받은 대로 아내와 상의하니 아내도 일찍부터 상제의 신성하심을 들은 바가 있어 굳게 결심하고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다시 주인에게 어김없는 다짐을 받게 하신 뒤에 공사를 보셨도다. 그 여인은 날마다 머리를 빗고 목욕재계한 뒤에 떡 한 시루씩 쪄서 공사 일에 준비하니라. 이렇게 여러 날을 거듭하니 아내가 심히 괴로워하여 불평을 품었도다. 이날 한 짐 나무를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아 아내가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노라니 상제께서 주인을 불러 「그대 아내는 성심이 풀려서 떡이 익지 않아 매우 걱정하고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사과하게 하라. 나는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아니하는도다」고 이르시니라. 주인이 아내에게 이 분부를 전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사랑방에 나와 상제께 사과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시루를 열어보니 떡이 잘 익어 있었도다. 부인은 이로부터 한결같이 정성을 들여 四十九일을 마치니 상제께서 친히 부엌에 들어가셔서 그 정성을 치하하시므로 부인은 정성의 부족을 송구히 여기니 상제께서 부인을 위로하고 「그대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쳤으니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 있는 그 증거를 보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정읍으로부터 진펄이나 논이나 가리지 않고 질러오셨도다. 이것을 보고 류 연회(柳然會)란 동리 사람이 「길을 버려두고 그렇게 오시나이까」라고 말하니 상제께서 「나는 일을 하느라고 바쁘건만」 하시며 그대로 가시니라. 이 일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 그가 측량기사가 되어 신작로를 측정하게 되었는데 그 측량이 바로 상제께서 함부로 걸어가신 선이 되니라. 지금 덕천(德川) 사거리에서 정읍을 잇는 신작로가 바로 그 길이로다.
김 형렬은 상제를 모시고 있던 어느 날 상제께 진묵(震黙)의 옛일을 아뢰었도다. 「전주부중(全州府中)에 한 가난한 아전이 진묵과 친한 사이로서 하루는 진묵에게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물으니 진묵이 사옥소리(司獄小吏)가 되라고 일러주니 아전은 이는 적은 직책이라 얻기가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으나 그 후에 아전은 옥리가 되어 당시에 갇힌 관내의 부호들을 극력으로 보살펴주었나이다. 그들은 크게 감동하여 출옥한 후에 옥리에게 물자로써 보답하였다 하나이다. 그리고 진묵은 밤마다 북두칠성을 하나씩 그 빛을 가두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여 七일 만에 모두 숨겨버렸다 하나이다. 태사관(太史官)이 이 변은 하늘이 재앙을 내리심이니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시어 옥문을 열고 천의에 순종하사이다 하고 조정에 아뢰오니 조정은 그것이 옳음을 알고 대사령을 내렸다 하나이다.」
이 말을 상제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러하였으리라. 내가 이를 본받아 한 달 동안 칠성을 숨겨서 세상 사람들의 발견을 시험하리라」 하시고 그날 밤부터 한 달 동안 칠성을 다 숨기시니 세상에서 칠성을 발견하는 자가 없었도다.
상제께 김 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 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 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 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일진회가 발족되던 때부터 관을 버리시고 삿갓을 쓰고 다니시며 속옷을 검은 것으로 외의를 흰 것으로 지어 입으셨도다. 「저 일진회가 검은 옷을 입었으니 나도 검은 옷을 입노라」 말씀하시고 문밖에 나오셔서 하늘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구름의 안이 검고 밖이 흰 것은 나를 모형한 것이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구릿골을 떠나 익산(益山)에 이르시고 그곳에서 월여를 보내시다가 다시 회선동(會仙洞)에 이르시니라. 이곳에 김 보경(金甫京)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집 외당에 상제께서 계셨도다. 이때 그는 모친의 위독함을 상제께 아뢰니라. 이를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오늘 밤은 명부사자(冥府使者)가 병실에 침입하여 나의 사자의 빈틈을 타서 환자를 해할 것이니 병실을 비우지 말고 꼭 한 사람이 방을 지키면서 밤을 새우라」 하시니라. 보경이 이르심을 좇아 가족 한 사람씩 교대로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기로 하고 가족들을 단속하였느니라. 여러 날이 계속되매 식구들이 졸음에 못 이겨 상제의 이르심을 잊어 갔도다. 이날 밤 보경이 깨어 방을 지키다가 깜박 잠에 빠졌던바 이때 상제께서 외당에서 급히 소리쳐 부르시니라. 그가 놀라 깨어 보니 벌써 모친은 운명하여 있었도다. 상제께서 말씀하신 나의 사자는 바로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로되 식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도다.
이날 밤에 객망리 앞 달천리에 별안간 우레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자 오 동팔(吳東八)의 집이 무너졌도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니라. 그 후 얼마 지나 그가 무너진 집의 재목을 모아 가지고 집을 세우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였으되 그때마다 집이 무너지는도다. 그는 부득이 술집을 거두고 움막을 치고 농사로 업을 바꿨느니라. 농사로 살아오던 어느 날에 면이 없는 사람이 와서 움막살이의 참상을 보고 손수 집을 한나절 만에 세우고 흔적 없이 그대로 돌아가는지라. 사람들은 수십 일 걸릴 일을 하루도 못 되게 완성한 것에 크게 놀랐도다. 사람들은 이것이 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사 신장을 보내신 덕이라 믿고 더욱 상제를 좇는도다.
김 형렬은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상제를 모시고 있었도다. 그러던 어느 날 형렬이 상제의 말씀 끝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송 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 하나이다」라고 아뢰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그러하랴. 이제 나 있는 지붕을 살펴보라」 하시니라. 형렬이 밖에 나가 살펴보니 일기가 차고 백설이 쌓였는데도 오직 계시는 그 지붕에 한 점의 눈도 없을 뿐 아니라 맑은 기운이 하늘에 뻗쳐 구름이 가리지 못하고 푸른 하늘에까지 통하니라. 그 후에도 살펴보면 언제나 상제께서 머무시는 곳에 구름이 가리지 못하는도다.
금산사 청련암(靑蓮庵)의 중 김 현찬(金玄贊)이 전부터 상제의 소문을 듣고 있던 차에 상제를 만나게 되어 명당을 원하니 상제께서 그에게 「믿고 있으라」고 이르셨도다. 그 후 그는 환속하여 화촉을 밝히고 아들을 얻었느니라. 그리고 김 병욱(金秉旭)이 또한 명당을 바라므로 상제께서 역시 「믿고 있으라」고 말씀하셨도다. 그 후 그도 바라던 아들을 얻었느니라. 수년이 지나도록 명당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기에 병욱은 「주시려던 명당은 언제 주시나이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네가 바라던 아들을 얻었으니 이미 그 명당을 받았느니라」고 이르시고 「선천에서는 매백골이장지(埋白骨而葬之)로되 후천에서는 불매백골이장지(不埋白骨而葬之)니라」고 말씀을 하셨도다. 그 후 얼마 지나 현찬이 상제를 뵈옵고 명당을 주시기를 바라므로 상제께서 「명당을 써서 이미 발음되었나니라」고 말씀이 계셨도다.
어느 때인지 분명치 않으나 상제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때가 있느니라. 「고부에 나보다 항렬이 높은 친족들이 계시는도다. 내가 그들을 대할 때에 반드시 항렬을 좇아 말하게 되느니라. 이것은 윤리상 전통이라.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만 모든 신명은 그들의 불경한 언사를 옳지 않게 여기고 반드시 죄로 인정하느니라.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여 친족과의 왕래를 적게 하느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임인년 가을 어느 날에 김 형렬에게 「풀을 한 곳에 쌓고 쇠꼬리 한 개를 금구군 용암리(金溝郡龍岩里)에서 구하여 오게 하고 또 술을 사오고 그 쌓아놓은 풀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쇠꼬리를 두어 번 둘러내라」고 이르시고 다시 형렬에게 「태양을 보라」고 말씀하시니라. 형렬이 햇무리가 나타났음을 아뢰니라. 그 말을 상제께서 들으시고 「이제 천하의 형세가 마치 종기를 앓음과 같으므로 내가 그 종기를 파하였노라」 하시고 형렬과 술을 드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니라. 천지신명이 모여 상제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 한량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임인년 여름철을 맞이하여 형렬의 집에 가셔서 지내시니라.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상제께 드리는 공궤가 소략하고 더욱이 가뭄 때문에 밭에 심은 채소도 가뭄을 탄 탓으로 더욱 걱정 근심하니 그 사정을 관찰하시고 상제께서 「산중에 별미가 있는 것이 무엇이리요. 채소의 별미라도 있어야 할 터이니라」고 하시고 「걱정 근심을 말라」 하셨도다. 이 말씀이 계신 후 채소가 잘 자라 형렬이 한결 근심을 덜었도다.
상제께서 처음으로 따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신이 그동안 지내 오던 허물을 낱낱이 회상하여 마음속으로 사하여 주시기를 빌게 하고 미처 생각지 못한 허물을 하나하나 깨우쳐 주시고 또 반드시 그의 몸을 위하여 척신과 모든 겁액을 풀어 주셨도다.
김 형렬은 임인년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에 머무실 때마다 상제를 찾아뵈옵곤 하였고 상제께서 본댁에서 하운동(夏雲洞)으로 자주 내왕하셨기에 그 중로에 있는 소퇴원 마을 사람들은 상제와 형렬을 잘 알게 되었도다.
상제께서 이해 四월 보름에 김 형렬에게 심법을 전수하시고 九월 十九일까지 수련을 계속하도록 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교운을 보리라」 하시더니 세숫물을 대하시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감고 보라」고 말씀하시기에 모두들 눈을 감고 물을 들여다보니 갑자기 물이 큰 바다가 되고 바닷속에 뱀머리와 용꼬리가 굽이치는지라. 모두들 본 대로 고하니 상제께서 「나의 형체는 사두 용미(蛇頭龍尾)니라」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임인년 四월에 정 남기를 따르게 하시고 금구군 수류면 원평에 있는 김 성보(金聖甫)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과 함께 지내셨도다. 이때 김 형렬과 김 보경이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보경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시니 보경이 불 자를 짚자 상제께서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 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일러주셨도다.
七월에 상제께서 본댁에 돌아와 계시므로 김 형렬은 상제를 배알하고자 그곳으로 가다가 문득 소퇴원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꺼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 가다가 본댁에서 하운동으로 향하시는 상제를 만나 뵈옵고 기뻐하였도다.
형렬은 반기면서 좁은 길에 들어선 것을 아뢰고 「이 길에 들어서 오지 않았더라면 뵈옵지 못하였겠나이다」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우리가 서로 동 서로 멀리 나뉘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 시속에 있는 망량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고 이르셨도다. 형렬은 말씀을 듣고 종도들의 틈에 끼어서도 남달리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도다.
김 형렬은 심법을 받은 후부터 수련을 계속하다가 九월 十九일에 끝마쳤도다. 이날에 상제께서 형렬에게 가라사대 「그만 그칠지어다. 다른 묘법은 때가 이르면 다 열어주리라」 하시니라.
상제께서 모든 천지공사에 신명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일과 영을 듣는 일에 무리들을 참관케 하고 또 풍우를 짓게도 하시면서 그 참관한 공사의 조항을 일일이 묻고 그 본 바의 확실 여부를 시험하셨도다. 이로써 상제께서 자신을 좇는 무리들에게 공사의 확신을 얻게 하셨도다.
또 상제께서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 농가에서 추수한 후에 곡식 종자를 남겨 두나니 이것은 오직 토지를 믿는 연고이니라. 그것이 곧 믿는 길이니라」 하셨도다.
류 서구(柳瑞九)는 상제의 부친과 친분이 있는 분으로서 상제의 예지(豫知)에 크게 놀라 상제를 경송하게 되었도다.
상제께서 그의 내왕을 언제나 미리 아시고 주효를 준비한 사실을 부친이 서구에게 알렸으되 그가 믿지 않았도다. 임인년 정월 七일에 상제께서 그가 다시 오는 것을 마당에서 맞으면서 「세전에 공사가 있어 오신 것을 대접하지 못하여 부친에 대한 예가 안 되었나이다」고 말씀하시고 아우 영학으로 하여금 책력의 틈에 끼워 둔 종이 쪽지를 가져오게 하여 펼쳐 보이시니 「인일에 인간방에서 사람이 오는데 마당에서 만나게 되니 그는 꼭 류 서구였도다(寅日人來寅艮方 逢場必是柳瑞九)」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도다. 이에 류 서구는 놀라 그 후 상제를 경송하게 된 것이니라.
상제께서 가시는 여름의 폭양 길은 언제나 구름이 양산과 같이 태양을 가려 그늘이 지는도다.
상제께서 「제갈 량(諸葛亮)이 제단에서 칠일 칠야 동안 공을 들여 동남풍을 불게 하였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 공을 들이는 동안에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오」 말씀하시고 곧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도다.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말하나 내가 천지를 돌려놓았음을 어찌 알리오」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농부들이 九월에 일손 바쁘게 밭을 갈고 보리를 심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들 신고하나 수확이 없으리니 어찌 불쌍치 아니하랴」고 탄식하시는 말씀을 엿듣고 형렬은 결단하고 그해 보리농사를 짓지 아니하였도다.
이듬해 봄 기후가 순조로워 보리농사가 잘 되어 풍년의 징조가 보이는지라. 농부들과 김 보경ㆍ장 흥해는 지난 가을에 상제께서 들판을 보시고 보리농사가 실패될 것을 염려하시기에 보리농사를 짓지 아니한 형렬을 비웃으니라. 이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것은 신명 공사에서 작정된 것인데 어찌 결실하기도 전에 농작을 예기할 수 있으리오」 하시고 종도들의 성급함을 탓하시니라. 五월 五일에 폭우가 쏟아지니라. 보리이삭에 병이 들어 이삭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결실이 되지 않는도다. 쌀값이 뛰고 보리 수확이 없게 되자 보경과 농부들이 상제의 말씀을 깨닫고 감복하기만 하였도다.
임인년에 상제께서 전주와 하운동(夏雲洞) 사이를 다니시면서 약재를 쓰지 않고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을 건져 주시니 모든 사람들은 그 신력에 경복하였도다.
상제께서 임인년 四월 十三일에 김 형렬의 집에 이르셨도다. 때마침 형렬의 아내가 막내아들을 분만할 때니라. 그 부인은 산후 四十九일간 산후 복통으로 고생하는 습관이 있는지라. 형렬이 매우 근심하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후부터 나를 믿고 근심을 놓으라」 하시니 그는 상제의 도움을 믿고 근심을 놓았도다. 이로부터 부인은 복통과 천식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김 형렬에게 「삼계 대권을 주재하여 조화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후천 선경(後天仙境)을 열어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고 말씀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제 말세를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 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
고 이르시고 그에게 신안을 열어 주어 신명의 회산과 청령(聽令)을 참관케 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자신이 알고 계시는 문자로써도 능히 사물을 기록하리라 말씀하시고 옥편을 불사르고 이어서 천수경ㆍ사요(史要)ㆍ해동 명신록(海東名臣錄)ㆍ강절 관매법(康節觀梅法)ㆍ대학과 형렬의 채권 문서 등을 모조리 불사르셨도다. 이것을 종도 김 형렬이 지켜보았느니라.
상제께서 「조선지말에 이란(吏亂)이 있으리라 하는데 그러하오리까」고 묻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손 병희가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말함이나 그가 선진주(先眞主)라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의(擧義)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
1903년
상제께서 계묘년에 객망리에 계셨도다. 三월 어느 날에 형렬에게 「신명에게 요금을 줄 터이니 여산 윤 공삼(礪山尹公三)에게 가서 돈을 얻어오라」 하시니 옆에서 시좌하고 있던 김 병욱이 전주 거부인 백 남신(白南信)을 천거하는도다.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시고 위정 술을 많이 드신 후에 신발을 벗으신 채 대삿갓을 쓰시고 병욱을 앞세우고 그의 집에 가시니라. 이때 장 흥해(張興海)가 와 있었으며 마침 남신이 병욱의 집에 들어서는지라. 병욱이 상제께 손님이 온 것을 아뢰니 누워 계시던 상제께서 몸을 일으켜 앉으시나 처음 대하는 예를 베풀지 않으시고 다짜고짜 그에게 「그대가 나의 상을 평하라」 말씀하시니 그가 「상리를 알지 못하나이다」 하거늘 상제께서 「상리는 참되지 못하나니 속평을 하라」 하시니 그가 「속평에 얼굴이 방정하고 풍후하면 부하고 미간 인당에 백호주가 있으니 가히 부귀 쌍전하리로소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웃으시며 「그대의 상을 평하면 입가로 침이 부글부글 나오니 이는 소가 마구 삭이는 격이라. 가히 부호가 되리라. 내가 쓸 곳이 있으니 돈 十만 냥을 가져오라」 이르시니라. 남신이 묵묵히 말이 없다가 「七만 냥을 드리겠나이다. 어떠하나이까」 여쭈니라. 상제께서 응낙하지 않으시니 남신이 다시 여쭈니라. 「十만 냥을 채우려면 서울에 있는 집까지 팔아야 하겠나이다.」 그는 드디어 十만 냥을 만들어 드릴 것을 응낙하는도다. 병욱이 증인이 되어서 증서를 써서 상제께 올리니 상제께서 그 증서를 받으셔서 병욱에게 맡기시니 병욱과 흥해가 세상에 드문 도량이심을 탄복하였도다. 그 후 증서를 상제께서 불사르셨도다. 이로 인하여 백 남신이 상제를 좇기 시작하였도다.
계묘년 가을에 가뭄이 동곡(銅谷)에 계속되었도다. 김 성천(金成天)은 동곡에서 밭을 부쳐 업으로 삼으니라. 그 나물 밭에 가뭄 때문에 뜨물이 생겨 채소가 전멸케 되었는지라. 상제께서 그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죽을 사람에게 기운을 붙여 회생케 하는 것이 이 채소를 소생케 하는 것과 같으니라」 하시고 곧 비를 내리게 하셨도다. 그 후에 상제께서 출타하셨다가 얼마 후에 돌아오셔서 자현에게 「김 성천의 나물 밭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시니라. 자현이 「지난 비로 소생되어 이 부근에서는 제일 잘 되었나이다」고 대답하였도다. 「사람의 일도 이와 같아서 병든 자와 죽는 자에게 기운만 붙이면 일어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계묘년도 저물어 가고 추수가 끝나 농부들이 벼를 들에서 말리기에 바쁜지라. 상제의 부친도 벼를 말리기 바쁘고 새와 닭을 쫓기에 애를 쓰느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새짐승이 한 알씩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마땅히 여기니 사람을 먹일 수 있겠나이까」고 말씀하시면서 만류하셨도다.
상제께서는 일진회가 일어난 후부터 관을 버리시고 대삿갓을 쓰시더니 정읍에 가신 후부터 의관을 갖추셨도다.
안 필성(安弼成)이 못자리를 하려고 볍씨를 지고 집을 나서려는데 상제를 뵈었도다. 상제께서 「쉬었다 술이나 마시고 가라」고 말씀하셨으되 필성이 사양하는지라. 「못자리를 내기에 바쁜 모양이니 내가 대신 못자리를 부어주리라」 하시고 지게 위에 있는 씨나락 서너 말을 망개장이 밭에 다 부으셨도다.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못하고 앉아서 주시는 술을 마시면서도 근심하였도다. 주모가 들어와서 씨나락은 가지고 온 그릇에 그대로 있는 것을 알리는도다. 필성은 이상히 여겨 바깥에 나가 뿌려서 흩어졌던 씨나락이 한 알도 땅에 없고 그대로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전보다 한층 더 상제를 경대하는도다.
상제께서 계묘년 정월에 날마다 백지 두서너 장에 글을 쓰거나 또는 그림(符)을 그려 손이나 무우에 먹물을 묻혀 그것들에 찍고 불사르셨도다. 그 뜻을 종도들이 여쭈어 물으니 「그것은 천지공사에 신명을 부르는 부호이노라」고 알려 주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묵은 하늘은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도다. 이후에 일용 백물이 모두 핍절하여 살아 나갈 수 없게 되리니 이제 뜯어고치지 못하면 안 되느니라」 하시고 사흘 동안 공사를 보셨도다. 상제께서 공사를 끝내시고 가라사대 「간신히 연명은 되어 나가게 하였으되 장정은 배를 채우지 못하여 배고프다는 소리가 구천에 달하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김 병욱에게 「이제 국세가 날로 기울어 정부는 매사를 외국인에게 의지하게 됨에 따라 당파가 분립하여 주의 주장을 달리하고 또는 일본과 친선을 맺고 또는 노국에 접근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인종의 차과 동서의 구로 인하여 일본과 친함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상제께 대답하니 상제께서 「그대의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 공사를 행하셨도다.
이제 동양(東洋) 형세가 그 존망의 급박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으므로 상제께서 세력이 서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공사를 행하셨도다.
김 병욱은 계묘(癸卯)년 四월부터 남원(南原)의 세금을 거두는 관직에 있게 되었도다. 이때에 박 영효(朴泳孝)가 일본(日本)에 망명하여 혁명을 도모하고 병욱이 또 그에 연루하였도다. 관은 그 당원을 체포하기로 정하고 八월에 포교가 서울로부터 남원으로 내려와서 병욱을 찾았도다. 전주 군수 권 직상이 병욱의 거처를 알기 위해 포교를 전주에서 남원으로 보냈도다. 그 전날 미리 상제께서 남원에 가셔서 병욱을 숙소의 문 바깥에 불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수합한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보관시키고 가죽신 대신에 짚신을 신게 하고 밭둑과 언덕을 걸으시니 병욱은 묵묵히 뒤만 따랐도다. 한 주막에서 점심을 끝내시고 다시 걸어가시다가 그의 선산 밑에 이르니 때는 이미 저물었도다. 그제서야 상제께서 그를 돌아보시고 묘소를 물으시니 바로 이곳이라고 그가 아뢰니 상제께서 또 묘형을 물으시니 「와우형(臥牛形)입니다」고 여쭈는지라. 말씀하시되 「그러면 소 우는 소리를 들어야 참이 되리라」 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니 산 아래서 소 우는 소리가 나는도다. 병욱이 소의 울음소리를 아뢰니 상제께서 「먼 데서 들리면 소용이 없나니라」 하시고 한참 있으니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묘 앞으로 지나가는데 소가 크게 우는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혈음(穴蔭)이 이미 동하였도다」 하시고 자리를 떠서 그 산소의 재실로 내려가 이곳에서 그날 밤을 새우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묘지기를 남원에 보내어 형세를 알아보게 하셨도다. 그는 남원에 갔다 와서 서울 포교가 병욱을 수색함을 아뢰니 이때 비로소 병욱이 깨닫고 크게 두려워하여 몸 둘 곳을 모르도다. 상제께서 다시 묘지기에게 여자가 타는 가마를 마련케 하고 병욱을 거기에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 좁은 목에 이르러 병욱으로 하여금 먼저 서 원규의 집에 가서 정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시니라. 그가 먼저 원규의 집에 들어서니 원규가 몹시 놀라면서 「그대가 어떻게 사지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처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여러 친구와 그대의 가족들이 근심 걱정하는 중이니라」고 말하는도다.
병욱은 포교들이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하고 상제와 자기가 남원을 벗어나온 때가 겨우 한나절 사이밖에 되지 않는 것을 원규로부터 듣고 상제께서 천신이심에 탄복하여 마지 아니하는도다. 포교는 남원에 이르러 병욱을 수색하다가 찾지 못하고 전주에 되돌아와서 군수 권 직상을 조르고 각처에 게시하거나 훈령을 내려 병욱을 잡아들이게 하는 중이었도다.
병욱은 서 원규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거리의 번화한 곳임을 몹시 걱정 근심하였으되 상제께서 나중에 찾아오셔서 병욱에게 근심 말라고 이르시니라. 상제께서 병욱을 데리시고 왕래하시면서 거리에서 병욱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을 이곳저곳에서 만났으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도다.
그 후에 상제께서 병욱을 장 흥해의 집으로 옮기고 그곳에 석 달 동안 머물게 하셨도다. 석 달이 지나서 상제께서 병욱에게 마음을 놓으라고 이르시니라. 일로전운(日露戰雲)이 급박하여 일병이 국토를 통과하고 국금을 해제한 때가 되니 박 영효에 대한 조정의 혐의도 풀렸도다.
이해 七월에 동학당원들이 원평에 모였도다. 김 형렬이 상제를 뵈옵고자 이곳을 지나다가 동학당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상제를 찾아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그 모임의 취지와 행동을 알아 오도록 그를 원평으로 보내시니라. 그는 원평에서 그것이 일진회의 모임이고 보국안민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대회 장소가 충남(忠南) 강경(江景)임을 탐지하고 상제께 되돌아가서 사실을 아뢰었도다. 이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네들로 하여금 앞으로 갑오(甲午)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없애고 저희들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리라. 내가 먼저 모범을 지어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중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나누어 주시니라. 이로부터 일진회원들은 약탈하지 않고 자기 재산으로 행동하니라. 이 일로써 전주부민들은 상제께서 하시는 일에 감복하면서 공경심을 높였도다.
원일이 자기 집에 상제를 모시고 성인의 도와 웅패의 술을 말씀 들었도다. 그것은 이러하였도다.
「제생 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재민 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 정세하리라. 너는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 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
「이 세상에 학교를 널리 세워 사람을 가르침은 장차 천하를 크게 문명화하여 삼계의 역사에 붙여 신인(神人)의 해원을 풀려는 것이나, 현하의 학교 교육이 배우는 자로 하여금 관리 봉록 등 비열한 공리에만 빠지게 하니 그러므로 판 밖에서 성도하게 되었느니라」 하시고 말씀을 마치셨도다.
그 후 광찬(光贊)과 형렬(亨烈)이 상제와 함께 전주(全州)에 동행하였느니라. 김 석(金碩)이란 자가 문하에 입도하게 되었도다. 입도에 앞서 상제께서 광찬과 형렬을 좌우에 두고 청수를 앞에 놓고 두 사람에게 태을주(太乙呪)를 스물한 번 읽게 하신 후에 석으로 하여금 읽게 하셨도다.
「훼동도자(毁東道者)는 무동거지로(無東去之路)하고 훼서도자(毁西道者)는 무서거지로(無西去之路)하니라」고 류 찬명(柳贊明)에게 이르셨도다.
김 윤근이 치질로 수십 년 동안 고생하다가 계묘년 三월에 이르러 기동할 수 없이 누울 정도로 심해지니라. 이를 긍휼히 여기사 상제께서 그로 하여금 아침마다 시천주를 일곱 번씩 외우게 하셨도다. 그가 그대로 행하더니 병에 차도가 있어 얼마 후에 완쾌되었도다. .
「이제 동양 형세가 위급함이 누란과 같아서 내가 붙잡지 아니하면 영원히 서양에 넘어가리라」 깊이 우려하시사 종도들에게 계묘년 여름에
「내가 일로 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
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계묘년에 종도 김 형렬과 그 외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조선 신명을 서양에 건너보내어 역사를 일으키리니 이 뒤로는 외인들이 주인이 없는 빈집 들듯 하리라. 그러나 그 신명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제 집의 일을 제가 다시 주장하리라.」
1904년
해는 바뀌어 갑진(甲辰)년이 되었도다. 상제께서 정월 보름에 곤히 주무시는데 갑자기 장 흥해(張興海)의 부친이 상제를 찾아 손자의 빈사를 아뢰고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는지라. 상제께서 혼몽 중에 「냉수나 먹여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집에 돌아가서 앓는 손자에게 냉수를 먹였느니라. 얼마 있지 않아 그 아이가 숨을 거두었도다.
흥해의 부친은 본래 성질이 사나워서 부중 사람들로부터 천둥의 별명을 얻었느니라. 그는 손자의 죽음에 분통이 나서 상제를 원망하니라. 「이것은 고의로 손자를 죽인 것이 분명하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아무리 위독한 병이라도 말 한 마디로 고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도다. 내 손자를 고의로 죽이지 않았다면 물은 고사하고 흙을 먹였을지라도 그 신통한 도술로 능히 낫게 하였으리라.」 그는 분노에 못 이겨 몽둥이를 들고 와서 상제를 난타하니 상제께서 유혈이 낭자하니라. 그제서야 상제께서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일어나려고 하시니라. 이때 그는 살인범이라고 소리치며 상제를 결박하여 장방(長房)으로 끌고 가다가 갑자기 결박을 풀면서 「이것이 다 나의 잘못이니다. 어린애가 급병으로 죽은 것을 어찌 선생님을 원망하리오」 뉘우치듯이 말하고 옛정으로 돌아가시기를 원하며 자기 집으로 동행하시자고 권하는지라. 상제께서 듣지 않으시고 서 원규(徐元奎)의 집에 가셔서 그날 밤을 지내시고 이튿날에 전주(全州) 이동면(伊東面) 이 직부의 집으로 가셨도다.
흥해의 부친이 상제를 장방으로 끌고 가다가 돌려보낸 것은 상제께서 백 남신으로부터 받으신 돈 증서를 가지고 계심을 알고 돈을 청구하려는 속심에서였도다. 상제께서 그 속심을 간파하시고 흥해의 집으로 따라가지 않으셨도다.
다음날에 흥해의 부친은 상제를 서 원규의 집에서 찾았으되 허탕을 치니라. 그는 또 화가 치밀어 상제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고 마구 지껄이면서 상제가 계실 만한 곳을 여기저기 찾으니라. 그는 상제를 찾다 못 찾으니 상제의 식구들을 전주군 난전면 화정리에서 찾고 행패를 부렸도다. 이때 상제의 가족은 이곳에 있는 이 경오(李京五)의 좁은 방에 이사하여 살고 있었도다.
김 형렬은 흥해의 부친의 행패를 전혀 모르고 상제의 소식을 듣고자 화정리에 왔도다. 그를 흥해의 가족들이 결박하여 서 원규의 집에 끌고 가서 상제가 계신 곳을 대라고 족치는지라. 서 원규ㆍ김 형렬은 상제께서 가신 곳을 몰라 그 가족들로부터 구타만 당하였도다.
이로 인하여 상제의 가족은 화를 피하여 태인 굴치로 가고 형렬은 밤중에 피하고 원규는 매일 그들의 행패에 견디다 못 견디어 약국을 폐쇄하고 가족과 함께 익산(益山)으로 피하였도다.
상제께서는 장 흥해의 변에 제하여 부친의 소실인 천원 장씨(川原張氏)에게 「술을 빚으라」 이르시고 「누구든지 술을 먼저 맛보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 어느 날 상제의 부친이 오시자 장씨는 상제께서 하신 말씀을 잊고 웃술을 먼저 떠서 드리니라. 얼마 후에 상제께서 돌아오셔서 술에 먼저 손댄 것을 꾸짖으시고 「가족들이 급히 피하여야 화를 면하리라」 말씀하시고 나가셨도다. 흥해 가족들이 달려와 장씨에게 상제의 모친이냐고 추궁하자 장씨가 당황하여 「내가 바로 모친이라」 하니 흥해 가족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강제로 모친을 앞세우고 자기 집으로 끌고 가서 수없이 구타하니 이때에 낯모르는 백발노인이 옆에 서 있다가 말하는도다. 「자식의 잘못으로 부모에게 폭행한다는 것이 사람으로 할 짓이냐」고 꾸짖자 그제야 흥해 부자가 물러가니라. 그들이 떠나간 후 겨우 장씨는 정신을 되찾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얼마간 지나서 상제께서 장씨에게 들러 그 시말 이야기를 들으시고 「생지황(生地黃)의 즙을 내어 상처에 바르라」고 말씀하시니 장씨가 그대로 행하니 그날로 몸이 회복되었도다.
어느 날 종도들이 상제를 뵈옵고 「상제의 권능으로 어찌 장 효순의 난을 당하셨나이까」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교중(敎中)이나 가중(家中)에 분쟁이 일어나면 신정(神政)이 문란하여지나니 그것을 그대로 두면 세상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 기운을 받아서 재앙을 해소하였노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갑진년 정월에 장 효순 화난을 겪으시고 직부의 집에 가셔서 월여를 머무시다가 다시 형렬의 안내로 원평(院坪) 김 성보(金聖甫)의 집에 머무시게 되었도다. 그때 정 남기와 그의 처남이 일진회원으로서 상제의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깎으려고 하되 베어도 베어지지 않으니 상제께서 친히 한 줌을 베어 주시며 「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화적(불한당)이 갑진(甲辰)년에 대낮에도 횡행하였도다. 이해 二월에 상제께서 갑칠(甲七)을 데리시고 부안(扶安)을 거쳐 고부(古阜) 거문바위 주막에 이르시니 그 주막에 화적을 잡기 위해 변복한 순검 한 사람이 야순하다가 쉬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주모에게 「저 사람은 곧 죽을 사람이니 주식을 주지 말라. 주식을 주었다가 죽으면 대금을 받지 못하니 손해가 아니냐」고 일러 주시니라. 이 말씀을 그 순검이 듣고 몹시 분격하여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면서 상제를 구타하니라. 그래도 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죽을 사람으로부터 맞았다 하여 무엇이 아프리오」 말씀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셨도다. 주모가 그에게 「저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인이시니 따라가서 사과하고 연고를 물어보시라」고 말하는지라. 순검이 곧 상제의 뒤를 따라가서 사과하고 연고를 여쭈어 물으니라. 가라사대 「오늘 밤에 순시를 피하고 다른 곳으로 빨리 가라」 하시니 순검은 명을 좇아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가니라. 얼마 후에 화적 여럿이 몰려 와서 주모를 난타하며 순검의 거처를 대라고 졸랐도다. 화적들은 순검을 죽이려고 미리 작정하고 습격한 것이어서 이튿날 그 순검이 상제께 배알하고 재생의 은혜에 흐느껴 울었도다.
이달에 상제께서 볼일이 계셔서 태인(泰仁) 신배(新培)의 동리에 들어서시니 불이 나는도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점점 강해져 온 동리를 삼킬 듯하니라. 도저히 끌 수 없으리라 판단하시고 상제께서 「불을 피워 동리를 구하리라」 말씀하시고 형렬을 시켜 섶나무로 불을 마주 피우게 하시니 불이 곧 꺼졌도다.
이해 五월에 백 남신을 체포하라는 공문이 서울로부터 전주부에 전달되니 남신이 당황하자 김 병욱이 남신에게 작년 겨울에 자기가 화난을 당하였을 때 상제의 도움으로 화난을 면하였음을 알리니 그는 병욱을 통해 상제의 도움을 청하였도다. 상제께서 「부자는 돈을 써야 하나니 돈 十만 냥의 증서를 가져오라」 하시니라. 병욱이 곧 남신으로부터 十만 냥의 증서를 받아 가지고 이것을 상제께 올렸도다. 그 후에 남신은 화난에서 풀리면서 남(南) 삼도(三道)의 세무관이 되어 몇만 냥의 돈을 모았고 상제께서는 그 후에 증서를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이해 六월에 김 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그는 상제의 말씀을 좇아 전주로 가서 김 병욱을 만나고 상제와 만날 날짜를 정하고 돌아오니라. 그가 돌아오는 길에 장 흥해의 부친 장 효순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라. 형렬은 모든 것을 상제께 아뢰면서 「장 효순은 진작 우리의 손에 죽었어야 마땅하거늘 저절로 죽었으니 어찌 천도가 공정하다 하오리까」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들으시고 「이 무슨 말이냐 죽은 자는 불쌍하니라」고 꾸짖으셨도다. 그 이튿날 상제께서 병욱과의 약속이 있으심에도 전주부로 가시지 않고 형렬을 이끌고 고부로 향하시는지라. 형렬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상제께서 병욱과의 약속을 어기시는 이유를 여쭈었으나 상제께서 웃으시며 대답을 하시지 않았도다.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전주에서 갑진년 七월에 있었도다. 최 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 군 각 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 하시니라. 상제께서 화정리의 이 경오(李京五)를 찾아 돈 七十냥을 청구하시니 그가 돈이 없다고 거절하였도다. 부득이 다른 곳에서 돈 일곱 냥을 구하여 가지시고 「이 돈이 능히 七十냥을 대신하리라」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형렬을 대동하시고 용머리 주막에 돌아오셔서 많은 사람을 청하여 술을 권하여 나누시고 난 후에 종이에 글을 쓰고 그 종이를 여러 쪽으로 찢어 노끈을 꼬아서 그 주막의 문돌쩌귀와 문고리에 연결하여 두시니라. 그날 오후에 아전과 일진회원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니 일진회원들이 사문을 열고 입성하니라. 이 일에 상제께서 소비하신 돈이 엿 냥이었도다. 가라사대 「고인은 바둑 한 점으로써 군병 百만 명을 물리친다 하나 나는 돈 엿 냥으로써 아전과 일진회의 싸움을 말렸느니라」 하셨도다.
이후에도 얼마간 상제께서 그 주막에 머무르셨도다. 밤마다 부내의 순검들이 순회하면서 사람들을 조사하여 일진회원을 색출하는지라. 상제께서 일진회원에게 「그대들이 이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을 줄을 모르니 무슨 일을 하느뇨.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관부의 조사를 면케 하리라」 말씀하시니 이로부터 그렇게 엄격하던 취체가 풀렸도다.
이와 같이 범사가 풀린 후에 상제께서 경오에게 「내가 그대에게 돈 七十냥이 있음을 알고 청구한 것인바 왜 그렇게 속이느뇨」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정색하여 「참으로 없었나이다」고 여쭈니라. 그 이튿날 경오의 집에 화적이 들어 그 돈을 모두 잃었도다. 그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 돈에 척신이 범함을 알고 창생을 건지려고 청한 것이어늘 그가 듣지 아니하였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문 공신(文公信)에게 돈 서른 냥을 지니게 하시고 피노리를 떠나 태인 행단(杏壇) 앞에 이르셨도다. 주막에 들러 술을 찾으시니 주모가 술이 없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이런 주막에 어찌 술이 없으리오」라고 하시니 주모가 「물을 붓지 아니한 새 독의 술이 있나이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술은 새 독의 술이 좋으니라. 술에 안주가 있어야 하리니 돼지 한 마리를 잡으라」 분부하시고 글을 써서 주모에게 주어 돼지막 앞에서 불사르라고 이르시니 주모가 그대로 행한바 돼지가 스스로 죽으니라. 또 상제께서 주모에게 「돼지를 삶아 먼저 맛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죽으리라」 분부하셨도다. 상제께서 삶은 돼지를 그릇에 담아 뜰 가운데 술을 전주로 걸러서 마루 위에 놓게 하시고 글을 써서 주인을 시켜 뜰 한가운데서 불사르게 하신 후에 공신과 주인과 참관한 마을 사람과 행인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잡수셨도다. 이때 상제께서 큰 소리로 「무엇을 더 구하느뇨. 글자 한 자에 하나씩만 찾아가면 족하리라」고 외치셨도다.
그 이튿날 아침에 공신이 술과 고기 값으로 서른석 냥을 몽땅 갚은 뒤에 상제께서 공신을 데리고 행단을 떠나 솔밭 속으로 지나시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이놈이 여기에 있도다」 하시는도다. 공신이 놀라서 옆을 보니 동자석(童子石)만이 서 있도다. 그곳에서 원평으로 행하시는 도중에 공신에게 「훗날 보라. 일본 군사가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여러 천 명을 상하게 할 곳이니라. 그러나 글자 한 자에 하나씩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저희들이 알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련만 누가 능히 알리오」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그 후에 일진회원 수천 명이 떼를 지어 그곳을 지나다가 일본 군사가 의병인 줄 알고 총을 쏘니 스물한 명이 죽었도다.
금구 수류면 평목점(金溝水流面坪木店)에서 정 괴산(丁槐山)이라는 자가 집안이 가난하여 주막의 술장사로 겨우 호구하면서 매양 상제를 지성껏 공양하더니 상제께서 어느 날 우연히 주막에 들렀을 때 괴산이 상제께 올리려고 개장국을 질솥에 끓이다가 질솥이 깨어지므로 그의 아내가 낙담하여 울고 섰거늘 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셔서 쇠솥 하나를 갖다 주었더니 이로부터 그의 가세가 날로 늘어났도다. 그 후에 그가 태인 방교(泰仁方橋)로 이사하게 되자 그 쇠솥을 수류면 환평리(環坪里) 정 동조(鄭東朝)에게 팔았더니 이로부터 괴산은 다시 가난하게 되고 정 동조는 도리어 살림이 일어나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솥을 복솥이라 불렀도다.
상제께서 부안을 거쳐서 고부 입석리 박 창국(朴昌國)의 집에 이르러 수둥다릿병으로 며칠 동안 신고하셨도다. 이때 상제의 누이가 되는 창국의 부인이 맨발로 풀밭에 다니는 것을 보시고 「이 근처에 독사가 있으니 독사가 발을 물면 어찌하느냐」고 걱정하시고 상제께서 길게 휘파람을 부시니 큰 독사 한 마리가 담장 밖의 풀밭에서 뜰 아래로 들어와 머리를 드니라. 이때에 창국이 바깥에서 들어오다가 독사를 보고 크게 놀라서 짚고 있던 상장으로 뱀을 쳐 죽였도다. 이것을 보시고 「독사혜(毒蛇兮) 독사혜(毒蛇兮) 상인견지(喪人見之) 상장타살(喪杖打殺) 도승견지(道僧見之) 선장타살(禪杖打殺). 누이는 상장도 선장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독사를 제거하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누이가 맨발로 땅에 묻어 있는 피를 밟으면 해를 볼까 봐 손수 그것을 밟아서 독기를 제거하셨도다.
八월에 김 형렬이 입석리(立石里)에 계시는 상제를 배알하고자 찾았도다. 상제께서 수둥다릿병이 다소 회복되었으므로 형렬의 안내로 하루 이삼십 리씩 걸어서 함열 회선동의 김 보경의 집에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언제나 돈 한두 냥을 몸에 지니고 다니셨도다.
상제께서 김 형렬을 앞세우고 익산군 만중리(益山郡萬中里) 황 사성(黃士成)의 집에 이르러 머무실 때 어떤 사람이 얼굴에 노기를 띠고 문을 홱 닫는 바람에 벽이 무너졌도다. 이것을 보시고 곧 상제께서 같은 동리의 정 춘심(鄭春心)의 집에 옮기시니라. 황 사성의 부자가 춘심의 집으로 상제를 뵈옵고자 와서 전말을 아뢰니라. 황 사성의 부친 숙경이 황 참봉(黃參奉)으로부터 돈을 얻어 썼으나 그는 죽고 그 아들이 사람을 시켜 숙경에게 갚을 것을 독촉하러 온 것인데 그자가 빚을 갚지 않으면 경무청에 고발하여 옥에서 신세를 썩게 하리라고 위협하고 돌아가는 마당에 상제께 들른 것이외다.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벽을 무너뜨렸으니 그 일은 풀리리라. 삿갓 한 닢과 필목 한 필을 사 오라」고 숙경에게 이르시고 「이것은 양자 사이의 길을 닦는 것이니라」고 알리고 「이후 일이 순조롭게 풀리니 염려하지 말라」고 이르셨도다. 연말에 순검이 채무관계로 숙경을 잡으므로 숙경이 순검에게 채권자의 집에 들러 주시기를 간청하니 순검이 그 채권자의 집에 데리고 가니 참봉의 아들이 숙경이 잡혀온 것을 보고 힐난하거늘 그 아들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저 어른은 너의 부친의 친구이신데 네가 차마 그분을 옥에 가두게 하다니 금수와 같은 행위를 하려고 하느냐」고 책망하면서 아들로부터 증서를 빼앗아 불살랐도다.
갑진(甲辰)년에 도적이 함열에서 성하였도다.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거니와 김 보경도 자기 집이 부자라는 헛소문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느니라. 이해 九월 중순경에 상제께서 함열 회선동 김 보경의 집에 오셨도다. 보경이 「도적의 해를 입을까 염려되오니 어찌 하오리까」고 근심하니 상제께서 웃으시며 보경의 집 문 앞에 침을 뱉으시니라. 상제께서 떠나신 후로 도적이 들지 않았도다.
갑진년 十一월에 전주에 민요가 일어나서 인심이 흉흉하니라. 이 소란 중에 상제께서 전주에 이르셨도다. 김 보경이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김 병욱이 국가의 중진에 있으니 민심의 동요를 진무하여 그 천직을 다하여야 할 일이거늘 그 방책이 어떤 것인지」 하시고 궁금히 여기시니 보경이 병욱에게 이것을 전하였느니라. 병욱은 「나의 힘으로 물 끓듯 하는 민요를 진무할 수 없으니 상제의 처분만을 바라옵니다」고 말씀드렸도다. 상제께서 보경으로부터 사정을 알아차리시고 웃으시기만 하시니라.
이날 밤에 눈비가 내리고 몹시 추워져 노영(露營)에 모였던 민중은 내리는 눈비와 추위에 견디지 못해 해산하고 사흘 동안 추위와 눈비가 계속 내리므로 민중이 다시 모이지 못하니 민요는 스스로 가라앉았도다.
상제께서 섣달에 원평에 와 계셨을 때에 박 제빈(朴齊斌)이 전라도 전주에 출두하고 군수 권 직상(權稷相)이 파직될 것이란 소문이 떠돌므로 김 병욱도 전주 군장교에 있는 신분으로서 일이 어찌 될까 염려하여 상제를 찾아뵈옵고 걱정하니 상제께서 「근심하지 말라 무사하리라」고 일러 주셨도다. 며칠 후에 박 어사가 전주부에 들어섰으나 그의 면관비훈이 전주부에 내려오므로 상제의 말씀대로 일은 무사하였도다.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나를 모르는 자가 항상 나를 헐뜯나니 내가 만일 같이 헐뜯어서 그것을 갚으면 나는 더욱 어리석고 용렬한 자가 되니라」고 하셨도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피로 피를 씻는 것과 같으니라. .
상제께서 갑진년 二월에 굴치(屈峙)에 계실 때 영학에게 대학을 읽으라 명하셨으되 이를 듣지 않고 그는 황주 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릉 묘기(嚴子陵廟記)를 읽으니라. 상제께서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하시며 이 도삼을 불러 시 한 귀를 영학에게 전하게 하시니 이것이 곧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吊無人)」이니라.
처음부터 영학(永學)은 도술을 배우기를 원했으나 상제께서는 그것을 원치 말고 대학을 읽으라 하셨는데도 명을 어기고 술서를 공부하기에 시(詩)를 보내어 깨닫게 했으나 상제의 말씀을 듣지 않더니 기어코 영학이 죽게 되었느니라. 상제께서 내림하셔서 영학의 입에 엄지손가락을 대시고 「이 손가락을 떼면 곧 죽을 것이니 뜻에 있는 대로 유언하라」 하시니 영학이 부모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친 후에 엄지손가락을 떼시니 곧 사망하니라.
갑진년에 김 덕찬이 모친상을 입고 장례를 지내려고 전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용두치(龍頭峙) 주막에서 상제를 배알하니 가라사대 「오늘 장사는 못 지내리니 파의하라」 하시니라. 덕찬이 이를 듣지 않고 돌아가서 장례를 그대로 행하여 지정한 땅을 파니 큰 의혈(蟻穴)이니라. 다시 다른 곳을 파니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라. 덕찬이 그제서야 상제의 가르치심의 어김을 뉘우치고 부득이 토롱(土壟)을 하였도다.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종도들을 이끌고 모악산 용안대(龍眼台)에서 여러 날을 머무르셨도다.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교통이 두절되고 따라서 양식이 두 끼니의 분량만이 남으니라. 상제께서 종도들이 서로 걱정하는 것을 듣고 남은 양식으로 식혜를 짓게 하시니 종도들은 부족한 양식을 털어서 식혜를 지으면 당장 굶게 되리라고 걱정하면서도 식혜를 지어 올렸도다. 상제께서 종도들과 함께 나누어 잡수시는데 눈이 멈추고 일기가 화창하여 쌓인 눈도 경각에 다 녹고 길도 틔어 종도들과 함께 돌아오셨도다.
하루는 원평(院坪)에서 음식을 드시고 여러 사람들을 향하여 외쳐 말씀하시기를 「이제 곧 우박이 올 터이니 장독 덮개를 새끼로 잘 얽어 놓아라」 하시니 여러 사람은 무심히 들었으나 오직 최 명옥(崔明玉)만이 말씀대로 행하였더니 과연 두어 시간 후에 큰 우박이 내려 여러 집 장독이 모두 깨어졌도다.
천도교 손 병희(孫秉熙)가 호남 일대를 순회하고자 전주에 내려와서 머물렀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네가 전주에 가서 손 병희를 돌려보내고 오라. 그는 사설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지니 그의 순회가 옳지 않다」고 분부를 내리셨도다. 이에 그가 복명하였으되 이튿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겼느니라. 며칠 후에 손 병희는 예정한 순회를 중지하고 경성으로 되돌아갔도다.
1905년
상제께서 을사년 김 보경의 집에서 종도들에게 소시에 지은 글을 외워 주셨도다.
運來重石何山遠 粧得尺椎古木秋
霜心玄圃淸寒菊 石骨靑山瘦落秋
千里湖程孤棹遠 萬方春氣一筐圓
時節花明三月雨 風流酒洗百年塵
風霜閱歷誰知己 湖海浮遊我得顔
驅情萬里山河友 供德千門日月妻
또 하나를 외우셨도다.
四五世無顯官先靈生幼學死學生
二三十不功名子孫入書房出碩士
상제께서 을사(乙巳)년 봄 어느 날 문 공신에게 「강 태공(姜太公)은 七十二둔을 하고 음양둔을 못하였으나 나는 음양둔까지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을사년에 함열에 계실 때이니라. 형렬을 비롯한 종도들을 거느리고 익산군 만중리(益山郡萬中里) 정 춘심의 집에 가셔서 춘심에게 명하사 「선제를 지내리니 쇠머리 한 개를 사오라」 하시고 백지 한 권을 길이로 잘라 풀로 이어 붙이고 절반을 말아 두 덩이로 만들고 한 덩어리씩 각각 그릇에 담아 두셨도다. 상제께서 밤중에 앞 창문에 두 구멍을 뚫고 쇠머리를 삶아서 문 앞에 놓고 형렬과 광찬으로 하여금 문밖에 나가서 종이 덩어리를 하나씩 풀어서 창구멍으로 들여보내게 하시고 문 안에서는 종이 끝을 다시 말으시니 종이 덩어리가 다 풀리니라. 안간 천둥과 같은 기적소리가 터지니라. 이 소리에 외인들도 놀랐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정 성백에게 젖은 나무 한 짐을 부엌에 지피게 하고 연기를 기선 연통의 그것과 같이 일으키게 하시고 「닻줄을 풀었으니 이제 다시 닻을 거두리라」고 말씀하시자 안간 방에 있던 종도들이 모두 현기증을 일으켜 혹자는 어지럽고 혹자는 구토하고 나머지 종도는 정신을 잃었도다. 이 공사에 참여한 종도는 소 진섭(蘇鎭燮)ㆍ김 덕유(金德裕)ㆍ김 광찬(金光贊)ㆍ김 형렬(金亨烈)ㆍ김 갑칠(金甲七) 그리고 정 성백(鄭成伯)과 그의 가족들이었도다. 덕유는 문밖에서 쓰러져 설사를 하고 성백의 가족은 모두 내실에서 쓰러지고 갑칠은 의식을 잃고 숨을 잘 쉬지 못하는지라. 이를 보시고 상제께서 친히 청수를 갑칠의 입에 넣어 주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니 바로 그는 깨어나니라. 차례차례로 종도들과 가족의 얼굴에 청수를 뿌리거나 마시게 하시니 그들이 모두 기운을 되찾으니라. 덕유는 폐병의 중기에 있었던 몸이었으나 이 일을 겪은 후부터 그 증세가 없어졌도다. 이것은 무슨 공사인지 아무도 모르나 진묵(震默)의 초혼이란 말이 있도다.
도주의 부친은 휘가 용모(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며 조부는 홍문관 정자(弘文舘正字)로 있다가 을사년의 국운이 기울어감에 통탄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도다.
아기가 자라니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을 남달리 하셨도다.
사람이 옳은 말을 듣고 실행치 않는 것은 바위에 물 주기와 같으니라.
천지 안에 있는 말은 하나도 거짓말이 없느니라.
대인의 말은 구천에 이르나니 또 나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니 잘 믿으라.
최 수운의 가사에 「도기장존 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이라 하였으나 상제께서는 「진심견수 복선래(眞心堅守福先來)」라 하셨도다.
나를 믿고 마음을 정직히 하는 자는 하늘도 두려워하느니라.
너희들이 이제는 이렇듯 나에게 친숙하게 추종하나 후일에는 눈을 떠서 바로 보지 못하리니 마음을 바로하고 덕을 닦기에 힘쓰라. 동학가사에 「많고 많은 저 사람에 어떤 사람 저러하고 어떤 사람 그러한가」와 같이 탄식 줄이 저절로 나오리라.
속담에 「맥 떨어지면 죽는다」 하나니 연원(淵源)을 바르게 잘하라.
나의 말은 늘지도 줄지도 않고 여합부절(如合符節)이니라.
수운가사에 「제소위 추리(諸所謂推理)한다고 생각하나 그뿐이라」 하였나니 너희들이 이곳을 떠나지 아니함은 의혹이 더하는 연고라. 이곳이 곧 선방(仙房)이니라.
선천에는 「모사(謀事)가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되 이제는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이니라. 또 너희가 아무리 죽고자 하여도 죽지 못할 것이요 내가 놓아주어야 죽느니라.
상제께서 을사(乙巳)년 정월 그믐날에 형렬과 함께 부안군 성근리(扶安郡成根里) 이 환구(李桓九)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고 계셨는데 환구가 부안 사람 신 원일(辛元一)을 자주 천거하기에 상제께서 그를 부르니 원일이 와서 배알하고 상제를 자기 집에 모시고 공양하니라. 그의 아버지와 아우가 상제의 장기 체류를 싫어하므로 원일이 상제께 「가친이 본래 해마다 어업을 경영하다가 작년에 폭풍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으니 선생님께서 금년에는 풍재를 없게 하여 주시면 가친을 위하여 행이 되겠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풍재를 없게 하고 어업을 흥왕케 하리니 많은 이익을 얻으면 후에 돈 千냥을 가져오라」 이르시니라. 원일의 부자가 기뻐하여 승낙하니라. 과연 말씀대로 그해에 풍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칠산 바다의 어업 중에서 원일의 아버지가 가장 흥왕하였도다.
상제께서 김 자현에게 이르사 그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일러 주시고 민 영환(閔泳煥)의 만장을 지어 그에게 주고 「쓸 데 있으리니 외우라」고 하셨도다.
대인보국 정지신(大人輔國正知身) 마세진천 운기신(磨洗塵天運氣新)
유한경심 종성의(遺恨警深終聖意) 일도분재 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
그리고 일도 분재 만방심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 주셨도다.
1906년
상제께서 금산면 용화동(金山面龍華洞)의 주막에 들르셔서 술을 잡수시려고 하였으나 술이 없었기에 술을 빚었던 항아리에 물을 부으시고 손으로 저으신 후에 마시고 또 종도들에게도 나눠 주시니 그 맛이 꼭 본래의 술 맛과 다름이 없었느니라. 이 일은 병오년 정월에 있었도다.
김 갑칠이 친산을 면례하려고 모든 기구를 준비하였더니 상제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면례하여 주리라」 하시고 준비한 모든 물품을 불사르시고 난 뒤에 「그 재를 앞 내에 버리고 하늘을 쳐다보라」 하시니 갑칠은 이상한 기운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치는 것을 보았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류 찬명(柳贊明)과 김 자현(金自賢) 두 종도를 앞에 세우고 각각 十만 인에게 포덕하라고 말씀하시니 찬명은 곧 응낙하였으나 자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상제의 재촉을 받고 비로소 응낙하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고 이르시고 또 「내가 태을주(太乙呪)와 운장주(雲長呪)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 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고 장 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의 부친께서 이해 七월 초에 동곡에 가서 상제를 찾으니라. 부친은 형렬의 안내로 임피 군둔리(臨陂軍屯里) 김 성화(金性化)의 집에 인도되었으나 며칠 전에 군항(群港)으로 떠나 상제께서 계시지 않았으므로 다시 뒤를 쫓아 군항에서 상제를 뵈옵게 되었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군항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오니 속히 돌아가심이 좋을까 하나이다」고 말씀하시니 그 이튿날에 집으로 되돌아가고 상제께서는 군항에 월여를 머무시다가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가셨도다.
상제께서 병오(丙午)년 十월 어느 날 예수교당에 가셔서 모든 의식과 교의를 문견하시고 「족히 취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 김 형렬이 「많은 사람이 상제를 광인이라 하나이다」고 고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거짓으로 행세한 지난날에 세상 사람이 나를 신인이라 하더니 참으로 행하는 오늘날에는 도리어 광인이라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도다.
병오년 정월 초사흘에 김 형렬과 김 성화의 부자와 김 보경의 부자와 김 광찬의 숙질이 동곡에서 상제를 시좌하고 상제께서 명하신 대로 하루 동안 말도 아니 하고 담배도 끊고 있을 때 상제께서 이틀 후에 여러 종도를 둘러앉히고 당부하시기를 「오늘 호소신이 올 것이니 너희는 웃지 말라. 만일 너희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웃으면 그 신명이 공사를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것이고 그가 한번 가면 어느 때 다시 올지 모를 일이니 깊이 명심하고 주의하라.」 종도들은 깊이 명심하고 조심하더니 갑자기 성백이 큰 웃음을 터뜨리니 모두 따라 웃은지라. 그날 오후에 성백은 안간 오한을 일으켜 심히 고통하더니 사흘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노라니 상제께서 성백을 앞에 눕히고 글 한 절을 읽으시니 그가 바로 쾌유하였도다. 상제께서 날마다 백지에 그림 같은 약도와 글자를 써서 불사르셨도다.
김 광찬ㆍ신 원일ㆍ정 성백ㆍ김 선경ㆍ김 보경ㆍ김 갑칠ㆍ김 봉규 등 여러 종도들이 二월 그믐에 동곡에 모였느니라. 다음 달 이튿날 상제께서 공사를 보시기 위하여 서울로 떠나시면서, 「전함은 순창(淳昌)으로 회항하리니 형렬은 지방을 잘 지키라」고 이르시고 「각기 자기의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명하시니 그들이 소원을 종이에 적어 상제께 바치니 상제께서 그 종이에 안경을 싸시고 남기ㆍ갑칠ㆍ성백ㆍ병선ㆍ광찬을 데리고 군항(群港)으로 가서 기선을 타기로 하시고 남은 사람은 대전(大田)에서 기차를 타라고 이르신 후에 이것을 수륙병진이라고 이르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원일에게 「너는 입경하는 날로 먼저 종이에 천자 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고 정서하여 남대문에 붙이라」고 명하셨도다. 원일은 곧 여러 사람과 함께 대전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군항으로 떠나시기 전에 병선에게 「영세 화장 건곤위 대방 일월 간태궁(永世花長乾坤位 大方日月艮兌宮)을 외우라」고 명하시니라. 군항에서 종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바람을 걷고 감이 옳으냐 놓고 감이 옳으냐.」 광찬이 「놓고 가시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나이다」고 대답하거늘 상제께서 다시 종도들에게 오매 다섯 개씩을 준비하게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종도들이 그 뒤를 따랐도다. 항해 중 바람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심하게 요동하는도다. 종도들이 멀미로 심하게 고통하므로 상제께서 「각자가 오매를 입에 물라」고 이르시고 갑칠로 하여금 종이에 싼 안경을 갑판 위에서 북쪽을 향하여 바다 위에 던지게 하였으되 그가 북쪽을 분간하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갑칠을 불러들여 「왜 얼른 던지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시니 그는 그대로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번개 치는 곳에 던지라」고 이르시니 그는 다시 갑판에 올라가니 말씀이 계신 대로 한 쪽에서 번개가 치는지라 그곳을 향하여 안경을 던졌도다.
이튿날 배가 인천에 닿으니 일행은 배에서 내려 기차로 바꿔 타고 서울에 이르니 광찬이 상제를 황교(黃橋)에 사는 그의 종제 김 영선(金永善)의 집으로 안내하였는데 원일은 남대문에 글을 써 붙이고 먼저 와 있었도다.
상제께서 十여 일 동안 서울에 계시면서 여러 공사를 보셨도다. 영선의 이웃에 사는 오 의관(吳議官)이 三년 전부터 해솟병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 매우 신고하고 있던 터에 상제의 신성하심을 전하여 듣고 상제를 뵈옵기를 영선에게 애원하기에 영선이 그것을 상제께 전하니 상제께서 의관을 불러 글을 써주시고 「이것을 그대가 자는 방에 간수하여 두라」 이르시니 그는 황송하게 여기고 이르신 대로 행하였느니라. 그는 그날부터 잠에 들 수 있더니 얼마 후에 해소도 그쳐 기뻐하였도다.
갑칠은 전주를 떠날 때부터 설사하는 것을 참다가 상제께 아뢰니 상제께서 「이로부터 설사가 멎고 구미가 돋으리라」고 말씀하시고 크게 웃으시니라. 갑칠의 상제의 신성에 대한 확신이 설사를 멎게 하였느니라. 상제께서 서울에서 여러 공사를 보시던 어느 날 해솟병에서 제생(濟生)된 오 의관의 아내가 다년간의 지병인 청맹으로 앞을 잘 못 보는지라 그 여인이 또한 병을 고쳐 주시기를 애원하거늘 상제께서 그 환자의 창문 앞에 이르러 환자와 마주 향하여 서시고 양산대로 땅을 그어 돌리신 후 돌아오시더니 이로부터 눈이 곧 밝아져서 오 의관의 부부가 크게 감읍하고 지성으로 상제를 공양하였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벽력표를 땅에 묻고 나서 종도들에게 「모두들 제각기 흩어져서 돌아가라. 十년 후에 다시 만나리라. 十년도 十년이요 二十년도 十년이요 三十년도 十년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누가 여쭈기를 「四十년은 十년이 아니 오니까.」 이에 상제께서 「四十년도 十년이나 그것을 넘지는 않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모두 돌려보내시니라. 상제께서는 오직 광찬만을 데리고 며칠 더 머무시더니 광찬에게 돈 百냥을 주시면서 「네가 먼저 만경(萬頃)에 가서 나의 통지를 기다리라」 이르셨도다.
四월 어느 날 형렬이 상제로부터 말씀을 들으니라. 「내가 이제 화둔(火遁)을 쓰리니 너의 집에 화재가 나면 온 동리가 다 탈 것이오. 그 불기가 커져서 세계민생에게 큰 화를 끼치게 될지니라.」 형렬이 말씀대로 앞날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놀라며 가족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성냥과 화롯불에 마음을 쏟게 하였도다.
상제께서 이달 그믐에 동곡으로 돌아오신 다음날 형렬을 데리시고 김 광찬이 가 있는 만경에 가셨을 때에 최 익현이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때는 모를 심는 시기이나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직업에 안착치 못하고 의병에 들어가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더욱 의병의 군세가 왕성하여지는지라. 상제께서 수일간 만경에 머무시면서 비를 흡족하게 내리게 하시니 비로소 인심이 돌아가 농사에 종사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더라. 이때 최 익현은 의병의 갑작스러운 약세로 순창에서 체포되니라. 그가 체포된 소식을 들으시고 상제께서는 만경에서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떠나시며 가라사대 「최 익현의 거사로써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의 감동에 인함이나 그의 재질이 대사를 감당치 못할 것이고 한재까지 겹쳤으니 무고한 생민의 생명만을 잃을 것이니라. 때는 실로 흥망의 기로이라 의병을 거두고 민족의 활로를 열었느니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종도와 함께 계실 때 김 광찬에게 「네가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아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촌 양반으로 아나이다」고 대답하니라. 다시 상제께서 물으시기를 「촌 양반은 너를 어떠한 사람이라 할 것이냐.」 광찬이 여쭈니라. 「읍내 아전이라 할 것이외다.」 그의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촌 양반은 읍내의 아전을 아전놈이라 하고 아전은 촌 양반을 촌 양반놈이라 하나니 나와 네가 서로 화해하면 천하가 다 해원하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개고기를 상등인의 고기로서 즐기셨도다. 종도가 그 연유를 묻기에 상제께서 「이 고기는 천지 망량(魍魎)이 즐기니 선천에서는 도가가 기(忌)하였으므로 망량이 응치 아니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순창 농암(籠岩) 박 장근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곳에 큰 기운이 묻혀 있으니 이제 그 기운을 내가 풀어 쓰리라. 전 명숙과 최 익현이 있었으되 그 기운을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동학이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도다.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주(五呪)를 수련케 하시고 그들에게 「일곱 고을 곡식이면 양식이 넉넉하겠느냐」고 물으시니 종도들이 말하기를 「쓰기에 달렸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가라사대 「그렇다 할지라도 곡간이 찼다 비었다 하면 안 될 것이니 용지불갈(用之不渴)하여야 하리라.」 종도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고 상제께서 백지에 저수지와 물도랑의 도면을 그려 불사르시면서 가르치셨도다. 「이곳이 운산(雲山)이라. 운암강(雲岩江) 물은 김제 만경(金提萬頃) 들판으로 돌려도 하류에서는 원망이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는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강 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한 고을에 흉년을 없앴다고 하나 나는 전북(全北) 칠읍(七邑)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중천신은 후사를 못 둔 신명이니라. 그러므로 중천신은 의탁할 곳을 두지 못하여 황천신으로부터 물과 밥을 얻어먹고 왔기에 원한을 품고 있었느니라. 이제 그 신이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이로부터는 중천신에게 복을 주어 원한을 없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을 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도낙서 지인지감 김 형렬, 출장입상 김 광찬, 기연미연 최 내경, 평생불변 안 내성, 만사불성 김 송환(河圖洛書知人之鑑金亨烈 出將入相金光贊 旣然未然崔乃敬 平生不變安乃成 萬事不成金松煥)」이라 쓰셔서 불사르시고 날이 저물었을 때 쌀 열 말씩을 종도들에게 나누어서 덕찬과 형렬의 집에 보내셨도다.
또 가라사대 「앞으로 오는 좋은 세상에서는 불을 때지 않고서도 밥을 지을 것이고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서도 농사를 지을 것이며 도인의 집집마다 등대 한 개씩 세워지리니 온 동리가 햇빛과 같이 밝아지리라. 전등은 그 표본에 지나지 않도다. 문고리나 옷걸이도 황금으로 만들어질 것이고 금당혜를 신으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이제는 해원시대니라. 남녀의 분을 틔워 제각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놓았으나 이후에는 건곤의 위치를 바로잡아 예법을 다시 세우리라」고 박 공우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때 공우가 상제를 모시고 태인읍을 지나는데 두 노파가 상제의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기에 상제께서 길을 비켜 외면하셨도다.
또 공우를 데리고 정읍으로 향하실 때 상제께서 「마음으로 천문지리를 찾아보라」하시기에 공우가 머리를 숙여서 풍운조화를 생각하니라. 상제께서 안간 공우를 돌아보시며 「그릇되게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찾아라」 이르시니 그는 놀라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그릇되게 생각한 것을 뉘우치니라. 그는 다시 천문지리를 마음으로 찾다가 정읍에 이르니라. 이날 밤에 상제께서 눈비가 내리는 것을 내다보시면서 공우에게 「너의 한 번 그릇된 생각으로써 천기가 한결같지 못하다」고 책망하셨도다.
하루는 종도들이 상제의 말씀을 좇아 역대의 만고 명장을 생각하면서 쓰고 있는데 경석이 상제께 「창업군주도 명장이라 하오리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그러하니라」 말씀하시니라. 경석이 황제(黃帝)로부터 탕(湯)ㆍ무(武)ㆍ태공(太公)ㆍ한고조(漢高祖) 등을 차례로 열기하고 끝으로 전 명숙을 써서 상제께 올리니 상제께서 그에게 「전 명숙을 끝에 돌린 것은 어찌된 일이뇨」 물으시니 경석이 「글을 왼쪽부터 보시면 전 명숙이 수위가 되나이다」고 답하였도다. 상제께서 그 말을 시인하시고 종도들을 향하여 「전 명숙은 만고 명장이라. 백의 한사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도다」고 일러 주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경석에게 가라사대 「전에 네가 나의 말을 좇았으나 오늘은 내가 너의 말을 좇아서 공사를 처결하게 될 것인바 묻는 대로 잘 생각하여 대답하라」 이르시고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를 그대로 두어야 옳으냐 걷어야 옳으냐」고 다시 물으시니 경석이 「그대로 두어 이용함이 창생의 편의가 될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니라. 그 말을 옳다고 이르시면서 「그들의 기계는 천국의 것을 본 딴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또 상제께서 여러 가지를 물으신 다음 공사로 결정하셨도다.
상제께서 앞날을 위하여 종도들을 격려하여 이르시니라. 「바둑에서 한 수만 높으면 이기나니라.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여두라. 이제 비록 장량(張良)ㆍ제갈(諸葛)이 쏟아져 나올지라도 어느 틈에 끼어 있었는지 모르리라. 선천개벽 이후부터 수한(水旱)과 난리의 겁재가 번갈아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진탕하여 왔으나 아직 병겁은 크게 없었나니 앞으로는 병겁이 온 세상을 뒤덮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되 거기에서 구해낼 방책이 없으리니 모든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 봄으로부터 이 동토에서 다른 겁재는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남았으니 몸 돌이킬 여가가 없이 홍수가 밀려오듯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1907년
상제께서 정미(丁未)년에 원일에게 「내가 四월 五일에 태인으로 갈 터이니 네가 먼저 가서 사관을 정하고 기다리라」고 이르시고 원일을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이튿날 고부 객망리의 주막에 이르러 형렬에게 「나는 이곳에서 자고 갈 터이니 네가 먼저 태인에 가서 원일이 정한 사관에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태인 하마가(下馬街)에서 나를 기다리라」 하셨도다. 형렬이 원일을 만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곳에 이르니 마침 장날이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였도다.
상제께서 이곳에서 형렬을 만나 그를 데리시고 한산(韓山) 객주집에 좌정하시고 원일을 부르셨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술을 가져오라. 내가 오늘 벽력을 쓰리라」 하시니 그는 말씀에 좇아 술을 올렸도다. 상제께서 잔을 받으시고 한참 동안 계시다가 술을 드시니 여태까지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음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며 벽력이 크게 일어나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태인에 유숙하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이 일에 대하여 형렬과 원일에게 설명하시기를 「내가 이제 아침에 객망리 주막 앞을 지날 때에 한 소부가 길가의 풀에 내린 이슬을 떨며 지나가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그 소부가 친정의 부음을 듣고 가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그 뒤를 한 노구가 지팡이를 짚고 가며 소부의 자취를 묻는도다. 내가 그 연유를 따져 물었더니 그 노구가 「앞에 간 소부는 나의 며느리이나 가운이 불행하여 어제 밤에 자식을 잃었는데 며느리가 장사를 치르기 전에 오늘 새벽에 도망갔나이다. 며느리는 저희끼리 좋아서 정한 작배이니다」고 대답하더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들에게 「대저 부모가 정하여 준 배필은 인연이요 저희끼리 작배한 것은 천연이라. 천연을 무시하여 인도를 패하려 하니 어찌 천노를 받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오늘 내가 벽력으로써 응징하였노라」고 하셨도다. 그 며느리는 벽력에 죽었노라고 전하는도다.
정읍(井邑) 사람 차 경석(車京石)이 정미년 五월에 처음으로 상제를 배알하였느니라. 이때 상제께서는 용암리(龍岩里) 수침막(水砧幕)에 머물고 계셨도다. 그는 원래 동학 신도였으나 일진회 전주 총대를 지낸 사람이라. 그는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에 들렀는데 이때 상제께서도 김 자현(金自賢)과 몇 종도를 데리고 이 주막에 들르셨도다. 경석은 상제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 그 비범하심을 알고 예를 갖추어 말씀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태연히 대하시니 그는 여쭈어 말하기를 「무슨 업을 행하시나이까」 하니 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의술을 행하노라」고 말씀을 건네시고 술을 드셨도다. 그러시다가 상제께서 계탕 한 그릇을 그에게 권하시니 그가 받은 뒤에 그릇에 벌 한 마리가 빠져 죽거늘 경석이 수저를 멈추고 혹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벌은 규모 있는 벌레니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속으로 감복하는도다. 그는 상제께 서류를 꺼내어 보이면서 그 곡절을 여쭙고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송사를 처결한다 하온데 선생님께서 판단하여 주소서」 하고 상제를 시험코자 답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의 곡직은 여하간에 원래 대인의 일이 아니라. 남자가 마땅히 활인지기를 찾을지언정 어찌 살기를 띠리오」 하시니 경석은 더욱 위대하심에 경복하여 곧 소송 서류를 불사르고 사사하기를 청하면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묻는도다. 이에 상제께서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 무가객(東亦客西亦客天地無家客)이다」고 하시니라. 경석은 머물고 계시는 곳을 모르고 헤어지면 다시 배알할 기회가 없을 것을 짐작하고 날이 저물어 상제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기다려 그 뒤를 쫓으니라. 닿은 곳이 용암리(龍岩里) 물방아집이니라. 경석은 그 식사와 범절이 너무 조촐하여 한시도 견디기 어려워하였도다.
경석이 그 물방아집에서 열흘 동안 묵으면서 상제께 정읍으로 가시기를 간청하였으되 상제께서 응하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노하시고 때로는 능욕하시기도 하고 구축도 하여 보셨느니라. 그래도 경석은 끝끝내 떠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서 「그럼 네가 나를 꼭 따르려거든 모든 일을 전폐하고 내가 하라는 일에만 전력하여야 할지니 너의 집에 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六월 초하루에 다시 이곳으로 오라. 그러면 함께 가리라」고 이르시니 그는 곧 돌아가서 가사를 대략 정리하고 그 날짜에 용암리에 다시 와서 상제께 배알하고 정읍으로 가시기를 또 청하는도다. 상제께서 불응하시다가 사흘 후에 허락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목이 잠기는 깊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헤엄쳐서 겨우 발목이 닿는 물에 이르렀는데 이제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려 하는도다」고 하셨도다.
훗날에 상제께서 경석을 보시고 「너는 강령을 받아야 하리라」 하시고 「원황정기 내합아신(元皇正氣來合我身)」의 글귀를 읽게 하신 후에 문을 조금 열으시니 경석이 그 글을 읽다가 갑자기 방성대곡하는지라. 상제께서 일각쯤 지나서 울음을 그치게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明月千江心共照 長風八隅氣同驅
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그 후 경석에게 「너의 선묘인 구월산(九月山) 금반사치(金盤死雉)의 혈음(穴蔭)을 옮겨 와야 되리라」고 명하시고 공우에게 북을 치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이 혈음은 반드시 장풍(長風)을 받아야 발하리라」 하셨도다. 이때 이 도삼(李道三)의 아우 장풍(長豊)이 문득 들어오거늘 공우가 북채를 잠깐 멈추고 「장풍이 오느냐」고 인사를 하는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이제 그만 그치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이 도삼에게 글 석 자를 부르게 하시니 그가 천ㆍ지ㆍ인(天地人) 석 자를 불렀더니 상제께서
天上無知天 地下無知地
人中無知人 何處歸
라고 그에게 읊어 주시니라.
어느 때 고양이를 보시고
嘴力未穩全信母 卵心常在不驚人
身來城國三千里 眼辨西天十二時
라고 지으셨도다.
六월 어느 날 신 경원(辛京元)이 태인에서 사람을 급히 보내어 순검이 날마다 저의 집에 와서 상제의 계신 곳을 묻는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도다. 상제께서 그 사람을 보고 「급한 일로 오는 사람이 도중에서 지체하다가 늦어진 것은 무슨 일이뇨」 꾸짖으시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오는 길에 당화주역으로 운명을 비판하는 자가 있으므로 잠깐 지체되었사오니 용서하소서」 하니 상제께서 곧 글을 써 주시며 「이 글을 경원에게 주고 보고 난 후에 곧 불사르라」 이르시니 그 글은 이러하니라.
天用雨露之薄則 必有萬方之怨
地用水土之薄則 必有萬物之怨
人用德化之薄則 必有萬事之怨
天用地用人用統在於心
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惑有善惑有惡
善者師之惡者改之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
상제께서 태인 김 경현(金京玄)의 집에 여러 날 머무르시다가 평상시와 달리 좁은 길로 그곳을 떠나셨도다. 읍내 무뢰한들이 모여서 강 증산(姜甑山)은 요술로써 사람을 속이니 우리가 혼을 내어주자고 음모하고 상제께서 떠나실 때를 기다려 습격하려고 길가에 매복하였으나 상제께서는 미리 아시고 다른 좁은 길을 택하신 것이로다.
김 덕찬(金德贊)의 누이동생 집에서 묘제가 있었던바 덕찬이 상제께 매가에 가셔서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상제께서 「나의 술을 먼저 마시라」 하시니 그가 「무슨 술이옵나이까」고 여쭈니 「좀 기다려 보라」 하시니라. 얼마 후에 공우가 삶은 닭과 술을 가져와서 상제께 드리니 이에 덕찬이 감복하여 술을 마셨도다.
상제께서 정미년 十월 어느 날 경석에게 돈 三十냥을 준비하게 하신 후 「이것은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 하시면서 어떤 법을 베푸시고
溪分洙泗派 峰秀武夷山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活計經千卷 行裝屋數間 小臣求聞道 非偸半日閑
이라는 시를 읽어 주셨도다.
상제께서 김 형렬을 보고
弊衣多垢勝金甲 頹屋無垣似鐵城
을 외워 주셨도다.
또 상제께서 이해 겨울에 그에게 잘 기억해 두라고 이르시면서 시를 외우셨도다.
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欲訥 臨事當如癡
急地尙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計 眞皆好男兒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맹자(孟子) 한 절을 일러 주시면서 그 책에 더 볼 것이 없노라고 말씀하셨도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贐行 拂亂其所爲
是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상제께서 이해 섣달에 고부 와룡리에 계시면서 문 공신과 신 경수의 두 집에 왕래하셨도다. 하순에 형렬이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입고 계시던 의복을 내어 주시면서 집에 돌아가 빨아서 자현과 함께 다시 오라고 이르셨도다. 그는 말씀대로 행하여 상제를 배알하고 의복을 올렸도다.
상제께서 형렬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자현과 함께 문 공신의 집에 있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 나는 신 경수에게 가 있으리니 관리가 나의 거처를 묻거든 숨기지 말고 실토하라.」 좌중의 종도들이 영문을 모르고 이상히 여기는도다. 이것을 아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관리를 두려워하면 제각기 흩어져서 마음대로 돌아가라」 하시니 저희들이 더욱 의심하는도다.
이때가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를 보시는 때이었도다. 때마침 면장과 이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면장에게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여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대가 어찌 이러한 음모에 참여하나뇨」 하시니 이 말을 듣고 놀라 두말없이 돌아가서 관부에 고발하였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고운 일광단(日光緞)으로 옷을 지어 새로 갈아입으셨도다.
상제께서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에 따라 화난이 닥칠 것을 종도들에게 알리셨도다. 「정미년 十二월 二十四일 밤 새벽에 백 순검이 오리라」고 종도들에게 알리시니 저희들은 순검 백 명이 닥치리라 생각하고 흩어지는 종도들이 있었으나 태인 새울 백 낙규(白樂圭)의 형인 백 순검이 새벽녘에 다녀갔도다.
二十五일 밤중에 무장한 순검 수십 명이 갑자기 공신의 집을 포위하고 좌중에 있던 사람을 결박하고 상제의 거처를 묻기에 신 경수의 집에 계시는 것을 말하니 순검들이 곧 달려갔도다. 그들은 방문에 총대로 구멍을 뚫고 위협하느니라. 상제께서 방안에서 총대를 잡으시고 호령하시니 저희들이 겁을 먹고 총대를 빼려고 잡아당겨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였도다. 잠시 있다가 상제께서 들어오라고 허락하시니 비로소 저희들이 방에 들어오더니 상제를 비롯하여 종도 二十여 명을 포박하였도다. 이튿날 상제와 종도들은 고부 경무청에 압송되었나니 이것은 의병의 혐의를 받은 것이로되 백의장군 공사에 따른 화난이라고 훗날에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상제와 종도들은 정우면 와룡리(淨雨面臥龍里)에서 포박되어 상제를 선두로 하여 덕천면 용두 마을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돝 한 마리를 잡게 하고 종도들이나 순검들과 함께 잡수시고 고부로 행하셨도다.
이 일이 나기 전날 상제께서 광찬을 정읍에 있는 경석에게 보내고 원일을 태인에 있는 경원에게 가게 하고 공우를 또 다른 곳으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피하게 하신 것은 광찬과 원일의 성질을 알고 계시는 터이고 공우는 여러 번 관재를 당하였던 까닭이었도다.
이튿날부터 고부 경무청은 심문을 시작하였느니라. 상제께 경무관이 「네가 의병이냐」는 물음에 가라사대 「나는 의병이 아니라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로다.」 이 말씀에 경무관이 놀라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에 상제께서 「사람마다 도략(韜略)이 부족하므로 천하를 도모치 못하노니 만일 웅재대략이 있으면 어찌 가만히 있으랴. 나는 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 하노라」고 이르시니라. 경무관은 상제의 머리를 풀어헤쳐 보기도 하고 달아매는 등 심한 고문을 가한 뒤에 옥중에 가두고 다른 사람은 문초도 받지 않고 옥에 갇혔도다. 여러 사람들이 상제를 원망하기 그지없었도다.
때마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병과 충돌하였도다. 의병을 가장하여 노략질하는 비도도 있었으므로 의병의 혐의로 체포된 자는 시비를 불문하고 총살되었으니 모든 종도들이 의병의 혐의에 공포를 느끼고 벌벌 떨고 있었도다.
문 공신은 순검들에게 옆구리를 발로 채여 심한 오한을 일으켜 식음을 전폐하여 위독하게 되었는지라. 상제께서 「급한 병이니 인곽을 써야 하리라」 하시고 여러 종도들을 관처럼 둘러 세우시고 상제께서 소변 찌끼를 받아 먼저 조금 잡수시고 공신으로 하여금 먹게 하시니라. 공신은 자기를 위하여 상제께서 잡수심을 황공히 생각하여 받아 마시니 조금 후에 그는 숨을 돌리기 시작하여 평상대로 회복하였도다.
간수 중에 형렬ㆍ자현과 친한 사람이 있어 그들은 다른 조용한 감방으로 옮겨 주거늘 형렬이 간수에게 부탁하여 상제께서도 같은 방으로 옮기시게 하였도다.
상제께서 감방을 옮기신 후에 형렬ㆍ자현에게 가라사대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공사를 처결하나니 우리 셋이면 무슨 일이든지 결정하리라」 하시고 또 자현에게 가만히 가라사대 「비록 몇십만 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지라도 일호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 말라」 하시니라. 그믐날 밤에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이것은 서양에서 신명이 넘어옴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옥중에서 과세하셨느니라.
상제께서 정미년 三월 초에 광찬을 대동하고 말점도(末店島)에 들어가시려고 (광찬의 재종이 말점도에서 어업을 경영하고 있었음) 갑칠과 형렬을 만경 남포(南浦)에 불러 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지금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정배됨이니 너희들은 성백(成伯)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四十九일 동안 하루에 짚신 한 켤레와 종이등 한 개씩을 만들라. 그 신을 천하 사람에게 신게 하고 그 등으로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히리라」 하셨도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성백의 집에 가서 그대로 시행하였도다. 그 후 상제께서 말점도로부터 나오셔서 그 짚신을 원평 시장에 가서 팔게 하시고 그 종이등에는 각기 「음양(陰陽)」 두 글자를 쓰셔서 불사르시니라.
또 백지로 고깔을 만들어 마장군(馬將軍)이라 써서 문 위에 걸고 짚을 한 아름쯤 되게 묶어 인경을 만들어 방 가운데에 달아매고 백지를 바른 다음에 二十四방위 자를 둘러쓰고 그 글자 사이에 다른 글자를 써 넣고 또 그 위에 백지를 오려서 비늘을 달아 붙이시니 그 모형이 마치 철갑옷과 같아지니라. 그 자리에 형렬ㆍ공신ㆍ광찬ㆍ장근ㆍ응종ㆍ원일ㆍ도삼ㆍ갑칠ㆍ그 외 몇 사람이 있었도다.
또 상제께서 장근으로 하여금 식혜 한 동이를 빚게 하고 이날 밤 초경에 식혜를 큰 그릇에 담아서 인경 밑에 놓으신 후에 「바둑의 시조 단주(丹朱)의 해원도수를 회문산(回文山)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붙여 조선 국운을 돌리려 함이라. 다섯 신선 중 한 신선은 주인으로 수수방관할 뿐이오. 네 신선은 판을 놓고 서로 패를 지어 따먹으려 하므로 날짜가 늦어서 승부가 결정되지 못하여 지금 최 수운을 청하여서 증인으로 세우고 승부를 결정코자 함이니 이 식혜는 수운을 대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시고 「너희들이 가진 문집(文集)에 있는 글귀를 아느냐」고 물으시니 몇 사람이 「기억하는 구절이 있나이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백지에 「걸군굿 초란이패 남사당 여사당 삼대치」라 쓰고 「이 글이 곧 주문이라. 외울 때에 웃는 자가 있으면 죽으리니 조심하라」 이르시고 「이 글에 곡조가 있나니 만일 외울 때에 곡조에 맞지 않으면 신선들이 웃으리라」 하시고 상제께서 친히 곡조를 붙여서 읽으시고 종도들로 하여금 따라 읽게 하시니 이윽고 찬 기운이 도는지라. 상제께서 읽는 것을 멈추고 「최 수운이 왔으니 조용히 들어보라」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인경 위에서 「가장(家長)이 엄숙하면 그런 빛이 왜 있으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니 「이 말이 어디에 있느뇨」고 물으시니라. 한 종도가 대답하기를 「수운가사(水雲歌詞)에 있나이다.」 상제께서 인경 위를 향하여 두어 마디로 알아듣지 못하게 수작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뒷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 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 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 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 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 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 자까지 붙여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 자를 너희들에게 붙여 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이르시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 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 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대신명(大神明)이 들어설 때마다 손을 머리 위에 올려 예를 갖추셨도다.
상제께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 하시고 청도원 류 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 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그때에 김 송환이 그 시종을 들었느니라.
상제께서 정미년 四월 어느 날 돈 千냥을 백 남신으로부터 가져오셔서 동곡에 약방을 차리시는데 이때 약장과 모든 기구를 비치하시기 위하여 목수 이 경문(李京文)을 불러 그 크기의 치수와 만드는 법을 일일이 가르치고 기한을 정하여 끝마치게 하시니 약방은 갑칠의 형 준상의 집에 설치하기로 하셨도다.
목수가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기에 상제께서 목수로 하여금 목재를 한 곳에 모아 놓게 하고 앞에 꿇어앉힌 후 크게 꾸짖고 봉서 하나를 목수에게 주고 꿇어앉은 그대로 불사르게 하시니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는지라. 목수가 두려워서 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속히 마치라」 독려하시니라. 그 목수가 수전증이 나서 한 달이 넘은 후에 겨우 일을 끝내니라. 약방을 차린 후 상제께서 공우에게 「천지의 약기운은 평양에 내렸으니 네가 평양에 가서 당제약을 구하여 오라」고 명하셨도다. 그 후에 다시 그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고 그날 밤에 글을 써서 불사르셨도다.
약방을 설치하신 후 「원형이정 봉천지 도술약국 재전주동곡 생사판단(元亨利貞奉天地道術藥局 在全州銅谷生死判斷)」이란 글귀를 쓰셔서 불사르셨도다. 약장은 종삼 횡오 도합 十五간으로 하고 가운데에 큰 간이 둘 아래로 큰 간이 하나이니라. 상제께서는 그 위 十五간 중의 가운데 간에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고 그 속에 목단피를 넣고 그 아래에 「열풍 뇌우 불미(烈風雷雨不迷)」라고 횡서하고 또 칠성경을 백지에 종서하고 그 끝에 「우보 상최 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횡서하고 약장 위로부터 뒤로 밑판까지 따라서 내려붙이고 그 위에 「양정 유월 이십일 음정 유월 이십일(陽丁六月卄日陰丁六月卄日)」이라 쓰시니라. 궤 안에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고 그 글자 위에 「설문(舌門)」 두 자를 낙인하신 후 그 글자 주위에는 二十四점을 홍색으로 찍고 약방에 통감(通鑑)ㆍ서전(書傳) 각 한 질씩 비치하였도다.
상제께서 병욱에게 명하시어 전주에 가서 三百냥으로 약재를 사오게 하셨는데 마침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이 비는 곧 약탕수(藥湯水)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에게 주고 가라사대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지난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지느니라.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로다.
상제께서 용두치 주막에 계실 때 광찬에게 한방의서(漢方醫書) 방약합편(方藥合編)을 사오게 하시고 「네가 병욱의 집에 가서 주묵(朱墨)으로 이 책 중에 있는 약명에 비점을 찍으라」 이르시니 광찬이 명대로 시행하여 올리니 상제께서 열람하시고 그 책을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농암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허 미수(許眉叟)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 일만이천 봉은 겁기가 붙어 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 하시고 「네가 김 광찬ㆍ신 원일과 함께 백지 일 방촌씩 오려서 시(侍) 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되 한 사람이 하루 四百자씩 열흘에 쓰라. 그리고 그 동안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 길어 스물네 그릇으로 나누어 놓고 밤에 칠성경(七星經) 三七편을 염송하라」 명하시니라. 형렬은 그 명을 좇았으되 신 원일이 즐거이 행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 아뢰니 상제께서는 「정읍 이 도삼을 불러서 행하라」 분부하시니라. 형렬은 그를 데려다가 열흘 동안 분부대로 행한 후에 김 갑칠을 보내어 일을 마쳤음을 상제께 아뢰게 하였더니 상제께서 갑칠에게 양(羊) 한 마리를 사주며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十一월에 사기를 옮기는 공사를 보시고자 동곡에 돌아오셔서 전일에 주었던 양을 잡게 하고 그 양 피를 손가락 끝에 묻혀 일만 이천 시(侍)란 글자에 바르시니 양 피가 다한지라. 상제께서 「사기(沙器)를 김제(金堤)로 옮겨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때 김제 수각(水閣) 임 상옥(林相玉)이 왔기에 상제께서 청수를 담던 사기그릇을 개장국에 씻어 그에게 주시니라. 그는 영문을 모르고 주시는 대로 그 그릇을 받았도다. 그는 며칠 후에 그 사기그릇의 용처를 여쭈었더니 「인부를 많이 모아 일할 때 쓰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十一월에 동곡에 머무시면서 금강산 공사를 보시고 형렬에게 「내가 삭발하리니 너도 나를 따라 삭발하라」고 분부하시니 형렬이 속으로 달갑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나 부득이 응낙하니라. 또 갑칠을 불러 「내가 삭발하리니 내일 대원사에 가서 중 금곡을 불러오라」 하시므로 형렬은 크게 근심하였으되 이튿날 다시 그것에 대한 말씀이 없었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후천에서의 음양 도수를 조정하시려고 종도들에게 오주를 수련케 하셨도다. 종도들이 수련을 끝내고 각각 자리를 정하니 상제께서 종이쪽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 하노라. 각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점을 찍어 표시하라」고 이르시니 종도들이 마음에 있는 대로 점을 찍어 올리니라. 「응종은 두 점, 경수는 세 점, 내성은 여덟 점, 경석은 열두 점, 공신은 한 점을 찍었는데 아홉 점이 없으니 자고로 일남 구녀란 말은 알 수 없도다」고 말씀하시고 내성에게 「팔선녀란 말이 있어서 여덟 점을 쳤느냐」고 물으시고 응종과 경수에게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나 어찌 감당하리오」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후천에서는 새로운 기력이 나지 아니하리까」고 되물으니 「그럴듯하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무슨 아내를 열둘씩이나 원하느뇨」고 물으시니 그는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고 대답하니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다시 「그럴듯하도다」고 말씀을 건네시고 공신을 돌아보시며 「경석은 열둘씩이나 원하는데 너는 어찌 하나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요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 일양이 원리인 줄 아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너의 말이 옳도다」고 하시고 「공사를 잘 보았으니 손님 대접을 잘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공신이 말씀대로 봉행하였느니라. 상제께서 이 음양도수를 끝내시고 공신에게 「너는 정음 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고 분부하시고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종도들의 음양 도수를 끝내신 상제께서 이번에는 후천 五만 년 첫 공사를 행하시려고 어느 날 박 공우에게 「깊이 생각하여 중대한 것을 들어 말하라」 하시니라. 공우가 지식이 없다고 사양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아뢰기를 「선천에는 청춘과부가 수절한다 하여 공방에서 쓸쓸히 늙어 일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불가하오니 후천에서는 이 폐단을 고쳐 젊은 과부는 젊은 홀아비를, 늙은 과부는 늙은 홀아비를 각각 가려서 친족과 친구들을 청하고 공식으로 예를 갖추어 개가케 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네가 아니면 이 공사를 처결하지 못할 것이므로 너에게 맡겼더니 잘 처결하였노라」고 이르시고 「이 결정의 공사가 五만 년을 가리라」고 말씀하셨도다.
十二월 초하룻날 고부인은 상제의 분부대로 대흥리에서 백미 한 섬을 방에 두고 백지로 만든 고깔 二十여 개를 쌀 위에 놓고 종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니라. 이때 상제께서 「불과 물만 가지면 비록 석산바위 위에 있을지라도 먹고 사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그 백미로 밥을 지어 이날 모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도다.
김 광찬과 신 원일이 상제를 모시고 있던 정미년 정월 어느 날 상제께서는 그들에게 「귀신은 진리에 지극하니 귀신과 함께 천지공사를 판단하노라」 하시면서 벽에 글을 다음과 같이 써 붙이셨도다.
知事萬忘不世永定化造主天侍
至
氣
今
至
師 願 法
爲
大
降
全 慶
州 州
銅 龍
谷 潭
解 報
冤 恩
神 神
日 月 年
종도들이 모인 곳에서 상제께서 三월 어느 날 가라사대 「지금은 신명 해원시대니라. 동일한 五十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오. 최 제우는 경신(庚申)에 득도하여 시천주(侍天呪)를 얻었는바 기유(己酉)까지 五十년이 되니라. 충남(忠南) 비인(庇仁) 사람 김 경흔(金京訢)은 五十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를 해원하리오」라고 물으시니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 중에서 광찬이 「상제님의 처분을 기다리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고 태을주를 쓰리라」 하시고 읽어 가르치시니 그 주문은 이러하였도다.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㖿都來 吽哩喊哩娑婆啊」
상제께서 대흥리로 행하실 때 박 공우가 따라가니라. 상제께서 경석의 집에 들러 글을 써서 벽에 붙이고 「내가 머무는 곳을 천지가 다 알아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니 갑자기 천둥이 치는지라. 공우가 몹시 놀라고 마을 사람들도 뜻밖의 천둥을 이상히 여기니라. 이후에 일진회원인 안 내성(安乃成)ㆍ문 공신(文公信)ㆍ황 응종(黃應鍾)ㆍ신 경수(申京洙)ㆍ박 장근(朴壯根) 등이 상제를 추종하였도다.
황 응종이 노랑 닭 한 마리를 상제께 올리니라. 상제께서 밤중에 형렬에게 그 닭을 잡아 삶게 하고 김 형렬ㆍ한 공숙ㆍ류 찬명ㆍ김 자현ㆍ김 갑칠ㆍ김 송환ㆍ김 광찬ㆍ황 응종 등과 나눠 잡수시고 운장주(雲長呪)를 지으셔서 그들에게 단번에 외우게 하셨도다. 이것이 그때의 운장주이니라.
「天下英雄關雲長 依幕處 近聽天地八位諸將 六丁六甲六丙六乙 所率諸將 一別屛
營 邪鬼唵唵喼喼如律令娑婆啊」
김 덕찬이 상제를 대함이 항상 거만하나 상제께서는 개의치 않으시고 도리어 덕찬을 우대하시더니 하루는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공사를 행하실 때 크게 우레와 번개를 발하니 덕찬이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려 하니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죄 없거늘 어찌 두려워하느뇨.」 덕찬이 더욱 황겁하여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이후에는 상제를 천신과 같이 공경하고 받들었도다.
정미년 화창한 봄이 되었도다. 상제의 성예가 사방에 펼쳐지니 그 성예를 학동(鶴洞) 마을에 사는 문 치도(文致道)가 듣고 전주 이서면 불가지(全州伊西面佛可止) 김 성국(金成國)의 집에 계시는 상제를 배알하고자 찾아가는 길에 이성동(伊成洞)의 송 대유(宋大有)와 동행하려고 그를 찾았도다. 마침 대유는 손님을 맞아 있기에 종제와 함께 동행하기를 바라는도다. 대유는 종제가 폐병으로 위기에 놓였음을 알리고 상제께 구해주실 것을 간청하여 주기를 치도에게 부탁하니라. 그리고 대유는 동생에게 돈 두 냥을 주효에 쓰라고 내어주면서 이 돈을 이자 없이 갚으라고 일렀도다. 동생은 형에게 한 냥이면 족하다고 하면서 한 냥을 돌려주고 치도를 따라 상제께 배알하였도다. 그곳에서 동생은 사유를 일일이 고한즉 상제께서 「인색한 자가 어찌 병을 고치리오」 하시니라. 치도와 병자는 상제의 통찰하심에 경복하여 병자는 스스로 송구스러워 귀가하니라. 치도가 병자로부터 받은 한 냥으로 주효를 장만하여 성국으로 하여금 상제께 올리게 하니라. 그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어찌 된 음식이냐」고 물으시기에 성국이 치도의 공양임을 아뢰니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돈이 오늘 저녁에 많이 늘어날 것이었는데 부질없는 짓이라」 하시니 치도가 놀라며 상제의 깊으시고 신성하시고 고명하심에 당황하여 물러가기를 여쭈니 「오늘 저녁부터 병자는 보리밥을 먹이라」고 하시므로 이 사실을 병자에게 전하니 그날 저녁부터 보리밥을 먹기 시작하여 병에 차도를 보고 후에 폐병의 괴로움으로부터 재생되었도다. 이 일로써 상제의 성예는 더욱더 마을에서 마을로 퍼졌느니라.
상제께서 정미년 가을 어느 날 신 원일과 박 공우와 그 외 몇 사람을 데리시고 태인 살포정 주막에 오셔서 쉬시는데 갑자기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 집에 범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번개와 우레가 일어나는 쪽을 향하여 꾸짖으시니 곧 멈추는지라. 이때 공우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번개를 부르시며 또 때로는 꾸짖어 물리치기도 하시니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하시는 상제시라, 어떤 일이 있어도 이분을 좇을 것이라고 마음에 굳게 다짐하였더니 어느 날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만날 사람 만났으니라는 가사를 아느냐」 하시고 「이제부터 네가 때마다 하는 그 식고(食告)를 나에게 돌리라」 하시니 공우가 감탄하여 여쭈기를 「평생의 소원이라 깨달았나이다.」 원래 공우는 동학신도들의 식고와는 달리 「하느님 뵈어지소서」라는 발원의 식고를 하였는데 이제 하시는 말씀이 남의 심경을 통찰하심이며 조화를 임의로 행하심을 볼 때 하느님의 강림이시라고 상제를 지성으로 받들기를 결심하였도다.
상제께서 정미년에 태인 고현내 행단에 이르러 차 경석에게
「夫主將之法 務攬英雄之心 賞祿有功 通志於衆 與衆同好靡不成 與衆同惡靡不傾
治國安家得人也 亡國敗家失人也 含氣之類 咸願得其志」
란 글 한 절을 외워 주시고 잘 지키기를 바라시면서 수부(首婦)가 들어서야 하느니라고 이르시니라. 경석이 상제를 모시고 돌아와서 그 이종매(姨從妹) 고부인(高夫人)을 천거하니 이날이 동짓달 초사흗날이니라.
상제께서 동짓달 스무여드렛날 정읍 대흥리 차 경석의 집에 이르셔서 포정소(布政所)를 정하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상량 공사(上樑公事)를 보실 때 「있는 기운 그대로 풀어 버릴 수밖에 없다」 하시고 경석에게 백목(白木)을 가져오게 하고 공사를 행하시다가 백목이 모자라 그로 하여금 백목을 더 가져오게 하고 상량 공사를 마치셨도다.
또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성인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고대의 자사(子思)는 성인이라. 위후(衛侯)에게 말하기를 약차불이 국무유의(若此不已 國無遺矣)라 하였으되 위후가 그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위국(衛國)이 나중에 망하였다」 하셨도다.
상제께서 정미년 섣달 스무사흘에 신 경수를 그의 집에서 찾으시니라. 상제께서 요(堯)의 역상 일월성신 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知人)이 아니면 허영(虛影)이요, 당요(唐堯)가 일월의 법을 알아내어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이치가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졌나니라」 하셨도다. 이때 상제께서 일월무사 치만물 강산유도 수백행(日月無私治萬物 江山有道受百行)을 가르치고 오주(五呪)를 지어 천지의 진액(津液)이라 이름하시니 그 오주는 이러하도다.
新天地家家長歲 日月日月萬事知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福祿誠敬信 壽命誠敬信 至氣今至願爲大降
明德觀音八陰八陽 至氣今至願爲大降
三界解魔大帝神位願趁天尊關聖帝君
문 공신(文公信)과 박 장근ㆍ이 화춘 세 사람은 고부화액을 당하고 상제를 원망하며 불경한 패설을 일삼았도다. 이 화춘은 三월에 의병에게 포살되었고 박 장근은 의병으로부터 매를 맞고 뼈를 부러뜨렸도다. 상제께서 이 사실을 전해 들으시고 공신에게 마음을 바로잡을 것과 천노가 있음을 알려주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글을 써서 불사르셔서 이 화춘을 귀신으로서 위안하셨도다.
상제께서 김 경학의 집에 대학교를 정하시고 「학교는 이 학교가 크니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였으니 천한 사람에게 먼저 교를 전하리라」 하시고 경학을 시켜 무당 여섯 명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의 관건을 벗기고 각자 앞에 청수를 떠 놓고 그것을 향하여 사배를 하게 하고 시천주 세 번을 제각기 따라 읽게 하셨도다. 이것을 끝내고 그들의 이름을 물은 다음에 각자로 하여금 청수를 마시게 하니 이것이 곧 복록이로다. 이것이 해원시대에 접어들어 맨 먼저 천한 사람들에게 교를 전하신 것이었도다.
공우가 어느 날 상제를 찾아뵈옵고 도통을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니라. 상제께서 이 청을 꾸짖고 가라사대 「각 성(姓)의 선령신이 한 명씩 천상 공정에 참여하여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이제 만일 한 사람에게 도통을 베풀면 모든 선령신들이 모여 편벽됨을 힐난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정을 볼 수 없도다. 도통은 이후 각기 닦은 바에 따라 열리리라」 하셨도다.
또 상제께서 말씀을 계속하시기를 「공자(孔子)는 七十二명만 통예시켰고 석가는 五百명을 통케 하였으나 도통을 얻지 못한 자는 다 원을 품었도다. 나는 마음을 닦은 바에 따라 누구에게나 마음을 밝혀 주리니 상재는 七일이요, 중재는 十四일이요, 하재는 二十一일이면 각기 성도하리니 상등은 만사를 임의로 행하게 되고 중등은 용사에 제한이 있고 하등은 알기만 하고 용사를 뜻대로 못하므로 모든 일을 행하지 못하느니라」 하셨도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공우에게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 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三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고 이르셨도다.
「모든 일을 있는 말로 만들면 아무리 천지가 부수려고 할지라도 부수지 못할 것이고 없는 말로 꾸미면 부서질 때 여지가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차 경석의 집에 유숙하시니 종도들이 모여와서 상제를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상제께서 양지 온 장에 사람을 그려서 벽에 붙이고 제사 절차와 같이 설위하고 종도들에게 「그곳을 향하여 상악천권(上握天權)하고 하습지기(下襲地氣)식으로 사배하면서 마음으로 소원을 심고하라」고 명하시니라. 종도들이 명하신 대로 행한 다음에 상제께서도 친히 그 앞에 서서 식을 마치시고 「너희는 누구에게 심고하였느냐」고 물으시니라. 어느 종도 한 사람이 「상제님께 심고하였나이다」고 말씀을 올리니, 상제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가라사대 「내가 산 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 하시고 「자리로서는 띠자리가 깨끗하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상제께서 동곡에 머물고 계실 때 교운을 펴시니라. 종도 아홉 사람을 벌여 앉히고 갑칠에게 푸른 대(竹)나무를 마음대로 잘라 오게 명하셨도다. 갑칠이 잘라 온 대가 모두 열 마디인지라. 그중 한 마디를 끊고 가라사대 「이 한 마디는 두목이니 두목은 마음먹은 대로 왕래하고 유력할 것이며 남은 아홉 마디는 수교자의 수이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하늘에 별이 몇이나 나타났는가 보라」 하셨도다. 갑칠이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나 복판이 열려서 그 사이에 별 아홉이 반짝입니다」고 아뢰니라. 상제께서 「그것은 수교자의 수에 응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매일 글을 쓰셔서 큰 두루마리를 만들어 형렬ㆍ광찬ㆍ윤근ㆍ경학ㆍ원일에게 명하시니라. 「너희들이 창문을 봉하고 방 안에 들어가서 방 안에 있는 두루마리를 화로에 불사르되 연기가 방 안에 가득 차게 하고 다 타거든 문을 열라. 일을 하려면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되니라.」 모두들 말씀에 좇아 그대로 행하였으되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는도다. 참지 못해 윤근과 원일이 문밖으로 뛰어나오고 나머지 종도들은 두루마리가 다 타기를 기다린 연후에 문을 열었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교운을 굳건히 하시고자 도통에 관해 말씀이 계셨도다. 「지난날에는 도통이 나지 아니하였으므로 도가에서 도통에 힘을 기울였으나 음해를 이기지 못하여 성사를 이룩하지 못했도다. 금후에는 도통이 나므로 음해하려는 자가 도리어 해를 입으리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 주면 되려니와 도통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과 함께 계실 때 「나의 일이 장차 초장봉기(楚將蜂起)와 같이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되 다시 진법이 나오게 되리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공사(公事)를 행하신 후부터 부친도 일상생활에서 의존심을 갖지 않도록 하고 또 평소의 허물을 뉘우쳐 앞길을 닦도록 하고 간혹 종도들로부터 물품이나 그 밖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일체 금하셨도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종도가 상제의 본댁이 너무 협착함을 송구히 생각하여 좀 나은 집을 사 드렸도다. 상제께서 이것을 아시고 그 종도에게 꾸짖고 「네가 어찌 나의 부친에게 허물을 만들어 드리느뇨. 아직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불효라고 하겠으나 나는 부모의 앞길을 닦아 드리려고 내가 항상 형편을 살피고 있으니 너희들이 부친을 도울 생각이 있으면 나의 허락을 얻어 행하라」고 명하셨도다.
일에 뜻을 둔 자는 넘어오는 간닢을 잘 삭혀 넘겨야 하리라.
어떤 일을 묻는 자에게 그 사람이 듣고 실행하느냐에 상관하지 말고 바른 대로 일러 주라.
현세에 아는 자가 없나니 상도 보이지 말고 점도 치지 말지어다.
상제께서 정미년 정월에 형렬에게 가라사대 「나의 말이 곧 약이라.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기도 하며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거슬리게도 하며 말로써 병든 자를 일으키기도 하며 말로써 죄에 걸린 자를 풀어주기도 하니 이것은 나의 말이 곧 약인 까닭이니라. 충언이 역이로되 이어행(忠言逆耳利於行)이라. 나는 허망한 말을 아니 하나니 내 말을 믿으라」하셨도다.
사람을 쓸 때는 남녀 노약을 구별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진평(陳平)은 야출 동문 여자 이천인(夜出東門女子二千人) 하였느니라.
한 신(韓信)은 한 고조(漢高祖)의 퇴사 식지(推食食之)와 탈의 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蒯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한 신이 한 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 고조가 한 신을 저버린 것이니라.
상제께서 병욱에게 이르시니라. 「남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너는 전 명숙(全明淑)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너의 영귀에는 전 명숙의 힘이 많으니라.」
옛적에 신성(神聖)이 입극(立極)하여 성ㆍ웅(聖雄)을 겸비해 정치와 교화를 통제 관장(統制管掌)하였으되 중고 이래로 성과 웅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
박 공우의 아내가 물을 긷다가 엎어져서 허리와 다리를 다쳐 기동치 못하고 누워 있거늘 공우가 매우 근심하다가 상제가 계신 곳을 향하여 자기의 아내를 도와 주십사고 지성으로 심고하였더니 그의 처가 곧 나아서 일어나느니라. 그 후 공우가 상제께 배알하니 웃으며 가라사대 「내환으로 얼마나 염려하였느냐」 하시니라. 또 박 공우가 큰 돌을 들다가 허리를 상하여 고생하면서도 고하지 않았더니 하루는 상제를 모시고 길을 가는데 갑자기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너의 허리를 베어버리리라」 하시더니 곧 요통이 나았도다.
상제께서 양지에 글을 쓰시면서 공사를 보시던 중에 김 보경을 불러 「동쪽에 별이 나타났느냐 보아라」 하시니 그가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서 「검은 구름이 가득히 하늘을 덮어서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창문을 열고 동천을 향하여 헛기침을 하시니 구름이 흩어지고 별이 나타나는도다.
종도 공우가 상제를 모시고 신 경수의 집에 머물렀느니라. 공우는 밤에 잠자리에서 빛나는 사람 수십 명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상제가 계시는 문밖의 뜰에서 배례하는지라 이에 놀라서 공우는 상제의 등 뒤에 숨었도다. 아침에 상제께서 꿈 이야기를 물으시거늘 공우가 그대로 아뢰니 다시 가라사대 「그들이 천상 벽악사자(天上霹惡使者) 이니라」 하셨도다.
공우가 상제를 좇은 후로부터 순유에 자주 시종하였도다. 그는 상제께서 어디서든지 머무시다가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실 때는 밤이면 달무리, 낮이면 햇무리가 나타나는 것을 증험하였으므로 언제든지 햇무리나 달무리만 나타나면 출입하실 줄 알고 먼저 신발과 행장을 단속하여 명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반드시 불러 길을 떠나자 하셨도다. 대저 상제께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미리 말씀하신 일이 없었도다.
상제께서 김 익찬(金益贊)을 데리시고 전주 세천(細川)을 지나실 때 일본인 포수가 냇물 위에 앉아 있는 기러기 떼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차마 보지 못하겠노라」 하시고 왼발로 땅을 한 번 구르시고 그 자리에 서시니라. 그 찰나에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지라. 그 뒤에 상제께서 발을 옮기시더니 그제야 총소리가 들렸도다.
상제께서 불가지로부터 전주로 향하여 가시는 도중에 동남쪽부터 큰 비가 몰려오기에 길 복판에 흙을 파서 침을 뱉고 흙을 덮으시는도다. 비가 그 자리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한 갈래는 동쪽으로 또 한 갈래는 서쪽으로 향하여 몰려가는도다.
동리 사람들이 상제를 배알하고 오늘은 단오절이오니 학선암(學仙庵)에 가서 소풍하시기를 청하거늘 상제께서 응낙하시고 자현(自賢)을 데리고 가시다가 도중에서 폭우가 쏟아지려고 하는지라. 사람들이 달음박질하여 비를 피하려고 하나 상제께서 자현을 불러 「천천히 갈지어다」고 이르시고 노방에 앉으셔서 담배를 피우시고 몰려오는 구름 쪽을 향하여 담배 연기를 뿜으셨도다. 그리고 자리를 뜨시며 천천히 걸어 학선암에 이르시니 곧 비가 억세게 내리기 시작하였도다.
김 경학이 일찌기 동학에 가입하여 三개월 동안 시천주의 수련을 하던 중에 어느 날 꿈에 천상에 올라 상제를 뵈온 일이 있었노라. 상제께서 어느 날 「네 평생에 제일 좋은 꿈을 꾼 것을 기억하느냐」 하시니 경학이 상제를 천상에서 뵈옵던 꿈을 아뢰었도다. 그리고 그는 상제를 쳐다보니 상제의 지금 형모가 바로 그때 뵈옵던 상제의 형모이신 것을 깨달으니라.
천문을 보시려면 대체로 구름으로 하늘을 덮고 성수를 하나씩 나타나게 하여, 종도로 하여금 살피게 하기도 하셨도다.
상제께서 정미년에 와룡리 황 응종의 집에 머물고 계셨도다. 상제께서 응종의 딸에게 앞마당에 볏짚을 깔고 청수를 올리라 하시니 그 딸이 곧 청수를 동이에 넣어 올렸더니 갑자기 뇌성 벽력이 크게 일어나며 폭우가 억수같이 쏟아졌으나 청수동이를 놓은 다섯 자 가량의 둘레에는 한 방울의 빗물도 없었도다.
상제께서 와룡리 황 응종의 집에 계실 때 어느 날 담뱃대를 들어 태양을 향하여 돌리시면 구름이 해를 가리기도 하고 걷히기도 하여 구름을 자유자재로 좌우하셨도다.
황 응종의 아들이 병으로 위급하게 되었기에 응종이 청수를 떠 놓고 멀리 상제가 계신 곳을 향하여 구하여 주실 것을 두 손을 모아 발원하였더니 아들의 병세가 나으니라. 이튿날 응종이 동곡 약방으로 가서 상제께 배알하니 가라사대 「내가 어제 구름 속에서 내려다보니 네가 손을 모으고 있었으니 무슨 연고이냐」고 물으시므로 응종이 사유를 자세히 아뢰었더니 상제께서 웃으셨도다.
상제께서 황 응종ㆍ김 갑칠을 데리고 원평 앞 다리를 지나려고 하시는데 저편에서 말을 타고 세 사람이 오는지라. 이것을 보시고 왼발로 길바닥을 한 번 구르고 다리 머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셨도다. 달려오던 말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으니 세 사람이 온갖 힘을 다 쓰나 말은 꼼짝달싹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이상히 생각하느니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사방을 둘러보다가 다리를 건너와서 상제께 절하고 「길을 좀 비켜 주십사」고 청하기에 상제께서 웃으시며 한쪽으로 비켜서시니 그제서야 말굽이 떨어지고 그들은 오던 길을 갔도다.
상제께서 종도들을 데리고 순창 피노리 주막에 머무르셨다가 태인 백암리로 가시는 도중에 폭우가 계속되었으나 한 방울의 비도 맞지 않으셨도다.
상제께서 五월에 태인 백암리로 가실 때 김 경학의 집에서 불이 나서 바람을 타기 시작하여 화재가 위험하게 되니라. 상제께서 「이 불을 끄지 않으면 동리가 위태로우리라」고 말씀하시고 크게 바람을 일으켜 불을 끄시니라. 경학은 바람으로써 불을 끄는 법도 있다면서 탄복하였도다.
김 명칠(金明七)은 태인 백암리에 사는 종도인데 산비탈에 땅을 개간하여 거름을 주고 담배를 심어 가꾸었도다. 하루는 번개가 치고 비가 세차게 퍼붓느니라. 비탈진 산전에 거름을 준 후라 억수가 내리면 거름은 물론 밭두둑까지 사태가 나는 것이 상례이기에 명칠이 가슴을 치며 「내 농사는 이것뿐인데 이 억수로 버리게 되었으니 어찌 살랴」고 울음을 터뜨렸도다. 상제께서 긍휼히 여겨 「내가 수재를 면케 하리니 근심 걱정하지 말지어다」고 이르시니 내리던 비가 개는지라. 명칠이 산전에 뛰어 올라가 보니 다른 사람의 밭은 모두 사태가 났으나 자기 밭만은 조금도 피해가 없었도다. 명칠은 새삼스럽게 상제를 공경하는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느니라.
六월 중복날 상제께서 대흥리 부근 접지리(接芝里) 마을에서 경석을 비롯하여 여러 종도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중복인 오늘에 뇌성이 울리지 않으면 농작물에 충재의 해가 있으리라.」 날이 저물도록 우렛소리가 없기에 상제께서 하늘을 향하여 「어찌 생민의 재해를 이렇게도 좋아하느뇨」고 꾸짖으시고 종도에게 마른 짚 한 개만 가져오게 하시고 그것을 무명지에 맞추어 잘라서 화롯불에 꽂고 다 태우시니라. 갑자기 번개가 북쪽에서만 번쩍이니 다시 상제께서 「북쪽 사람만 살고 타곳 사람은 죽어야 옳으냐」고 하늘을 향하여 꾸짖는 듯이 소리를 치시니 사방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쳤도다.
한여름에 정읍의 버들리에서 젊은 여자가 범에게 물려 갔는데 이 도삼이 정읍 수통목에 계시는 상제를 찾아뵈옵고 그 일을 아뢰니라. 상제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공우에게 「하늘에 좀성이 나타났는가 보라」 하시니 공우가 밖에 나갔다 들어와서 나타나 있음을 아뢰니 상제께서 베고 계시던 목침으로 마룻장을 치시며 「좀성아, 어찌 무고히 사람을 해하느뇨」고 꾸짖으셨도다. 이튿날에 그 여자가 몸에 조그마한 상처만을 입고 살아 돌아왔느니라.
가뭄이 심할 때에 비를 내리게 하시고 청수동이에 소변을 조금 타서 오곡을 잘 되게 하시고 충재가 있을 때에 청수동이에 고춧가루를 풀어 넣고 충재를 없앴도다.
정 태문(鄭泰文)이 정미년에 용암리에 살고 있는 김 사유(金士有)의 물방앗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태문이 상제와 함께 여러 날 한 방에서 지낼 영광스러운 기회를 가졌도다. 그 시절에 태문이 토질로 신고하여 고쳐주시기를 청하니 상제께서 허락만 하시고 고쳐주지 아니 하시더니 어느 날 태문에게 「네가 병을 고치려 하느뇨」 물으시기에 태문이 소원임을 아뢰니 상제께서 「내가 이틀 후에 정읍으로 가리니 이제 고쳐주리라」 말씀하시고 글을 써 주시면서 「이 글을 네 침실의 베개 위에 두고 자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방문을 열라. 그러면 개가 방문을 향하여 두 앞발을 모으고 혈담을 토하리라. 곧 네 병을 개에게 옮겼느니라」 이르셨도다. 태문은 이르신 대로 결과가 나타난 것에 새삼 경탄하니라. 태문이 상제를 술집에 모시고 술을 올리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술을 마시고 술값을 바로 갚지 않으면 먹지 아니함만 못하니라.」 태문이 「내일 틀림없이 갚으려 하나이다」고 여쭈니라. 술값은 일곱 냥이었도다. 이튿날 상제께서 정읍으로 떠나신 뒤에 태문이 술값을 천천히 치르려고 생각하더니 별안간 복통을 일으키는지라. 그제서야 마음을 돌리고 꼭 갚으리라 결심하니라. 복통도 가라앉아 술값을 바로 갚았도다.
1908년
무신년 원조에 경무관이 죄수에게 주식을 한 상씩 나누어 주기에 모든 종도는 「주식을 나누어 주니 이제 죽이려는 것이로다. 우리는 상제를 따르다가 결국 죽게 되는도다」고 한층 더 상제를 원망하였도다.
이날에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냉혹하였도다. 「이것은 대공사를 처결한 까닭이노라」 하시니라. 경무관이 여러 사람을 취조하여도 아무 증거가 없으므로 상제를 광인으로 취급하여 옥중에 남기고 정월 十일에 옥문을 열어 여러 사람을 석방하였도다.
출옥한 종도들은 제각기 집에 돌아갔으나 경석은 고부에 와서 상제의 출옥을 二월 四일 경칩일(驚蟄日)까지 기다려 상제를 맞이하여 객망리 본댁으로 모시고 형렬은 상제께서 출옥하심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고 동곡으로 돌아갔도다.
화난이 있은 후 어느 날 상제께서 문 공신의 집에 가시니 공신이 불쾌한 어조로 불평을 털어놓느니라. 「일전에 고부 음식점의 주인이 나에게 와서 외상으로 달린 주식대를 갚으라는 독촉을 하였는데 생각컨대 고부화액 때 가지고 갔던 백목과 돈을 흩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 음식 값을 갚지 아니하셨나이까.」 상제께서 묵묵히 들으시고 가라사대 「네 말을 들으니 그러하리로다. 순창 농암에 사흘 동안 계속 머물면서 너를 만나 여러 가지 큰 공사를 참관케 하였고 또한 고부 도수에 감당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 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으니 남의 돈을 따 보지도 못하고 제 돈만 잃고 바닥이 난 후에야 개평을 뜯어가지고 새벽녘에 본전을 회복하는 수가 있음을 말함이니라. 고부에서 음식 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그때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면 달리 주선이라도 하여 주었으리라」 하시니 공신이 잠잠히 듣고만 있다가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 진대 그만두사이다」 하니라. 상제께서는 동곡으로 돌아가셨도다.
고부화액 때 체포되었던 二十여 명의 종도 중에 김 형렬ㆍ김 자현 두 사람밖에 남지 않고 다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도다.
경석(京石)의 아우 윤경(輪京)이 구릿골에 계시는 상제를 찾아와서 배알하는도다. 상제께서 「천지에서 현무가사를 부르니 네 형의 기운을 써야 할지니 네 형에게 구설인후(口舌咽喉)를 움직이지 말고 동학의 시천주(侍天呪)를 암송하되 기거동작에 잠시도 쉬지 말게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안 필성이 상제를 모시기를 기뻐하여 종종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어느 날 그가 동곡(銅谷) 앞 팥거리에서 상제를 만나 대접하려고 하는지라. 상제께서 그 뜻을 알아차리시고 「내가 반찬을 마련하리라」 하시고 못을 휘어서 낚시를 만들어 팥거리 근처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 던지시니 잉어와 가물치가 걸렸도다. 이것으로써 반찬을 만들어 잡수시면서 필성과 함께 한때를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장 성원(張成遠)에게 글을 써서 봉하여 주시면서 훗날에 보라고 이르셨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도다.
蔣驕者敗 見機而作
하루는 김 송환(金松煥)이 상제께 여쭈기를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나이까.」 상제께서 「있느니라」고 대답하시니라. 또 그가 여쭈기를 「그 위에 또 있나이까.」 상제께서 「또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도다. 이와 같이 아홉 번을 대답하시고 「그만 알아두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후일에 그를 만사불성(萬事不成)이라 평하셨나니라.
상제께서 김 송환에게 시 한 수를 외워 주셨도다.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石上梧桐知發響 音中律呂有餘和
口傳三代詩書敎 文起春秋道德波
皮幣已成賢士價 賈生何事怨長沙
상제께서 무신년 초에 본댁에서 태인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자주 태인에 머물고 계신 것은 도창현(道昌峴)이 있기 때문이었나니라. 그곳에 신 경원(辛京元)ㆍ최 내경(崔乃敬)ㆍ최 창조(崔昌祚)ㆍ김 경학(金京學) 등의 종도들이 살고 있었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식사 시간이 지나서 최 창조의 집에 이르셨도다. 그의 아내는 상제께서 드나드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노라. 이날도 밥상 차리기를 싫어하는지라. 상제께서 창조에게 가라사대 「도가에서는 반드시 아내의 마음을 잘 돌려 모든 일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순종하여야 복되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아내가 문밖에서 엿듣고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속마음을 보신 듯이 살피심에 놀라 마음을 바로 잡으니라.
상제께서 최 창조의 집에서 종도 수십 명을 둘러앉히고 각기 세 글자씩을 부르게 하시니라. 종도들은 천자문의 첫 글자부터 불러오다가 최 덕겸(崔德兼)이 일(日) 자를 부를 때 상제께서 말씀하시니라. 「덕겸은 일본왕(日本王)도 좋아 보이는가보다」 하시며 「남을 따라 부르지 말고 각기 제 생각대로 부르라」 이르시니라. 이튿날 밤에 상제께서 덕겸으로 하여금 담뱃대의 진을 쑤셔 내되 한 번 잡아 놓치지 말고 뽑아서 문밖으로 버리게 하시니 그는 말씀하신 대로 진을 바깥에 버리자 온 마을의 개가 일시에 짖는도다. 덕겸이 신기하게 느껴 「어찌 개가 일제히 짖나이까」라고 여쭈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대신명(大神明)이 오는 까닭이니라.」 그가 「무슨 신명이니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시두손님이니 천자국(天子國)이라야 이 신명이 들어오나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공우를 데리시고 태인 보림면 장재동을 지나는 길가에서 묘(墓)를 보시고 공우에게 이르시니라. 「이 혈(穴)은 와우형(臥牛形)이나 금혈형(琴穴形)이라고 불리우니라. 그것은 혈명을 잘못 지어서 발음(發蔭)이 잘못되었느니라. 어디든지 혈명을 모르거든 용미(龍尾) 없이 조분(造墳)하였다가 명사에게 혈명을 지은 뒤에 용미를 달면 발음이 되나니라」 하셨도다.
종도들이 二월의 따뜻한 어느 날 상제와 함께 보리밭 길을 지날 때 「이 세상에 빈부의 차별이 있는지라. 곡식 중에 보리가 있어 그것을 먹을 때마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있으니 보리를 없애야 먹는 데에나 차별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리라」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니라. 상제께서 이야기를 수긍하시는 태도를 취하셨도다.
상제께서 전주 김 준찬(金俊贊)의 집에 가셔서 김 덕찬(金德贊)ㆍ김 준찬(金俊贊)ㆍ김 낙범(金落範)들과 좌석을 함께 하시다가 가라사대 「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고 알리셨도다.
덕찬은 백지 한 장에 칠성경을 쓰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시기에 그 글과 모양의 크고 작음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의 뜻대로 쓰라」 하시므로 덕찬이 양지 한 장에 칠성경을 가득 차게 쓰고 나니 끝에 가서 석 자 쓸 만한 곳이 남으니라. 상제께서 그 여백에 칠성경(七星經)이라고 석 자를 쓰신 후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공우를 데리시고 구릿골에 이르시니라. 도중에서 상제와 그는 한 장군이 갑주 차림에 칼을 짚고 제비산 중턱에 서 있는 것을 보았도다. 상제께서 구릿골에 이르셔서 김 준상(金俊相)의 집에 머무시니라. 어떤 사람이 김 준상을 잡으려고 이 밤에 구릿골에 온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전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태연히 계시다가 저녁 무렵에 형렬의 집으로 가시니라. 여러 종도들이 준상의 집에서 잠자는데 공우는 뒷산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던 터에 원평(院坪) 쪽으로부터 등불을 가진 사람 대여섯이 구릿골을 향하여 오다가 선문(旋門)에 이르렀을 때 등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되돌아가 종도들을 깨워서 함께 피신하려고 하나 곤히 잠든 사람들이 좀처럼 깨지 않았도다. 그러나 한 식경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으므로 안심하고 그는 잠에 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그에게 「대장은 도적을 잘 지켜야 하나니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가라사대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터이니 나의 말을 믿을지어다. 너는 광인이 되지 못하였으니 농판으로 행세함이 가하니라」 하시니라.
四월에 들어 심한 가뭄으로 보리가 타니 농민들의 근심이 극심하여지는도다. 종도들도 굶을 걱정을 서로 나누니 상제께서 「전일에 너희들이 보리를 없애버림이 옳다 하고 이제 다시 보리 흉년을 걱정하느냐. 내가 하는 일은 농담 한 마디라도 도수에 박혀 천지에 울려 퍼지니 이후부터 범사에 실없이 말하지 말라」고 꾸짖으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전주 용머리 고개 김 낙범에게 들러 거친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을 보고 「빈민의 음식이 이러하니라」고 하시면서 다 잡수셨도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큰 비가 내리니 말라죽던 보리가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도다.
상제께서 四월 어느 날 정 괴산의 주막에서 상을 받고 계셨는데 전에 고부(古阜) 화란 때 알게 된 정(鄭) 순검이 나타나 돈 열 냥을 청하는 것을 거절하시자 그는 무례하게 상제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돈 열 냥을 빼앗아 갔도다. 이 방약무인을 탄식하시고 상제께서 그를 한탄하셨도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다시 전주에서 서신으로 돈을 청하여 오니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돈 열 냥을 구하여 보내시니라. 며칠 지낸 뒤에 정 순검이 고부로 돌아가던 중 정읍의 어느 다리에서 도적들에게 맞아 죽으니라. 이 소식을 전하여 들으시고 상제께서 「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이거늘 도리어 도적질을 하여 도적에게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어찌 범상한 일이리오」 하시고 다시 한탄하셨도다.
무신년 四월 어느 날 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전주 불가지(佛可止) 김 성국(金成國)의 집에 가 계실 때의 어느 날 김 덕찬을 불러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는 그 말씀을 귓가로 들었도다. 이것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덕찬에게 「이제 용소리 김 의관(金議官)의 집에 가서 자고 오너라」고 이르시니 그는 명을 좇아 용소리로 떠나느니라. 그가 김 의관의 집 근처에서 취한으로부터 심한 곤욕을 당하고 불가지로 돌아오니라. 상제께서 문 바깥에 나와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왜 자지 않고 되돌아오느냐」고 물으시니라. 덕찬이 공연히 보내어 봉변만 당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도다. 상제께서 덕찬과 함께 방안에 들어오셔서 술을 권하며 가라사대 「사람과 사귈 때 마음을 통할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속이느냐」 하시니 그는 상제를 두려워하니라. 그 후부터 덕찬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언행을 삼갔도다. 상제께서 두 달 동안 용소리 시목정(龍巢里柿木亭)에 계시면서 이곳저곳의 종도들의 집에 다니셨도다.
손 병욱(孫秉旭)은 고부 사람인데 상제를 지성껏 모셨으나 그의 아내는 상제의 왕래를 불쾌히 여기고 남편의 믿음을 방해하였도다. 어느 날 병욱의 아내가 골절이 쑤시고 입맛을 잃어 식음을 전폐하여 사경에 헤매게 되었느니라. 공우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제께 아뢰면 고쳐 주시리라고 믿었도다.
그 후 어느 날 공우가 정읍에 가서 상제를 모시고 와룡리(臥龍里) 네거리에 이르렀도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회룡리(回龍里)가 있고 이곳에 신 경수(申京洙)가 살고 서북쪽 교동에 황 응종(黃應鍾)이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네거리 복판에서 공우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시니 공우가 「저희 집으로 가시옵소서」 하고 청하니 상제께서 세 번이나 되물으시므로 공우도 세 번 한결같이 대답하니라. 그러나 상제께서 먼저 응종의 집에 들르셨다가 곧 공우를 데리시고 병욱의 집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병욱에게 돈 서돈을 청하시기에 그가 올리니 그것을 공우에게 간수하게 하시고 또 두 냥을 병욱으로부터 받아서 다시 그에게 그것을 갈무리하게 하신 후에 병욱의 아내를 불러 앞에 앉히고 「왜 그리하였느냐」고 세 번 되풀이 꾸짖고 외면하시면서 「죽을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혼자 말씀을 하시니라. 병욱이 상제께 공양할 술을 준비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나 먹을 술은 있으니 준비하지 말라」 이르시니라. 병욱의 장모가 상제께서 오신 것을 알고 술과 안주를 올리니 상제께서 그 술을 드셨도다.
응종의 집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새벽에 구릿골로 행차하셨도다. 가시는 도중에 공우에게 「사나이가 잘 되려고 하는데 아내가 방해하니 제 연분이 아니라. 신명들이 없애려는 것을 구하여 주었노라. 이제 병은 나았으나 이 뒤로 잉태는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과연 그 후부터 그 아내는 잉태하지 못하였도다.
김 병계(金炳啓)가 열여섯 살 때 손바래기 앞에 있는 초강(楚江)의 들판 길로 오다가 진창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상제께서 손바래기로 오시던 길에 이것을 보고 뛰어들어 그 아이를 팔에 꼭 끼고 쏜살같이 들을 건너 손바래기에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병계를 데리고 본댁에까지 가셔서 모친을 뵈었도다. 새 버선을 갈아 신으려는데 그것이 쭉 찢어지기에 다른 새것을 한 손으로 신으셨도다. 그리고 부엌에 걸려 있던 쇠고기를 모두 회로 만들어 잡수신 후에 병계를 보고 그놈 쓸 만한 줄 알았더니 하시고 돌려보내시니 그제서야 그 아이는 허둥지둥 돌아가니 이 아이가 나중에 덕천 면장이 되었도다.
훗날에 윤경이 상제를 찾아뵈옵고 고부인(高夫人)과 희남(熙南)의 병세를 알리니라. 소식을 듣고 상제께서 「내일 살포정에 가서 나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윤경은 이튿날 살포정으로 갔으나 상제를 뵈옵지 못하여 바로 태인 소퇴원 주막으로 가니라. 주막 주인이 윤경의 물음에 「선생님께서 윤경을 새울로 보내라」고 전하니 그는 새울로 떠나가니라.
그는 도중에서 일병 수백 명을 만나 검문을 받았으나 가환으로 의사를 모시러 가는 길이라고 알리니 저희들이 모두 물러가는도다. 윤경이 새울에 가서 상제께 배알하니 상제께서 「오늘은 병세가 어떠냐」고 물으시니라. 윤경이 「집에서 일찍이 떠났으므로 잘 모르나이다」고 아뢴즉 상제께서 「네가 무엇하러 왔느냐」고 꾸짖으시니 윤경은 몸 둘 바를 모르더라. 이날 밤에 상제께서 윤경으로 하여금 밤이 새도록 문밖을 돌게 하셨도다. 윤경이 졸음을 달래면서 돌고 있는 중에 첫닭이 울더니 상제께서 문밖으로 나오셔서 「네가 졸리지 않느냐」고 물으시기에 윤경이 「졸리지 아니하나이다」고 여쭈니 「그럼 나와 함께 백암리(白岩里)로 가자」하시고 길을 떠나시니라. 김 자현도 따라 백암리 김 경학의 집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다시 정읍으로 갔도다. 상제께서 일행을 앞세우기도 하고 뒤에 따르게도 하시면서 얼마동안 가시다가 「일본 사람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정읍 노송정(老松亭)에 이르셨을 때 「좀 지체하였다가 가는 것이 가하다」 하시고 반 시간쯤 쉬시니라. 일행은 노송정의 모퉁이에 있는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일본 기병이 이곳으로 오다가 이곳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간 많은 말 발자국을 보았도다. 이때 상제께서 「대인의 앞길에 저희들이 어찌 감히 몰려오리오」라고 외치셨도다. 옆에 있던 윤경이 행인으로부터 수십 명의 일본 기병이 이곳에 달려왔다가 딴 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라. 상제께서 대흥리에 이르셔서 고부인과 희남의 병을 돌보시니라. 그들은 병에서 건강한 몸을 되찾았도다.
상제께서 무신년 어느 날 고부인에게 「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고 말씀하시니 부인이 대하여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고 대답하였도다.
이 대답을 듣고 상제께서 글 한 수를 지으셨도다.
無語別時情若月 有期來處信通潮
그리고 고부인에게 다시 가라사대 「내가 없으면 여덟 가지 병으로 어떻게 고통하리오. 그 중에 단독이 크리니 이제 그 독기를 제거하리라」 하시고 부인의 손등에 침을 바르셨도다.
다시 「크나큰 살림을 어찌 홀로 맡아서 처리하리오」라고 말씀을 하시니 고부인은 상제께서 멀리 외방으로 출행하시려는 것으로 알았도다.
六월에 이르러서도 가뭄이 계속되어 곡식이 타 죽게 됨에 김 병욱이 김 윤근(金允根)으로 하여금 상제께 이 사정을 전하게 하니라. 사정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덕찬에게 그의 집에서 기르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고 종도들과 함께 그것을 잡수셨도다.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윤근은 「선생이 곧 만인을 살리는 상제시니라」고 고백하였도다.
六월 어느 날 밤에 도적이 백 남신(白南信)의 친묘를 파고 두골을 훔쳐갔도다. 김 병욱이 사람을 보내어 상제께 이 소식을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촛불을 밝히시고 밤을 새우기를 초상난 집과 같이 사흘을 지내시고 난 후 남신에게 「두골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한적한 곳에 거처하되 다른 사람의 왕래를 끊고 기다리면 처서절에 그 도적이 두골을 가져오리라」고 전하게 하시니라. 남신은 백운정(白雲亭)에 거처하면서 명을 좇으니라. 七월에 접어들면서 친산의 아래 동리의 어른이 마을 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친산 밑에 사는 사람으로서 굴총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두루 찾고 그것을 찾는 사람에게 묘주의 상을 후하게 주기로 결의하였느니라. 마을 사람들이 각방으로 찾는 도중에 두골을 가지고 마을 어른을 찾는 동리 한 사람이 나타난지라. 그 어른이 이 사람을 데리고 백운정에 있는 묘주를 찾으니라. 그날이 곧 처서절이었도다. 그런데 두골을 찾았다는 자가 도적의 누명도 벗고 상도 탈 욕심으로 동리의 어른을 찾았도다.
병욱이 용두치(龍頭峙) 주막에 계시는 상제를 찾아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그 도적을 어떻게 하려느냐」고 물으시므로 병욱이 「이미 경무청에 보냈나이다」고 여쭈니 가라사대 「사람을 잘 타일러서 돌려보낼 일이거늘 어찌 그렇게 하였느뇨. 속히 푸른 의복 한 벌을 지어 오라.」 병욱이 명하심을 남신에게 전하니 남신은 푸른 의복 한 벌을 상제께 올렸도다. 상제께서 그 옷을 불사르시고 「이것으로써 그 사람을 징역에나 처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니라.
훗날에 종도들이 처서날에 찾게 된 연유를 여쭈어 보았더니 「모든 사사로운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 두면 도수에 따라서 공사가 다 풀리니라」고 이르셨도다.
차 경석이 상제를 섬긴 후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아 집안 형편이 차츰 기울어져 가니라. 그의 아우 윤칠이 「선생을 따르면 복을 받는다더니 가운이 기울기만 하니 허망하기 짝이 없소이다. 직접 제가 선생을 뵈옵고 항의하리이다」고 불평을 털어놓고 상제를 만나러 가는 중로에서 큰 비를 만나 옷을 푹 적시고 동곡에 이르러 상제를 뵈온지라. 상제께서 그를 보시고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이 부근에 의병이 자주 출몰하기에 관군이 사방을 수색하고 있는 중인데 너의 비를 맞은 행색을 보면 의병으로 오인하고 너에게 큰 화난이 닥치리니 어서 다른 곳에 가서 숨었다가 부르거든 나오라」 이르시고 그를 다른 곳에 숨게 하셨도다.
그리고 형렬에게 윤칠을 오게 하고 그를 만나 돈 석 냥을 그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수일 후에 정읍으로 갈 터이니 네가 빨리 가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라」 하시니라. 윤칠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니라. 수일 후에 상제께서 고부 와룡리에 가셔서 경석에게 사람을 보내어 고부 학동(學洞)으로 오라고 전하게 하셨도다. 경석이 전하여 듣고 이튿날 황망히 학동에서 상제를 뵈오니 가라사대 「내가 윤칠이 두려워서 너의 집으로 가기 어려우니 이 일극(一極)을 가져가라」 하시고 돈 열닷 냥을 주시니 경석이 돈을 받아들고 여쭈기를 「무슨 일로 그렇게 엄절하신 말씀을 하시나이까」 하니 상제께서 「일전에 윤칠이 동곡에 온 것을 보니 살기를 띠었는데 돈이 아니면 풀기가 어려우므로 돈 석 냥을 주어 돌려보낸 일이 있었느니라」고 알려주셨도다.
상제께서 인사를 드리는 김 갑칠(金甲七)에게 농사 형편을 물으시니 그는 「가뭄이 심하여 아직까지 모를 심지 못하여 민심이 매우 소란스럽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네가 비를 빌러 왔도다. 우사(雨師)를 너에게 붙여 보내리니 곧 돌아가되 도중에서 비가 내려도 몸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시니라. 갑칠은 발병 때문에 과히 좋아하지 아니하니라. 상제께서 눈치를 차리시고 「사람을 구제함에 있어서 어찌 일각을 지체하리오」 하시고 가기를 독촉하시니라. 갑칠이 서둘러 돌아가는 길에 원평에 이르러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도다. 잠깐사이에 하천이 창일하여 나무다리가 떠내려가게 되니라. 행인들은 모두 단비라 일컬으면서 기뻐하는도다. 흡족한 비에 모두들 단숨에 모를 심었도다.
상제께서 무신년 七월에 구릿골 약방에 계실 때 양지에 글을 쓰시더니 전 간재(田艮齋)의 문도(門徒) 五ㆍ六명이 대립(大笠)을 쓰고 행의를 입고 나와서 「선생님 뵈옵겠습니다」 하며 절을 하기에 상제께서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선생이 아니로다」 하시며 절을 받지 아니하시니 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섰다가 물러갔도다.
또 한번은 음양(陰陽) 두 글자를 써서 약방 윗벽에 붙이고 그 위에 백지를 덧붙이고 「누가 걸리는가 보라」 하시니라. 한참 후에 「나약한 자가 걸렸다」고 말씀하셨도다.
또 어느 날 낙양의 들 근방을 지나실 때 황소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시고 가까이 다가가서 뿔을 두 손으로 하나씩 잡고 소귀에 무슨 말씀을 이르시니 소들이 흩어져 가는도다.
상제께서 여러 종도를 데리고 익산리를 거쳐 나루터에 이르시니 사공은 없고 빈 배만 있는지라. 상제께서 친히 노를 저어 건너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시니라. 종도들이 우러러보니 이상한 서운이 노를 저어 하늘을 건너가는 모양을 이루었도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상제께서 김 병욱의 집에 들르시니 종도들이 많이 모여 있었도다. 병욱이 아내에게 점심 준비를 일렀으되 아내는 무더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여 괴로워하면서 혼자 불평을 하던 차에 갑자기 와사증에 쓰러지는지라. 이 사정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는 그 여인의 불평이 조왕의 노여움을 산 탓이니라」 하시고 글을 써서 병욱에게 주시면서 아내로 하여금 부엌에서 불사르게 하셨도다. 아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서 그대로 행하니 바로 와사증이 사라졌도다.
무신년 여름에 문 공신이 동곡에 와서 상제께 배알하니라. 그 자리에서 상제께서 그를 보고 「네가 허물을 뉘우치고 습성을 고치지 아니하면 앞날에 난경이 닥쳐오리라」고 꾸짖고 타이르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공신에게
「대천일해(大天一海)에 무근목(無根木)이 떠 있고 가지는 열두 가지 잎은 三百六十 잎이 피었으니 뚜렷이 일월(日月)이 희도다. 九ㆍ十월 세단풍(細丹楓) 바람잡아 탄금(彈琴)하니 슬프다 저 새소리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를 일삼더라」는 시조 한 수를 외워주셨도다.
상제께서 경석의 집에 머물고 계시다가 동곡에 이르셨도다. 한 공숙(韓公淑)이 어느 날 상제를 배알하러 온지라. 상제께서 그와 술을 나누시다가 「일을 많이 하였도다」고 말씀을 건네시면서 친히 술을 따르셨도다. 그는 황송하여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제가 무슨 일을 하였다고 하시나이까. 하여 드린 바가 없사옵니다」고 여쭈면서 받은 잔을 마셨도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지난 밤 꿈을 꾸었나이다」고 여쭈는지라. 그 말을 상제께서 받으시고 「일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뜻하노라」고 가르치시니라.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이 모두 공숙의 꿈을 궁금하게 여기는지라. 공숙이 「상제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천하 호구(戶口)를 성책(成冊)하여 오라 명하시기에 오방신장을 불러서 성책하여 상제께 올렸나이다」고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공우(公又)를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공우에게 우산을 사서 들게 하셨도다.
공우는 상제께서는 원래 우산을 받는 일이 없었고 비록 비오는 날 길을 가실지라도 비가 몸에 범하는 일이 없었던 일을 생각하여 이상히 여기더니 뜻밖에 비가 오는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우산을 받으라 하시니 공우는 상제께 받으시길 청하여 서로 사양하다가 함께 비를 맞아 옷이 흠뻑 젖으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뒤로는 우산을 들지 말라. 의뢰심과 두 마음을 품으면 신명의 음호를 받지 못하나니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차 경석ㆍ김 광찬ㆍ황 응종을 앞에 세우고 공우에게 몽치를 들게 하고 윤경에게 칼을 들리고 「너희가 이 이후에도 지금의 스승을 모시고 있듯이 변함이 없겠느냐. 변함이 있으면 이 몽치로 더수구니를 칠 것이오. 이 칼로 배를 가를 것이니라」고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시기도 하셨다.
또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옛적에 한 농부가 농한기인 이른 봄에 쉬지 않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 논에 수원지의 물이 잘 들어오도록 봇돌을 깊이 파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고 공연한 노력이라고 비소하더니 이해 여름에 날이 무척 가물어 그 들판이 적지가 되었으나 봇돌을 파 놓은 그 농부는 아무 근심 없이 물을 대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으니 이런 일을 명심해 두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종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초목 중에 一년에 자라는 것에 무엇이 제일 많이 자라느뇨」 물으시니 종도들이 「대(竹)」라고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그 기운이 만물에 특장하니 감하여 쓰리라」 하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이 해의 대는 잘 자라지 않았도다.
이해 가을 어느 날 상제께서 안 내성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고 밖으론 공사를 받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 안으론 선령의 향화와 봉친 육영을 독실히 하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시도다.
상제를 뵈옵고 인사(人事)를 묻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그런 사람을 대하실 때마다 당사자와 심부름으로 온 사람과의 관계를 물으시니라. 일가나 친척이 되지 않으면 그 부형과의 관계를 물으시고 아무 관계가 없으면 「관계없는 사람이 어찌 왔느뇨」 하시면서 돌려보내시곤 하셨도다.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공신을 대동하고 고부로 가시다가 행로에 「아는 벗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운산리(雲山里)에 신 경수가 있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공신의 인도로 경수의 집에 들르셔서 마루에 앉아 글을 써서 불사르고 공신에게 집에 다녀오게 하셨도다. 공신이 집에 가니 일진회의 간부 송 대화(宋大和)가 와 있도다. 공신은 대화를 치송하고 운산리에 되돌아오니 상제께서 「있더냐」고 물으시기에 그는 「예. 그가 있어서 치송하였나이다」고 대답하였도다.
이후에 백암리에서 상제를 박 공우와 신 원일이 모시고 있었도다. 이때 종도 김 경학의 천거로 김 영학(金永學)이 상제를 배알하였을 뿐 상제께서 이레 동안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도다. 영학이 매우 불만을 품기에 공우와 원일이 그에게 「그대가 상제께 삼가 사사하기를 청하면 빨리 가르쳐 주시리라」고 일러주니 그때야 그는 사사하기를 청하니 상제로부터 승낙을 얻었느니라. 그런데 상제께서 갑자기 그를 꾸중하시는도다. 영학은 두렵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문밖으로 나가니라. 상제께서 영학을 불러들여 「너를 꾸짖는 것은 네 몸에 있는 두 척신을 물리쳐 내려 하는 것이니 과히 불만을 사지 말라」고 타이르셨도다. 영학이 「무슨 척이니까. 깨닫지 못하겠나이다」고 되물은즉 「너는 열여덟 살 때 살인하고 금년에 또 살인하였나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회상을 촉구하시니 그는 옛일을 더듬었도다. 「그 나이 때에 제가 남원(南原)에서 전주 아전과 말다툼하다가 그의 무례한 말에 분격하여 그에게 화로를 던져 머리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것으로써 신음하다가 그 이듬해 三월에 죽었나이다. 또 금년 봄에 장성(長城) 다동(多洞)에서 사는 외숙인 김 요선(金堯善)이 의병으로부터 약탈을 당하여 의병대장 김 영백(金永白)을 장성 백양사(長城白羊寺)로 찾아가서 그 비행을 꾸짖으니 그 대장은 외숙에게 사과하고 그 의병을 찾아 총살하였나이다」고 영학이 이 두 가지 일을 아뢰었도다.
종도들이 때때로 부자를 종도로 천거하면 상제께서 이것을 제일 괴로워하시니라. 종도들이 천거한 부자가 상제를 찾아오면 상제께서 먼저 그 사람이 오는 길가의 주막에 가셔서 그를 만나 횡설수설하셔서 그가 스스로 물러가게 하셨도다. 종도들이 이 일을 항상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참에 그 연고를 여쭈니 가라사대 「부자는 자신이 가진 재산만큼 그자에게 살기가 붙어있느니라. 만일 그런 자를 문하에 둔다면 먼저 그 살기를 제거하여 그 앞길을 맑게 해 주어야 할 터이니 그러자면 많은 시간이 낭비되고 공사에 막대한 지장이 오느니라. 그런 자 중에도 나를 알아보고 굳이 따르겠다는 지혜로운 자에게는 할 수 없이 허락할 뿐이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김 자현의 집에 계실 때 상제께서 자현을 불러 가라사대 「네가 공신의 집에서 여러 날을 숙식하였으니 공신을 네 집에 데려다가 잘 대접하라」 하시니라. 자현이 깜박 잊고 대접할 기회를 놓치니라. 상제께서 그에게「잘못된 일이라, 이 뒤로는 대접하려고 하여도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그 후 그들 두 사람은 과연 서로 만나지 못하였도다.
공우가 항상 술을 과음하여 주정이 심하거늘 하루는 상제께서 공우를 불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술을 비교하리라」 하시고, 상제께서 술을 많이 권하시다가 갑자기 「너는 한 잔 술밖에 못된다」 하시니 그 뒤로는 공우가 한 잔만 마셔도 바로 취하여 더 마시지 못하였도다.
경석이 손수 가물치를 잡아 회를 쳐서 상제께 올리니 잡수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께서 문밖을 걸으시면서 하늘을 향하여 「생선의 기운이 발하는도다」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도다. 가물치 모양의 구름이 동쪽으로 움직였도다.
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 그러나 고한 뒤에 다시 걱정하면 상제께서 「내가 이미 알았으니 무슨 염려가 있느냐」고 종도들을 위로하셨도다.
상제께서 태인 새울에 계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박 공우를 경석에게 보내어 그를 오게 하시니 경석이 와서 뵙느니라. 상제께서 그에게 돈을 주시며 「돌아가서 쌀을 팔아 놓아라」 명하시니라. 그는 그 돈을 사사로이 써 버렸도다. 그 뒤에 상제께서 댁으로 돌아가셔서 부인에게 「쌀을 많이 팔았느냐」고 물으시니 부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경석을 불러 물으시니 경석은 그 돈을 부인에게 드리지 않았음을 고백하였도다. 이후로부터 상제께서 모든 일을 경석에게 부탁하지 아니하고 바로 고부인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경석에게 검은색 두루마기 한 벌을 가져오라 하시고 내의를 다 벗고 두루마기만 입으신 후에 긴 수건으로 허리를 매고 여러 사람에게 「일본 사람과 같으냐」고 물으시니 모두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 사람과 꼭 같사옵나이다」 하노라. 상제께서 그 의복을 다시 벗고 「내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이웃 아이와 먹으로 장난을 하다가 그 아이가 나에게 지고 울며 돌아가서는 다시 그 서당에 오지 않고 다른 서당에 가서 글을 읽다가 얼마 후 병들어 죽었도다. 그 신이 원한을 품었다가 이제 나에게 해원을 구하므로 그럼 어찌 하여야 하겠느냐 물은즉 그 신명이 나에게 왜복을 입으라 하므로 내가 그 신명을 위로하고자 입은 것이니라」고 이르셨도다.
김 광찬(金光贊)이 어느 날 개벽공사가 속히 결정되지 않으므로 모든 일에 불평을 털어놓고 「나는 자살하겠노라」고 말하여 좌석을 흐리게 하니라. 상제께서 좌중을 보시고 「모든 일에 때가 있나니 마음을 돌려 어리석음을 벗으라. 너희는 죽는 일을 장차 나에게서 보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광찬이 불만을 품은 것을 심히 괴롭게 여기셔서 형렬에게 이르시니라. 「광찬이 자살하려는 것은 제가 죽으려는 것이 아니요 나를 죽으라는 것이니라. 내가 정읍으로 가리니 이 길이 길행이라. 뒷일은 네게 통지하리라.」 二十八일에 상제께서 공우(公又)를 데리시고 동곡을 떠나 정읍 경석의 집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경석에게 이르시니라. 「네가 모든 일에 귀찮고 뜻에 맞지 아니하니 내가 이 세상을 버릴 수밖에 없다. 세상을 떠나기는 극히 쉬운 일이라. 몸에 있는 정기를 흩으면 불티가 사라지듯이 되나니라.」 그리고 바로 베개를 베고 누우시니 경석이 놀라면서 말하되 「어찌 하시는 일이오니까. 비록 불초하오나 모든 일을 명하심을 좇아 수화라도 피치 아니하겠나이다. 걱정을 푸시옵소서」 하고 맹서하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능히 내 명을 좇을 수 있느냐」 하시며 재삼 다짐을 받으시고 일어나셨도다.
무신년 七월에 이르러 상제께서 원일을 이끄시고 부안 변산 우금암(遇金岩) 아래에 있는 개암사(開岩寺)에 가시니라. 그때 상제께서 원일에게 삶은 쇠머리 한 개와 술 한 병과 청수 한 그릇을 방안에 차리고 쇠머리를 청수 앞에 진설하게 하신 후에 원일을 그 앞에 꿇어 앉히고 성냥 세 개비를 그 청수에 넣으시니라. 이때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나고 홍수가 창일하는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이제 청수 한 동이에 성냥 한 갑을 넣으면 천지가 수국(水國)이 될지니라. 개벽이란 이렇게 쉬우니 그리 알지어다. 만일 이것을 때가 이르기 전에 쓰면 재해만 끼칠 뿐이니 그렇게 믿고 기다려라」고 일러 주시고 진설케 하신 것을 모두 거두니 곧 풍우가 그쳤도다.
상제께서 원일을 곧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셨도다. 원일이 집에 돌아와서 보니 자기 동생의 집이 폭우에 파괴되고 그 가족은 원일의 집에 피난하였도다. 원래 원일의 아우는 상제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언제나 불평을 품었도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당한 후부터 두려워서 무리한 언사를 함부로 쓰지 아니하였도다.
상제께서 무신년 봄 백암리 김 경학ㆍ최 창조의 두 집으로 왕래하시며 성복제와 매화(埋火) 공사를 보셨도다. 김 광찬의 양모의 성복제가 최 창조의 집에서 거행되었느니라. 창조는 상제의 지시에 좇아 돼지 한 마리를 잡고 그 고기에 계란을 입혀 전을 만들고 대그릇에 담아서 정결한 곳에 두고 또 상제의 분부에 따라 상제의 의복 한 벌을 지어 두었도다. 저육전이 다 썩었으므로 창조가 동곡으로 사람을 보내서 상제께 아뢰니 상제께서 그 사람을 좀 기다리게 하시고 형렬에게 이르시니라. 「네가 태인에 가서 최 내경ㆍ신 경원을 데리고 창조의 집에 가라. 오늘 밤에 인적이 없을 때를 기다려 정문밖에 한 사람이 엎드릴 만한 구덩이를 파고 나의 옷을 세 사람이 한 가지씩 입고 그 구덩이 앞에 청수 한 그릇과 화로를 놓고 작은 사기그릇에 호주를 넣고 문어 전복 두부를 각각 그릇에 담아 그 앞에 놓아라. 그리고 한 사람은 저육전 한 점씩을 집어서 청수와 화로 위로 넘기고 한 사람은 연달아 넘긴 것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받아서 구덩이 속에 넣고 흙으로 덮어라. 그리고 빨리 돌아오너라」고 일러주시니 형렬이 그대로 시행한 후 시급히 상제께 돌아가는 길에 돌연히 검은 구름이 일더니 집에 이르자 폭우가 쏟아지고 뇌전이 크게 치는지라. 상제께서 형렬에게 「이때쯤 일을 행할 때가 되었겠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행할 그 시간이 되었겠나이다」고 여쭈었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뒷날 변산 같은 큰 불덩이로 이 세계가 타 버릴까 하여 그 불을 묻었노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전 명숙과 최 수운의 원을 풀어주셨도다. 상제께서 피노리(避老里) 이 화춘(李化春)의 집에 이르셔서 그에게 누런 개 한 마리를 잡고 술 한 동이를 마련하게 하고 뒷산의 소나무 숲에서 가장 큰 소나무 한 그루와 남쪽 양달에 있는 황토를 파오게 하고 백지 넉 장을 청 홍 황의 세 색깔로 물들여서 모두 잇고 베어 온 소나무의 한 윗가지에 달게 하고 백지 석장에 각각 시천주를 쓰고 그 종이 석 장에 황토를 조금씩 싸서 함께 잇고 또 소나무 가지에 달고 그 나무를 집 앞에 세우시니 마치 깃대와 같은지라.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곳에서 전 명숙이 잡혔도다. 그는 사명기(司命旗)가 없어서 포한(抱恨)하였나니 이제 그 기를 세워주고 해원케 하노라.」 다시 상제께서 사명기 한 폭을 지어 높은 소나무 가지에 달았다가 떼어 불사르시고 최 수운을 해원케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공우에게 「고부에 가서 돈을 주선하여 오라」 하시더니 마련된 돈으로써 약방의 수리를 끝마치시고 갑칠로 하여금 활 한 개와 화살 아홉 개를 만들게 하시고 그것으로써 공우로 하여금 지천(紙天)을 쏘아 맞추게 하시고 가라사대 「이제 구천을 맞췄노라」 하시고 또 말씀을 잇기를 「고부 돈으로 약방을 수리한 것은 선인포전(仙人布氈)의 기운을 쓴 것이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인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리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
또 상제께서 가라사대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 이를 없애려면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여야 하고 이것이 이룩되면 천지는 개벽되고 선경이 세워지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각 처에서 정기를 뽑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강산 정기를 뽑아 합치시려고 부모산(父母山)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셨도다.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이니라. 회문산에 二十四혈이 있고 그 중에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이 있고 기변(碁變)은 당요(唐堯)가 창작하여 단주를 가르친 것이므로 단주의 해원은 오선위기로부터 대운이 열려 돌아날지니라. 다음에 네 명당(明堂)의 정기를 종합하여야 하니라. 네 명당은 순창 회문산(淳昌回文山)의 오선위기형과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의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과 장성(長城) 손룡(巽龍)의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과 태인(泰仁) 배례밭(拜禮田)의 군신봉조형(群臣奉詔形)이니라. 그리고 부안 변산에 二十四혈이 있으니 이것은 회문산의 혈수의 상대가 되며 해변에 있어 해왕(海王)의 도수에 응하느니라. 회문산은 산군(山君), 변산은 해왕(海王)이니라」 하시고 상제께서 그 정기를 뽑으셨도다.
상제께서 여름 어느 날에 황 응종의 집에서 산하의 대운을 거둬들이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상제께서 밤에 이르러 백지로 고깔을 만들어 응종에게 씌우고 「자루에 든 벼를 끄집어내서 사방에 뿌리고 백지 百二十장과 양지 넉 장에 글을 써서 식혜 속에 넣고 인적이 없을 때를 기다려 시궁 흙에 파묻은 후에 고깔을 쓴 그대로 세수하라」고 명하시니 그는 명하신 대로 행하였더니 별안간 인당에 콩알과 같은 사마귀가 생겼도다. 응종이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벼를 뿌린 것을 보았으나 한 알도 보이지 않고 없어졌도다.
이 도삼이 어느 날 동곡으로 상제를 찾아뵈니 상제께서 「사람을 해치는 물건을 낱낱이 세어보라」 하시므로 그는 범ㆍ표범ㆍ이리ㆍ늑대로부터 모기ㆍ이ㆍ벼룩ㆍ빈대에 이르기까지 세어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사람을 해치는 물건을 후천에는 다 없애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대흥리에서 三十장의 양지 책의 앞장 十五장마다 「배은망덕 만사신 일분명 일양시생(背恩忘德萬死神 一分明一陽始生)」을, 뒷장 十五장마다 「작지부지 성의웅약 일음시생(作之不止聖醫雄藥 一陰始生)」을 쓰고 경면주사와 접시 한 개를 놓고 광찬에게 가라사대 「이 일은 생사의 길을 정함이니 잘 생각하여 말하라」고 하시니 광찬이 「선령신을 섬길 줄 모르는 자는 살지 못하리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말씀이 없으시다가 잠시 후에 「네 말이 가하다」 하시고 접시를 종이에 싸서 주사(朱砂)를 묻혀 책장마다 찍으셨도다. 「이것이 곧 마패(馬牌)라」고 이르셨도다. .
상제께서 궤 두 개를 만들어 큰 것을 조화궤라 이름하고 동곡 약방에 두고 작은 것을 둔(遁)궤라 이름하고 공부하실 때에 七十二현(賢)의 七十二둔궤로 쓰시다가 신 경수의 집에 두셨도다.
그 후에 응종이 상제의 분부를 받고 식혜 아홉 사발을 빚고 태인 신 경원의 집에 가서 새 수저 한 벌을 가져오고 단지 한 개를 마련하여 상제께 드리니 상제께서 식혜를 단지에 쏟아 넣으시니 단지가 꼭 차는지라. 또 상제께서 양지와 백지와 장지를 각각 준비하여 놓으시고 가라사대 「비인복종(庇仁覆鍾)이 크다 하므로 북도수를 보노라. 북은 채가 있어야 하나니 수저가 북채라. 행군할 때 이 수저로 북채를 하여야 녹이 진진하여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양지와 백지와 장지를 각각 조각조각 찢으시고 조각마다 글을 써서 단지에 넣고 그 단지 입을 잘 봉하여 깨끗한 곳에 묻으셨도다.
상제께서 남쪽을 향하여 누우시며 덕겸에게 「내 몸에 파리가 앉지 못하게 잘 날리라」고 이르시고 잠에 드셨도다. 반 시간쯤 지나서 덕찬이 점심을 먹자고 부르기에 그는 상제의 분부가 있음을 알리고 가지 아니하니라. 덕찬이 「잠들어 계시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기에 덕겸이 파리를 멀리 쫒고 나가려고 일어서니 상제께서 문득 일어나 앉으시며 「너는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느냐. 공사를 보는 중에 그런 법이 없으니 번갈아 먹으라」고 꾸짖으셨도다. 이 공사를 끝내시고 상제께서 양지에 무수히 태극을 그리고 글자를 쓰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덕겸에게 동도지(東桃枝)를 꺾어오라 하시며 태극을 세되 열 번째마다 동도지를 물고 세도록 이르시니 마흔아홉 개가 되니라. 상제께서 「맞았다. 만일 잘못 세었으면 큰일이 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동도지를 들고 큰 소리를 지르신 뒤에 그 문축(文軸)을 약방에서 불사르시니라. 그 후 상제께서 다시 양지에 용(龍) 자 한 자를 써서 덕겸에게 「이것을 약방 우물에 넣으라」 하시므로 그가 그대로 하니 그 종이가 우물 속으로 가라앉았도다.
상제께서 와룡리 신 경수의 집에서 공우에게 「너의 살과 나의 살을 떼어서 쓸 데가 있으니 너의 뜻이 어떠하뇨」고 물으시기에 그가 대하여 말하기를 「쓸 곳이 있으시면 쓰시옵소서」 하였도다. 그 후에 살을 떼어 쓰신 일은 없으되 다음날부터 공우가 심히 수척하여지는도다. 공우가 여쭈기를 「살을 떼어 쓰신다는 말씀만 계시고 행하시지 않으셨으나 그 후로부터 상제와 제가 수척하여지오니 무슨 까닭이오니까.」 상제께서 「살은 이미 떼어 썼느니라. 묵은 하늘이 두 사람의 살을 쓰려 하기에 만일 허락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배은이 되므로 허락한 것이로다」고 일러주셨도다.
상제께서 전주 봉서산(全州鳳棲山) 밑에 계실 때 종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김 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진묵(震默)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 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도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가니라.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그 말을 듣고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도다. 진묵은 내가 외울 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도다. 그것이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더 시기하였도다.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八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써 인도국(印度國)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入寂)하니라.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 중임을 알리니라. 봉곡이 그럼 방에 찾을 것이 있으니 말하면서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도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태우느니라.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 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 갔도다.
상제께서 일정한 법에 따라 공사를 보시지 않고 주로 종이를 많이 쓰시기에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리켜 종이만 보면 사지를 못 쓴다고 비방하니라. 상제께서 그 말을 듣고 종도들에게 「내가 신미(辛未)생이라. 옛적부터 미(未)를 양이라 하나니 양은 종이를 잘 먹느니라」고 비방을 탓하지 않으셨도다.
경석이 상제의 명을 받들어 양지 二十장으로 책 두 권을 매니 상제께서 책장마다 먹물로 손도장을 찍고 모인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 또 상제께서 한 권의 책명을 「의약복서 종수지문(醫藥卜筮 種樹之文)」이라 쓰시고 「진시황(秦始皇)의 해원 도수이니라」 하시고 한 권을 신 원일의 집 뒷산에 묻고 또 한 권을 황 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도다.
상제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 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 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려가서 상제께 「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天與不取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상제의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상제께서 대답이 없으셨도다. 덕겸은 이레 동안 아무런 요령조차 얻지 못하였도다. 상제께서 「너는 어떠하뇨」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 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함으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 일러 주셨도다.
종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어느 날 상제께서 「일본 사람이 조선에 있는 만고 역신(逆神)을 거느리고 역사를 하나니라. 이조 개국 이래 벼슬을 한 자는 다 정(鄭)씨를 생각하였나니 이것이 곧 두 마음이라. 남의 신하로서 이심을 품으면 그것이 곧 역신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역신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도 역신인데 어찌 모든 극악을 행할 때에 역적의 칭호를 붙여서 역신을 학대 하느뇨. 이럼으로써 저희들이 일본 사람을 보면 죄지은 자와 같이 두려워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하루는 상제께서 공우에게 「태인 살포정 뒤에 호승예불(胡僧禮佛)을 써 주리니 역군(役軍)을 먹일 만한 술을 많이 빚어 놓으라」 이르시니라. 공우가 이르신 대로 하니라. 그 후에 상제께서 「장사를 지내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종도들과 함께 술을 잡수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지금은 천지에 수기가 돌지 아니하여 묘를 써도 발음이 되지 않으리라. 이후에 수기가 돌 때에 땅 기운이 발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어느 날 상제의 말씀이 계셨도다. 「이제 천하에 물기운이 고갈하였으니 수기를 돌리리라」 하시고 피란동 안씨의 재실(避亂洞安氏齋室)에 가서 우물을 대(竹)가지로 한 번 저으시고 안 내성에게 「음양이 고르지 않으니 재실에 가서 그 연고를 묻고 오너라」고 이르시니 그가 명하신 대로 재실에 간즉 재직이 사흘 전에 죽고 그 부인만 있었도다. 그가 돌아와서 그대로 아뢰니 상제께서 들으시고 「딴 기운이 있도다. 행랑에 가 보라」고 다시 안 내성에게 이르시니 내성은 가보고 와서 「행랑에 행상(行商)하는 양주가 들어 있나이다」고 아뢰니라. 그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재실 청상에 오르셔서 종도들로 하여금 서천을 향하여 만수(萬修)를 크게 외치게 하시고 「이 중에 동학가사를 가진 자가 있느냐」고 물으시는도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올리니 상제께서 책의 중간을 갈라 「시운 벌가 벌가 기측불원(詩云伐柯伐柯其則不遠)이라. 내 앞에 보는 것이 어길 바 없으나 이는 도시 사람이오. 부재어근(不在於近)이라. 목전의 일만을 쉽게 알고 심량 없이 하다가 말래지사(末來之事)가 같지 않으면 그 아니 내 한(恨)인가」를 읽으시니 뇌성이 대발하며 천지가 진동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또한 화약내가 코를 찌르는도다. 모든 사람이 혼몽하여 쓰러지니라. 이들을 상제께서 내성으로 하여금 일으키게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그 후에 상제께서 응종이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니라. 「황천신(黃泉神)이 이르니 황건역사(黃巾力士)의 숫대를 불사르리라」 하시고 갑칠로 하여금 짚 한 줌을 물에 축여 잘라서 숫대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화로에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는 류 찬명으로 하여금 두루마리 종이에 二十八수(宿) 자를 좌로부터 횡서하게 하시고 그 종이를 끊어서 자로 재니 한 자가 차거늘 이를 불사르셨도다.
하루는 공사를 행하시는데 양지에 글을 많이 쓰시고 종도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그 양지를 자르게 한 후 차례로 한 쪽씩을 불사르시니 그 종이쪽지가 도합 三百八十三매라. 상제께서 그 수효가 모자라기에 이상히 여겨 두루 찾으시니 한 쪽이 요 밑에 끼어 있었도다.
어떤 대신(大臣)이 어명(御命)을 받고 그 첫 정사(政事)로서 장안(長安)에 있는 청루(靑樓)의 물정(物情)을 물었도다. 이것을 옳은 공사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몇 종도들과 함께 기차 기운을 돌리는 공사를 보셨도다. 상제께서는 약방에서 백지 한 권을 가늘게 잘라서 이은 후 한 끝을 집 앞에 서 있는 감나무의 높이에 맞춰서 자르고 그 끝을 약방의 문구멍에 끼워놓고 종이를 방 안에서 말아 감으시고 또 한편 원일은 푸른 소나무 가지를 태우고 부채로 부쳤도다. 이때 집이 몹시 흔들리니 종도들은 모두 놀라서 문밖으로 뛰어 나가니라. 상제께서는 종이를 다 감으신 후에 경학을 시켜 그것을 뒷간 보꾹에 달아매고 그 종이에 불을 지피게 하고 빗자루로 부치게 하시니 뒷간이 다 타 버리니라. 경학은 상제의 말씀에 따라 다 탔는가를 살피다가 한 조각이 뒷간 옆의 대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마저 태웠도다. 이때 상제께서 하늘을 바라보시고 「속하도다」고 말씀하시기에 종도들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도다.
햇무리가 서다가 한 쪽이 터지더니 남은 종이쪽지가 타는 데 따라 완전히 서는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기차 기운을 돌리는 공사라」고 말씀하셨도다.
태을주가 태인 화호리(禾湖里) 부근 숫구지에 전파되어 동리의 남녀노소가 다 외우게 되니라. 상제께서 이 소문을 전하여 들으시고 「이것은 문 공신의 소치이니라. 아직 때가 이르므로 그 기운을 거두리라」고 말씀하시고 약방 벽상에 「기동북이 고수 이서남이 교통(氣東北而固守 理西南而交通)」이라 쓰고 문밖에 있는 반석 위에 그림을 그리고 점을 찍고 나서 종이에 태을주와 김 경흔(金京訴)이라 써서 붙이고 일어서서 절하며 「내가 김 경흔으로부터 받았노라」 하시고 칼ㆍ붓ㆍ먹ㆍ부채 한 개씩을 반석 위에 벌여 놓으셨도다.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뜻이 가는 대로 집으라」 하시니 류 찬명은 칼을, 김 형렬은 부채를, 김 자현은 먹을, 한 공숙은 붓을 집으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네 종도를 약방 네 구석에 각각 앉히고 자신은 방 가운데 서시고 「二七六 九五一 四三八」을 한 번 외우시고 종도 세 사람으로 하여금 종이를 종이돈과 같이 자르게 하고 그것을 벼룻집 속에 채워 넣고 남은 한 사람을 시켜 한 쪽씩 끄집어낼 때 「등우(鄧禹)」를 부르고 끄집어낸 종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하고 또 그 종이쪽을 받는 사람도 역시 「등우(鄧禹)」를 부르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받은 그 사람은 「청국지면(淸國知面)」이라 읽고 다시 먼저와 같이 반복하여 「마성(馬成)」을 부르고 다음에 「일본지면(日本知面)」이라 읽고 또 그와 같이 재삼 반복하여 「오한(吳漢)」을 부르고 다음에 「조선지면(朝鮮知面)」이라 읽게 하시니라. 二十八장과 二十四장을 마치기까지 종이쪽지를 집으니 벼룻집 속에 넣었던 종이쪽지가 한 장도 어기지 않았도다.
상제께서 무신년에 「무내팔자 지기금지 원위대강(無奈八字至氣今至願爲大降)」의 글을 지으시니 이러하도다.
欲速不達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九年洪水七年大旱 千秋萬歲歲盡
佛仙儒一元數六十 三合爲吉凶度數
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 ○○
또 무신년에 이런 글도 쓰셨도다.
一三五七九
二四六八十
成器局 塚墓天地神 基址天地神
運 靈臺四海泊 得體 得化 得明
이해 섣달에 공사를 보실 때 「체면장(體面章)」을 지으셨도다.
維歲次戊申十二月七日
道術 敢昭告干
惶恐伏地問安 氣體候萬死不忠不孝無序身泣 祝於君於父於師氣體候大安千萬
伏望伏望
상제께서 무신년 四월에 전주에 가셔서 여러 종도들로 하여금 글월을 정서하게 하시니라. 상제의 말씀에 따라 광찬은 김 병욱의 집에 머물면서 상제께서 전하는 글을 일일이 등사하고 형렬은 상제를 따라 용머리 주막에 가서 상제로부터 받은 글월을 광찬에게 전하느니라. 광찬은 그 글월을 정서하여 책을 성편하였도다. 상제의 명대로 책이 성편되니 상제께서 광찬에게 「세상에 나아가 그 글을 전함이 가하랴」 하시니라. 광찬이 상제의 존의에 좇을 것을 여쭈니 상제께서 그에게 「경석에게 책 한 권을 주었으니 그 글이 나타나면 세상이 다 알 것이라」 말씀하시고 성편된 책을 불사르고 동곡으로 떠나셨도다. 책 중에 있는 글이 많았으되 모두 불사르셨기에 전하지 못하였고 한 조각만이 종도의 기억에 의해서 전하는도다.
士之商職也 農之工業也 士之商農之工職業也 其外他商工留所(疑有闕文)萬物資
生 羞耻放蕩 神道統 春之氣放也 夏之氣蕩也 秋之氣神也 冬之氣道也 統以氣之
主張 者也 知心大道術 戊申十二月二十四日
左旋 四三八 天地魍魎主張
九五一 日月竈王主張
二七六 星辰七星主張
運 至氣今至願爲大降
無男女老少兒童咏而歌之
是故永世不忘萬事知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절사를 가르치셨도다. 어느 명절에 이런 일이 있었느니라. 김 형렬이 조상의 절사를 준비하였으나 상제의 명을 받고 마련하였던 제수를 상제께 가져갔더니 상제께서 여러 종도들과 함께 잡수시고 가라사대 「이것이 곧 절사이니라」 하셨도다. 또 차 경석도 부친의 제사를 준비하였던바 그 제수를 상제와 여러 종도들과 함께 나눴도다. 이때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것이 곧 제사이니라」고 가르치시니라. 이후부터 형렬과 경석은 가절과 제사를 당하면 반드시 상제께 공양을 올렸도다.
류 찬명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상제로부터 요ㆍ순(堯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하는도다.
류 찬명은 도통이 건 감 간 진 손 이 곤 태(乾坎艮震巽離坤兌)에 있으리라는 가르침을 상제로부터 받았느니라. 이 가르침을 받고 그는 큰 소리로 건 감 간 진 손 이 곤 태(乾坎艮震巽離坤兌)를 읽고 상제의 앞에서 물러나왔도다.
최 덕겸ㆍ김 자현ㆍ차 경석 등의 종도들이 상제와 함께 있을 때 최 덕겸이 「천하사는 어떻게 되오리까」고 상제께 여쭈는지라. 상제께서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쓰시면서 「이렇게 되리라」 하시니 옆에 있던 자현이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 난색을 표하니 상제께서 다시 그 글자 위에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를 쓰시고 경석을 가리키면서 「이 두 줄은 베 짜는 바디와 머리를 빗는 빗과 같으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상제께서 경석의 집에 계실 때 이런 일이 있었도다. 그의 사촌 형이 술에 만취되어 찾아와서 경석에게 수없이 패설하는데도 그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기에 더욱 기승하여 횡포를 부리다가 나중에 지쳐서 스스로 돌아가니라. 상제께서 그것을 보시고 경석에게 「너의 기운이 너무 빠졌도다. 덕으로만 처사하기는 어려우니 성(聖) 웅(雄)을 겸하라」고 당부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신 경수(申京洙)의 집에 머무르시며 벽 위에 글을 친필로 써 붙이시니 그 글은 이러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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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戊 神 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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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地 十 牌 洞
ㅣ 一 星
“ 月 標司有 數
8 初
“ 8 △ 九
百 萬 “ 日
伏 死 “
神 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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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무신년 六월에 대흥리에 계시면서 공우로 하여금 각처의 종도들을 찾아 순회하게 하여 열하루 동안 매일 새벽에 한 시간씩만 잠에 들도록 하시니라. 경석이 명을 좇아 여러 날 동안 자지 않았기에 지쳐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문 앞의 모시밭 가에 이르러 잠에 취하여 혼미에 빠진지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천자(天子)를 도모하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종도 여덟 사람과 무리들을 모아 놓고 교훈하시니라. 윤경은 상제의 말씀을 좇아 여덟 사람을 집에 모이게 하고 이를 상제께 아뢰니라. 그런데 어떻게 연락하다 보니 아홉 사람이 모이게 되니라. 윤경이 상제께 아홉 사람이 모였음을 아뢰니 상제께서 「무방하도다. 한 사람을 나의 시종으로 쓰리라」 말씀하시고 윤경의 집으로 오셨도다. 상제께서 등불을 끄게 하고 한 사람을 택하여 중앙에 세우고 나머지 여덟 사람을 팔방으로 세운 후에 「건 감 간 진 손 이 곤 태(乾坎艮震巽離坤兌)」를 외우게 하고 자리에 정좌한 종도 二十여 명으로 하여금 그것을 따라 외우게 하셨도다. 무리들은 밤이 깊어짐에 외우는 것을 그치고 등불을 밝히고 상제의 훈계를 들었도다.
상제께서 그 무리들 중에서 특별히 차 공숙을 뽑아 따로 말씀하셨는데 그는 소경이니라. 상제께서 「너는 통제사(統制使)가 되라. 一년 三百六十일을 맡았으니 돌아가서 三百 六十명을 구하라. 이것은 곧 팔괘(八卦)를 맡기는 공사이니라」고 하셨도다. 공숙은 돌아가서 명을 좇아 새로운 한 사람을 구하여 상제께로 오니 상제께서 그 사람에게 직업을 물으시기에 그가 「농사에만 진력하고 다른 직업은 없사오며 추수 후에 한 번쯤 시장에 출입할 뿐이외다」고 여쭈니 「진실로 그대는 순민이로다」고 칭송하신 뒤에 그를 정좌케 하고 잡념을 금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윤경을 시켜 구름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시니 그가 바깥에 나갔다 오더니 「하늘이 맑고 오직 상제께서 계신 지붕 위에 돈닢만 한 구름 한 점이 있을 뿐이외다」고 아뢰는지라. 그 말을 듣고 계시던 상제께서 다시 「구름이 어디로 퍼지는 가를 보아라」고 이르시니 윤경이 다시 바깥에 나갔다 오더니 「돈닢만 하던 구름이 벌써 온 하늘을 덮고 북쪽 하늘만 조금 틔어 있나이다」라고 여쭈는지라. 상제께서 「그곳이 조금 틔어 있다 하여 안 될 리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두서너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十一월에 대흥리 경석의 집에 계시면서 포덕소(布德所)를 정하는 공사를 보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황극수(皇極數)를 보신 후에 종도들을 모으고 각기 소원을 물으셨도다. 경석은 상제께서 재차 묻는 말씀에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 열지(裂地)를 원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 하시니 경석은 불쾌히 여기는지라. 상제께서 「병권은 직신(直臣)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므로 특히 너에게 맡기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그 후에 상제께서 종도들의 지혜를 깊게 하는 일에 골몰하시더니 어느 날 종도들에게 「대학(大學) 우경일장(右經一章)을 많이 외우라. 거기에 대운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형렬에게 대학에 있는 우경일장을 외워주시니 그 글은 다음과 같도다.
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 其傳十章 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舊本 頗有錯簡 今因
程子所定而更考經文 別爲序次如左
또 대학(大學)의 다른 장(章)을 외워주시며 잘 기억하여 두라고 이르셨는데 글귀는 이러하도다.
若有一介臣 斷斷兮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
聖 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 俾不通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상제께서 어느 날 한가로이 공우와 함께 계시는데 이때 공우가 옆에 계시는 상제께 「동학주(東學呪)에 강(降)을 받지 못하였나이다」고 여쭈니 「그것은 다 제우강(濟愚降)이고 천강(天降)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만일 천강을 받은 사람이면 병든 자를 한 번만 만져도 낫게 할 것이며 또한 건너다보기만 하여도 나을지니라. 천강(天降)은 뒤에 있나니 잘 닦으라」고 일러 주셨도다.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을 둘러앉히고 오주(五呪)를 써서 한 사람에게 주어 읽히고 「만 명에게 전하라」고 다짐하시고 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하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는 잠을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그것이 하늘에서 으뜸가는 임금이니라. 五만 년 동안 동리 동리 각 학교마다 외우리라」 하셨도다.
어느 날 저녁에 상제께서 약방에서 三十六만 신과 운장주를 쓰시고 여러 종도들에게 「이것을 제각기 소리 없이 七百번씩 외우라」 이르셨도다. 그리고 또 상제께서 「날마다 바람이 불다가 그치고 학담으로 넘어가니 사람이 많이 죽을까 염려하여 이제 화둔(火遁)을 묻었노라」고 이르셨도다.
형렬이 명을 좇아 六十四괘를 타점하고 二十四방위를 써서 올렸더니 상제께서 그 종이를 가지고 문밖에 나가셔서 태양을 향하여 불사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와 같이 지내자」하시고 형렬을 돌아보며 「나를 잘 믿으면 해인을 가져다주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안 지방 신명을 불러도 응하지 않으므로 사정을 알고자 부득이 그 지방에 가서 보니 원일이 공부할 때에 그 지방신(地方神)들이 호위하여 떠나지 못하였던 까닭이니라. 이런 일을 볼진대 공부함을 어찌 등한히 하겠느냐」 하셨도다.
공우가 三년 동안 상제를 모시고 천지공사에 여러 번 수종을 들었는데 공사가 끝날 때마다 그는 「각처의 종도들에게 순회ㆍ연포 하라」는 분부를 받고 「이 일이 곧 천지의 대순이라」는 말씀을 들었도다.
또 어느 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 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黙)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 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박 공우가 아내와 다투고 구릿골을 찾아왔기에 별안간 꾸짖으시기를 「나는 독하면 천하의 독을 다 가졌고 선하면 천하의 선을 다 가졌노라. 네가 어찌 내 앞에 있으면서 그런 참되지 못한 행위를 하느뇨. 이제 천지신명이 운수자리를 찾아서 각 사람과 각 가정을 드나들면서 기국을 시험하리라. 성질이 너그럽지 못하여 가정에 화기를 잃으면 신명들이 비웃고 큰일을 맡기지 못할 기국이라 하여 서로 이끌고 떠나가리니 일에 뜻을 둔 자가 한시라도 어찌 감히 생각을 소홀히 하리오」 하셨도다.
김 송환이 사후 일을 여쭈어 물으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사람에게 혼과 백이 있나니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어 후손들의 제사를 받다가 사대(四代)를 넘긴 후로 영도 되고 선도 되니라. 백은 땅으로 돌아가서 사대가 지나면 귀가 되니라」 하셨도다.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누그리고 지는 사람이 상등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니라. 분에 이기지 못하여 어울려 싸우는 자는 하등 사람이니 신명의 도움을 받지 못하리라. 어찌 잘 되기를 바라리오.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그 사람의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느니라.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고 자기 일에 해태한 마음을 품으면 나의 신명이 그에게 옮겨 가느니라.
상제께서 김 병욱이 차력약을 먹고자 하기에 「네가 약을 먹고 차력하여 태전을 지겠느냐. 길품을 팔겠느냐. 난리를 치겠느냐. 그것은 사약이니라」고 이르시고 그런 생각을 버리게 하셨도다.
정 성원(鄭性元)이 동곡 이장으로서 세금을 수납하다가 뜻하지 않게 수천 냥을 축내었던바 무신년이 되어 관부로부터 빗발치듯이 독촉받기에 마음의 갑갑함을 풀 길이 없어 술에 진탕 취해서 「내가 국세를 먹었으니 내 배를 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온 동리를 헤매었도다. 상제께서 그 고함을 듣고 그를 불러 놓고 「너무 염려하지 말라. 장차 무사하게 되리라」고 무마하셨도다. 과연 무기 세금(戊己稅金)이 면제되었도다.
상제께서 신 원일을 데리고 태인 관왕묘 제원(關王廟祭員) 신 경언(辛敬彦)의 집에 이르러 머물고 계실 때 그와 그의 가족에게 가라사대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 하시고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경언은 처음 보는 일이므로 괴이하게 생각하였도다. 이튿날 경언과 다른 제원이 관묘에 봉심할 때 관운장의 삼각수 한 갈래가 떨어져 간 곳이 없으므로 제원들은 괴상하게 여겼으되 경언은 상제께서 행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공사에 진력하기 위하여 비록 초상으로도 그 힘씀을 나타내는 것이라 깨달았도다.
상제께서 공사를 행하실 때나 어느 곳을 정하고 머무실 때에 반드시 종도들에게 정심할 것을 이르셨도다. 방심하는 자에게 마음을 꿰뚫어 보신 듯이 일깨우고 때로는 상제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방심하는 자에게 마음을 통찰하신 듯이 깨우쳐 주고 방심을 거두게 하시니라.
종도들이 태좌(胎座)법으로 둘러앉아 있을 때는 언제나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였느니라. 상제께서 벽을 향하여 누우셔서 주무실 때에도 종도들의 움직임을 꾸짖으시니 종도들은 그 밝으심에 자고 깨심과 친히 보고 안 보심이나 또한 멀고 가까움이 없음을 깨닫고 더욱 심신의 연마에 힘썼도다.
박 공우가 상제의 명을 받들어 각처를 순회하다가 어느 곳에서 상제를 믿지 않고 비방하는 것을 듣고 돌아와서 상제께 아뢰려니 상제께서 미리 아시고 「어디서 무슨 부족한 일을 보고 당하여도 큰일에 낭패될 일만 아니면 항상 남을 좋게 말하기를 힘쓰라」고 타이르셨도다.
상제께서 추운 겨울 어느 날 창조의 집에 오셔서 벽력표(霹靂票)를 땅에 묻으시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천지를 진동하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동곡 약방으로 행차하셨도다.
상제께서 일주일 동안 계속 코피를 흘리시더니 갑칠에게 관을 만들게 하고 감주 한 그릇을 잡수시니 곧 원기를 회복하셨도다. 이때에 광찬과 갑칠의 사이에 생긴 갈등을 상제께 아뢰니 벌써 알고 계시니라.
상제께서 어느 날 류찬명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나로 하여금 오래 살기를 바라는도다」 하시고 글 한 수를 외우셨도다.
稚子哭問母何之 爲道靑山採藥遲
日落西山人不見 更將何說答啼兒
또 다시 남원(南原) 양 진사(楊進士)의 만사를 외워 주시니 다음과 같으니라.
詩中李白酒中伶 一去靑山盡寂寥
又有江南楊進士 鷓鴣芳草雨蕭蕭
상제께서 신 경수의 집에서 공사를 보고 계실 때 시좌하고 있던 원일에게 「네가 동천에 붉은 옷을 입고 구름 속에 앉은 사람에게 네 번 절한 일이 있었는데 기억이 있느냐」고 회상을 촉구하시더니 원일이 문득 깨닫고 일어나 상제께 네 번 절하니 옆에 앉아있던 종도들이 까닭을 모르고 물으니라. 그는 옷깃을 다시 여미고 정중히 앉아 이야기하되 「수년 전에 갑자기 병이 들어 사경에 빠져 정신이 황홀하여지는데 어떤 사람이 사인교를 타고 가다가 나를 보고 네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문밖에 나가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 구름 속에 붉은 옷을 입은 분이 앉아 계시리니 그분에게 절을 사배하라. 그러면 너의 병이 나으리라고 이르기에 그대로 행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고 하니라.
김 경학이 무신년 五월에 고부 와룡리 문 공신의 집에 가서 상제를 뵈오니 상제로부터 「내일 일찍 태인 살포정에서 만나자」는 분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조반 후에 살포정에 이르니 그 주막에서 행객 두 사람이 싸우고 있고 상제께서는 큰길가의 높은 언덕에 돌아앉아 계시기에 올라가 인사를 드리니 인사만 받으시고 여전히 돌아앉으신 채 언짢게 계시는도다. 그는 까닭을 모르고 송구한 마음으로 모시고 서 있노라니 잠시 후에 상제께서 싸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만 두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싸움을 그치고 제 길을 가는지라. 그때에야 경학이 「어떤 사람들이 싸웠나이까」고 여쭈어 보았더니 상제께서 「우리 겨레에서 정 감(鄭堪)을 없앴는데도 세상에서 정 감의 노래가 사라지지 아니하기에 혹시 이(李)씨가 정(鄭)씨의 화를 받을까 염려스러워 이제 그 살을 풀고자 이씨의 기운을 돋우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 일러 주시니라.
이해 여름에 경석이 상제를 모셨도다. 이때 종도들이 악사를 불러 가야금을 타게 하고 즐겁게 놀고 있었노라. 이것을 말리시면서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있는 곳에서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헛된 일을 못하느니라. 저 하늘을 보라」 하시니 구름도 같은 기운이 종도들이 놀고 있는 모양을 짓고 중천에 떠 있었도다.
상제께서 무신년 十월 김 낙범을 시켜 쌀 스무 말을 깨끗하게 찧어서 약방에 저장하게 하셨는데 형렬이 쌀이 부족하여 여러 사람의 아침밥을 지어 줄 수 없어서 갑칠을 시켜 약방에 둔 쌀 중에서 반 말을 갈라내어 조반을 지었더니 상제께서 벌써 아시고 형렬과 갑칠을 꾸짖으셨도다.
이해 겨울에 김 덕찬이 아들의 혼사를 보았도다. 혼인날에 앞서 여러 친지들이 여러 가지로 부조하는 것을 보시고 상제께서는 결혼날의 날씨를 부조하셨도다. 이해 겨울은 몹시 춥고 날씨가 고르지 못하였으므로 덕찬이 크게 염려하였으나 혼삿날은 봄과 같이 따뜻하므로 마음을 놓으니라. 여러 사람이 「상제의 부조를 받은 혼삿날이라」고 칭송하였도다.
상제께서 계신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실 때에는 때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구름 기둥이 동구(洞口) 좌우에 깃대와 같이 높이 뻗쳐서 여덟 팔 자형을 이루는 것을 종도들이 보고 아뢰니 「이는 장문(將門)이라」 일러 주시니라.
차 경석이 어느 때 정읍 고부인이 안질로 고생하고 자기 아들 희남(熙南)이 앓아 누운 것을 상제께 알리려 동곡에 아우 윤경을 보내니 마을 입구에 김 자현ㆍ김 광찬 등 十여 명이 상제로부터 「차 윤경이 대흥리에서 찾아오리라」는 말씀을 듣고 마중을 나와 그를 맞았도다.
이때에 오랫동안 가물었도다. 상제께서 갑칠에게 청수 한 동이를 길어오게 하신 후 일러 말씀하시기를 「아래와 웃옷을 벗고 물동이 앞에 합장하고 서 있어라. 서양으로부터 우사를 불러와서 만인의 갈망을 풀어주리라.」 갑칠이 말씀대로 옷을 벗고 동이 앞에 합장하여 서니 문득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 비가 내리니라. 이때 상제께서 갑칠에게 「청수를 쏟고 옷을 입으라」 하시고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너희들도 지성을 다하여 수련을 쌓으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 류 찬명이 「이런 일은 세상 사람이 다 모르니 원컨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널리 깨닫게 하여 주소서」 하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종도들이 풍ㆍ우ㆍ한ㆍ서(風雨寒暑)에 따라 불편을 아뢸 때마다 천기를 돌려서 편의를 보아주시니라. 하루는 상제께서 「너희들이 이후로는 추워도 춥다 하지 말고 더워도 덥다 하지 말고 비나 눈이 내려도 불평하지 말라. 천지에서 쓸 데가 있어서 하는 일이니 항상 말썽을 부리면 역천이 되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진묵(震默)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 봉곡(金鳳谷)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冤)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故國)으로 데려와서 선경(仙境) 건설에 역사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김 형렬을 불러 물으셨도다. 「네가 나의 사무를 담당하겠느냐.」 형렬이 「재질이 둔박하와 감당치 못할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꾸짖으시니 형렬이 대하여 「가르치심에 힘입어 담당하겠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무한 유사지 불명(無恨有司之不明)하라.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의 친우로되 처사를 잘못함으로써 공명이 휘루참지(揮淚斬之)하였으니 삼가할지어다」고 일러 주셨도다.
十八ㆍ九세 된 소년이 광산에서 일하다가 큰 돌에 맞아 다리가 부러지고 힘줄이 끊어지면서 다리를 펴지 못하고 몸도 자유롭게 굽히지 못하는지라. 그 소년이 상제께서 전주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하므로 상제께서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가 흐르느니라. 위로 뛰어 보라」 이르시니 그 소년이 힘주어 몸을 세우면서 위로 뛰니 오그라졌던 다리가 펴지니라. 이것은 혈맥과 뼈에 충동을 주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하루는 형렬의 딸이 병들어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 문밖에 나가서 휘파람을 세 번 부신 뒤에 만수(萬修)를 세 번 부르시니 맑은 하늘에 문득 지미 같은 것이 가득히 끼어 지척을 분별키 어려워지니라. 상제께서 「이런 것이 있어서 사람을 많이 병들게 한다」 하시고 공중을 향하여 한 번 입 기운을 풍기시니 그 지미 같은 것이 입 바람에 몰려 올라가서 푸른 하늘이 트이고 곧 바람이 일어나서 지미를 흩어버리니 하늘이 다시 맑아지니라. 이로부터 형렬의 딸은 병이 나았도다.
종도 차 경석ㆍ안 내성ㆍ박 공우가 대흥리 앞 내에서 목욕할 때 상제께서 경석에게 흰 소금 한 줌을 물 위에 뿌리게 하신 다음에 냇물에 들어오셔서 고기잡이를 하신다고 하시더니 경석의 다리를 잡고 「가물치를 잡았다」고 하시기에 경석이 「저의 다리이외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그렇게 되었나」 하시고 다리를 놓으셨도다.
또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속에 병신이 육갑한다는 말은 서투른 글자나 배웠다고 손가락을 꼽작이며 아는 체한다는 말이니 이런 자는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고 하시고
상제께서 하루는 「천지 대팔문(天地大八門) 일월 대어명(日月大御命) 금수 대도술(禽獸大道術) 인간 대적선(人間大積善) 시호 시호 귀신 세계(時乎時乎鬼神世界)」라 써서 신 경수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공우(公又)를 주어 경수의 집 벽에 붙이게 하시고 가라사대 「경수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정하노니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장점만 취하고 혹 단점이 보일지라도 잘 용서하여 미워하지 말라」 하셨도다. 이때에 또 형렬(亨烈)에게 가라사대 「법(法)이란 것은 서울로부터 비롯하여 만방(萬方)에 펼쳐 나가는 것이므로 서울 경(京) 자 이름 가진 사람의 기운을 써야 할지로다. 그러므로 경수(京洙)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경학(京學)의 집에 대학교를, 경원(京元)의 집에 복록소(福祿所)를 각각 정하노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화천하시기 전해 섣달 어느 날 백지에 二十四방위를 돌려 쓰고 복판에 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道德君子)를 쓰시고 「천지가 간방(艮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二十四방위에서 한꺼번에 이루워졌느니라」고 하시고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 천추 도덕 군자가 배를 몰고
전 명숙(全明淑)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君子神)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
고 이르셨도다.
1909년
차 문경(車文京)이 기유년 정월 二일에 술을 마시고 상제를 「역적질을 한다」고 고함을 치며 비방하니라. 이 비방이 천원 병참에 전해져서 군병들이 출동하려 하니라. 이 일을 미리 상제께서 아시고 경석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고 바로 비룡촌(飛龍村) 차 윤경의 집으로 떠나셨도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상제께서 경석에게 三일 새벽에 고사를 지내도록 하셨는데 마침 이 일이 일어났으므로 다시 경석에게 「내일 자정에 문틈을 봉하고 고기를 굽고 술병의 마개만 열고 심고하라. 이것이 곧 고사니라」고 이르시니라. 경석이 三일 새벽에 명하신 대로 고사를 끝내니 날이 밝아지는도다. 이때 총을 멘 군병 수십 명이 몰려와서 상제를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도다.
상제께서 초닷새에 동곡으로 돌아오셨도다. 수일 후에 태인으로부터 사건이 무사히 된 전말을 들으시고 가라사대 「정읍 일은 하루 공사인데 경석에게 맡겼더니 하루아침에 안정되고 태인 일은 하루아침 공사인데 경학에게 맡겼더니 하루에 안정되니 경석이 경학보다 훌륭하도다. 그리고 경석은 병조판서의 자격이며, 경학은 위인이 직장(直腸)이라 돌이키기 어려우나 돌이키기만 하면 선인이 되리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기유년 어느 날 원평 시장 김 경집(金京執)의 음식점에 사관을 정하시고 오랫동안 왕래하셨도다. 그는 상제의 말씀이라 하여 주식을 청하는 사람에게 대금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고 음식을 제공하였도다. 이즈음에 청석골에 살고 있는 강 팔문(姜八文)이란 자가 술과 밥을 먹고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금을 내지 않고 상제께 미루고 가니라. 팔문은 그 음식을 먹고 난 뒤부터 배가 붓기 시작하더니 사경을 헤매느니라. 이 사실을 신 경수가 상제께 아뢰니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니라. 병세가 더 위급하여졌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가라사대 「몹쓸 일을 하여 신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으니 할 수 없노라」 하시더니 그 후 곧 그의 사망이 전하여졌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대흥리에 계셨는데 안 내성으로 하여금 곤봉으로 마룻장을 치라 하시며 가라사대 「이제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느니라」 하셨는데 그 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할빈 역에서 안 중근(安重根) 의사(義士)에게 암살되었도다.
기유년 二월 九일에 김 자현을 데리고 김제 내주평(金堤內主坪) 정 남기의 집에 이르시니라. 그곳에서 상제 가라사대 「이 길은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을 찾아보리라.」 상제께서 등불을 밝히고 새벽까지 여러 집을 다니시고 이튿날 새벽에 수각리(水閣里) 임 상옥(林相玉)의 집에 가시니라. 이곳에서 글을 쓰고 그 종이를 가늘게 잘라 잇고 집의 뒷담에서 앞대문까지 펼치시니 그 종이 길이와 대문까지의 거리가 꼭 맞는도다. 이 공사를 보시고 상제께서 그 동리에서 사는 김 문거(金文巨)에게 가셨다가 다시 만경 삼거리(萬頃三巨里) 주막집에 쉬고 계시는 데 한 중이 앞을 지나가는지라. 상제께서 그 중을 불러 돈 세 푼을 주시는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자현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오후에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하리니 내가 잊을지라도 네가 꼭 살펴보도록 하라」 하시더니 오후에 그렇게 되었도다. 그리고 다음날에 형렬이 전주로 동행하니라. 이에 앞서 상제께서 「오늘 너희가 다투면 내가 죽으리라」 이르셨도다.
하루는 형렬이 상제의 명을 좇아 광찬과 갑칠에게 태을주를 여러 번 읽게 하시고 광찬의 조카 김 병선(金炳善)에게 도리원서(桃李園序)를 외우게 하고 차 경석ㆍ안내성에게 동학 시천주문을 입술과 이를 움직이지 않고 속으로 여러 번 외우게 하셨도다.
三월에 부안 청일(晴日)사람 이 치화(李致化)가 와서 상제를 섬기고 그 후 이공삼(李公三)이 와서 추종하니라. 상제께서 이 치화에게 「빨리 돌아가라」 하시되 치화가 종일토록 가지 아니하니 상제께서 다시 기일을 정하여 주시며 가라사대 「빨리 돌아가서 돈 七十냥을 가지고 기일 내에 오라」 하시니 치화가 그제야 돌아가서 그 기일에 돈 七十냥을 허리에 차고 와서 상제께 올렸더니 상제께서 명하사 그 돈을 방 안에 두었다가 다시 문밖에 두고 또 싸리문 밖에 두어 일주야를 지낸 후에 들여다가 간수하시더니 그 후에 공삼을 시켜 그 돈 七十냥을 차 경석의 집에 보내셨도다.
경석이 三월 어느 날에 공우와 윤경을 백암리 김 경학의 집에 보내어 상제께 일이 무사함을 아뢰게 하였도다. 그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공사를 본 후에 경석을 시험하였으되 일을 무사히 처결하였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이로다」고 하셨도다.
이때에 경학의 형이 아우를 오라고 사람을 보내온지라. 상제께서 그를 보낸 후에 발을 당기고 가라사대 「속담에 발복이라 하나니 모르고 가는 길에 잘 가면 행이요 잘못 가면 곤란이라」 하시고 곧 그곳을 떠나 최 창조의 집에 독행하셨도다. 그곳에 머무시다가 다시 혼자 그 앞 솔밭을 지나서 최 창겸에게 이르러 잠시 몸을 두시니 상제께서 계시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도다
원래 경학의 형은 이상한 술객이 경학을 속여 가산을 탕패케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편으로 경학을 만류하고자 또 한편으로 그 술객을 관부에 고발하려는 심사에서 사람을 보낸 것이니라.
그리하여 경학이 집으로 돌아오는 중도에서 순검을 만나 함께 집에 오니라. 그리고 순검은 상제를 못 찾고 최 창조의 집에 가서도 역시 찾지 못하고 있는 중에 상제께 세배하려고 최 창조의 집에 들어선 황 응종과 문 공신을 구타하였도다.
상제께서 또 三월 어느 날 「학질로도 사람이 상하느냐」고 자현의 지혜를 떠보시니라. 자현이 「학질은 세 축째에 거적을 갖고 달려든다 하나니 이 말이 상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나이다」고 대답하니 상제께서 「진실로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팔순인 자현의 모친이 三월 어느 날에 학질을 세 축 앓다가 갑자기 죽었도다. 이 소식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학질로 사람이 상한다는 말이 옳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상제께서 자현의 노모를 모실 관 속에 누워보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자현에게 「박 춘경(朴春京)의 집에 가서 관재 중 잘 맞는 것을 골라오라. 내가 장차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자현이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시나이까」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자현이 나의 죽음을 믿지 않는도다」고 탓하셨도다.
四월 어느 날 김 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시는데 백지 넉 장을 펼치시고 종이 귀마다 「천곡(泉谷)」이라 쓰시기에 그 뜻을 치복이 여쭈어 물으니 상제께서 「옛날에 절사한 원의 이름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치복과 송환으로 하여금 글을 쓴 종이를 마주 잡게 하고 「그 모양이 상여의 호방산(護防傘)과 같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갑칠은 상제의 말씀이 계셔서 바깥에 나갔다 들어와서 서편 하늘에 한 점의 구름이 있는 것을 아뢰니 다시 명하시기에 또 나가서 하늘을 보고 들어와서 한 점의 구름이 온 하늘을 덮은 것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백지 한 장의 복판에 사명당(四明堂)이라 쓰시고 치복에게 가라사대 「궁을가에 있는 사명당 갱생이란 말은 중 사명당이 아니라 밝을 명 자를 쓴 사명당이니 조화는 불법(佛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혈(胡僧禮佛穴)이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이오. 선녀직금혈(仙女織錦穴)로 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히리니 六월 十五일 신농씨(神農氏)의 제사를 지내고 공사를 행하리라. 금년이 천지의 한문(捍門)이라.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고래의 사제지간의 예를 폐지하시고 종도들에게 평좌와 흡연을 허락하셨도다.
수운(水雲) 가사에 「발동 말고 수도하소. 때 있으면 다시 오리라」 하였으니 잘 알아 두라 하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김 성국의 집에 오셔서 용둔(龍遁)을 하리라 하시고 양지 二十장을 각기 길이로 여덟 번 접고 넓이로 네 번 접어서 칼로 자르신 다음 책을 매고, 보시기에 실로 「米」와 같이 둘러매고 오색으로 그 실오리에 물을 들이고 보시기 변두리에 푸른 물을 발라 책장마다 찍어 돌리신 뒤에 그 책장을 다 떼어 풀로 붙여 이어서 네 번 꺾어 접어서 시렁에 걸어 놓으시니 오색찬란한 문채가 용형과 같으니라. 이에 그 종이를 걷어서 불사르셨도다.
김 자현은 六월 어느 날 상제께서 「네가 나를 믿느냐」고 다짐하시기에 「지성으로 믿사오며 고부화액 때에도 상제를 따랐나이다」고 믿음을 표명하였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 이 말씀을 듣고 자현은 「제가 모시고 따라가겠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다시 「어느 누구도 능히 따르지 못할지니라.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지니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六월 열흘께는 심기가 불편하셔서 동곡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청도원 김 송환의 집에 들러서 유숙하시니라. 마침 신 경원이 상제를 배알하기에 상제께서 그에게 「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하시고 양지 한 장을 주어 유(儒)ㆍ불(佛)ㆍ선(仙) 석 자를 쓰게 하시니라. 상제께서 유 자 곁에 이구(尼丘), 불 자 곁에 서역(西域), 선 자 곁에 고현(苦縣)이라 쓰시고 그 양지를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동곡 약방에 가셔서 모든 종도들에게 六월 二十일에 모이라고 통지하셨도다.
二十일에 모든 종도들이 속속 동곡에 모이니 김 형렬ㆍ김 갑칠ㆍ김 자현ㆍ김 덕유ㆍ류 찬명ㆍ박 공우ㆍ신 원일ㆍ이 치화ㆍ이 공삼ㆍ최 덕겸 등이오. 채 사윤(蔡士允)은 처음으로 동곡에서 시좌하니라. 상제께서 류 찬명에게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天文地理風雲造化八門遁甲六丁六甲智慧勇力)과 회문산 오선위기혈 무안 승달산 호승예불혈 장성 손룡 선녀직금혈 태인 배례전 군신봉조혈(回文山五仙圍碁穴 務安僧達山胡僧禮佛穴 長城巽龍仙女織錦穴 泰仁拜禮田群臣奉詔穴)을 쓰게 하고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모든 종도를 꿇어앉히고 「나를 믿느냐」고 다짐하시는지라. 종도들이 믿는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내가 죽어도 나를 따르겠느냐」고 물으시는지라. 종도들이 그래도 따르겠나이다고 맹세하니 또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궁벽한 곳에 숨으면 너희들이 반드시 나를 찾겠느냐」고 다그치시니 역시 종도들이 찾겠다고 말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리 못하니라. 내가 너희를 찾을 것이오. 너희들은 나를 찾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상제께서 「내가 어느 곳에 숨으면 좋을까」고 물으시니 신 원일이 「부안에 궁벽한 곳이 많이 있사오니 그곳으로 가사이다」고 원하니라. 이에 상제께서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도다.
상제께서 벽을 향하여 누우시더니 갑자기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제 온 누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모두 구출하기 어려우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하시고 크게 슬펴하셨도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니라. 「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아두라. 후일 내가 출세할 때에 눈이 부셔 바라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신선을 말로만 전하고 본 사람이 없느니라. 오직 너희들은 신선을 보리라. 내가 장차 열석 자의 몸으로 오리라」 하셨도다.
二十一일에 신 원일이 이 치화와 채 사윤과 그의 처남으로부터 얼마의 돈을 가져왔느니라. 상제께서 신 원일에게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의 이름을 써서 불사르게 하고 형렬에게 있는 돈 중에서 일부를 궤 속에 넣으라 하고 남은 것으로는 여러 사람의 양식을 충당케 하셨도다.
상제께서 식사를 전폐하시다가 이레 만에 형렬에게 명하사 보리밥을 지어 오라 하시므로 곧 보리밥을 지어 올리니 상제께서 그 밥을 보시고 「가져다 두라」 하시니라. 한나절이 지나서 다시 그 보리밥을 청하시는지라. 형렬이 다시 가져다 올리니 벌써 그 보리밥이 쉬었느니라. 상제께서 「절록(絶祿)이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너희들이 내 생각나면 내가 없더라도 이 방에 와서 놀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속담에 이제 보니 수원 나그네라 하나니 누구인 줄 모르고 대하다가 다시 보고 낯이 익고 아는 사람이더라는 뜻이니 나를 잘 익혀 두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二十三일 오전에 여러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제 때가 바쁘니라. 너희들 가운데 임술생(壬戌生)으로서, 누이나 딸이 있거든 수부(首婦)로 내세우라.」 형렬이 「수부로서 저의 딸을 세우겠나이다」고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세수시키고 빤 옷으로 갈아입혀서 데려오라」 하시니라. 형렬이 명하신 대로 하여 딸을 상제 앞에 데려오니라. 상제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약장을 방 한가운데 옮겨 놓게 하시고 그의 딸에게 약장을 세 번 돌고 그 옆에 서게 하고 경석에게 「대시 태조 출세 제왕 장상 방백 수령 창생점고 후비소(大時太祖出世帝王將相 方伯守令蒼生點考后妃所)」를 쓰라 이르시니라. 경석이 받아 쓸 제 비(妃)를 비(妣)로 잘못 쓴지라. 상제께서 그 쓴 종이를 불사르고 다시 쓰게 하여 그것을 약장에 붙이게 하고 「이것이 예식이니 너희들이 증인이니라」고 말씀을 끝내고 그의 딸을 돌려보내시니라. 상제께서 경석에게 그 글을 거둬 불사르게 하셨도다.
상제께서 이날에 약방 마루, 뜰, 싸리문밖에 번갈아 눕고 형렬에게 업혀 그의 집에 가서 누우셨다가 다시 약방으로 돌아오시기를 네다섯 번 반복하시니라. 형렬이 아주 지치면 경석이 대신하여 상제를 업고 두 번 왕복하고 그리고 다섯 사람이 머리 팔 다리를 각각 붙잡고 상제를 메고 약방에 모시니라. 상제께서 누워 가라사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쉬우니라. 몸에 있는 정기만 흩으면 죽고 다시 합하면 사나니라」 하셨도다.
경석으로 하여금 양지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일순 호남 서신사명(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 姜一淳湖南西神司命)」이라 쓰게 하고 그것을 불사르게 하시니라. 이때에 신 원일이 상제께 「천하를 속히 평정하시기 바라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 하셨도다.
二十四일 이른 아침에 경석을 불러 흘겨보시면서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이냐」고 나무라셨도다.
상제께서 수박에 소주를 넣어서 우물에 담갔다가 가져오게 하셨도다. 그 수박을 앞에 놓고 가라사대 「내가 이 수박을 먹으면 곧 죽으리라.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 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약방 대청에 앉아 형렬에게 꿀물 한 그릇을 청하여 마시고 형렬에게 기대어 가는 소리로 태을주를 읽고 누우시니라. 이날 몹시 무더워 형렬과 종도들이 모두 뒤 대밭가에 나가 있었도다. 응종이 상제께서 계신 방이 너무 조용하기에 이상한 마음이 들어 방을 들여다보니 상제께서 조용히 누워 계시는데 가까이 가서 자기의 뺨을 상제의 용안에 대어보니 이미 싸늘히 화천(化天)하신지라. 응종이 놀라서 급히 화천하심을 소리치니 나갔던 종도들이 황급히 달려와서 「상제의 돌아가심이 어찌 이렇게 허무하리오」 하며 탄식하니라. 갑자기 뭉게구름이 사방을 덮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는도다. 때는 단기 四千二百四十二년 이조 순종 융희 三년 기유 六월 二十四일 신축 사시이고 서기로는 一九○九년 八월 九일이었도다.
이때에 여러 종도가 떠나고 김 형렬ㆍ차 경석ㆍ박 공우ㆍ김 자현ㆍ김 갑칠ㆍ김 덕찬 등 여섯 사람만이 상제를 지켜보니라. 부친이 고부 객망리 본댁으로부터 동곡에 오시고 형렬은 뜻밖의 변을 당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는지라. 종도들이 궤 속에 간수하였던 돈으로 치상을 끝내고 남은 돈을 본댁으로 보냈도다.
치상 후에 형렬과 경석은 상제의 부친을 모시고 객망리에 가서 모친을 조문하고 다시 정읍 대흥리에 가서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玄武經)을 옮겨 썼도다.
상제께서 거처하시던 방에서 물이 들어있는 흰 병과 작은 칼이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에 발견되었는데 병마개로 쓰인 종이에
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
의 글귀와 다음과 같은 글들이 씌어 있었도다.
病有大勢
病有小勢
大病無藥 小病或有藥
然而大病之藥 安心安身
小病之藥 四物湯八十貼
祈禱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
大病出於無道
小病出於無道
得其有道 則大病勿藥自效 小病勿藥自效
至氣今至四月來 禮章
醫統
忘其父者無道
忘其君者無道
忘其師者無道
世無忠 世無孝 世無烈 是故天下皆病
病勢
有天下之病者 用天下之藥 厥病乃愈
聖父
聖子 元亨利貞奉天地道術藥局 在全州銅谷生死判斷
聖身
大仁大義無病
三界伏魔大帝神位遠鎭天尊關聖帝君
知天下之勢者 有天下之生氣
暗天下之勢者 有天下之死氣
孔子魯之大司寇
孟子善說齊粱之君
西有大聖人曰西學
東有大聖曰東學 都是敎民化民
近日日本文神武神
幷務道通
朝鮮國 上計神 中計神 下計神 無依無托 不可不文字戒於人
宮商角徵羽 聖人乃作 先天下之職 先天下之業 職者醫也 業者統也
聖之職聖之業
상제께서 기유(己酉)년에 들어서 매화(埋火) 공사를 행하시고 四十九일간 동남풍을 불게 하실 때 四十八일 되는 날 어느 사람이 찾아와서 병을 치료하여 주실 것을 애원하기에 상제께서 공사에 전념하시는 중이므로 응하지 아니하였더니 그 사람이 돌아가서 원망하였도다. 이로부터 동남풍이 멈추므로 상제께서 깨닫고 곧 사람을 보내어 병자를 위안케 하시니라. 이때 상제께서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 기운이 막힌다」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군산에 가셔서 공사를 보실 때 「지유군창지 사불천하허 왜만리 청만리 양구만리 피천지허 차천지영(地有群倉地使不天下虛 倭萬里淸萬里洋九萬里 彼天地虛此天地盈)」이라고 써서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무더운 여름날에 신방축 공사를 보시고 지기를 뽑으셨도다. 종도들이 상제께서 쓰신 많은 글을 태인 신방축의 대장간에 가서 풍굿불에 태웠나니라. 며칠 후에 상제께서 갑칠을 전주 김 병욱에게 보내어 세상의 소문을 듣고 오게 하셨도다. 갑칠이 병욱으로부터 일본 신호(神戶)에 큰 화재가 났다는 신문 보도를 듣고 돌아와서 그대로 상제께 아뢰니 상제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일본의 지기가 강렬하므로 그 민족성이 탐욕과 침략성이 강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일삼느니라. 옛적부터 우리나라는 그들의 침해를 받아 왔노라. 이제 그 지기를 뽑아야 저희의 살림이 분주하게 되어 남을 넘볼 겨를이 없으리라. 그러면 이 강산도 편하고 저희도 편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전날 신방축 공사를 보았음은 신호(神戶)와 어음이 같음을 취함이었으니 이제 신호에 큰 불이 일어난 것은 앞으로 그 지기가 뽑힐 징조이로다」고 하셨도다.
하루는 상제께서 경학의 집에서 사지를 오려 내는 듯이 백지(白紙)를 두 기장으로 오려 벽에 붙이고 물을 뿜으시니 빗방울이 떨어지는지라. 그리고 청수 한 동이를 길어 오게 하고 그 동이 물 한 그릇을 마시다가 남은 물을 다시 동이에 붓고 모인 여러 종도들에게 그 동이물을 한 그릇씩 마시게 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무당 도수라 하시며 고부인(高夫人)에게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를 치시며 「이것이 천지(天地) 굿이니라」 하시고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요 나는 천하 일등 재인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서 빌어야 살리라」고 하셨도다.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절후문(節候文)이 좋은 글인 줄을 모르고 있나니라. 시속 말에 절후(節候)를 철이라 하고 어린아이의 무지 몰각한 것을 철부지라 하여 어린 소년이라도 지각을 차린 자에게는 철을 안다 하고 나이 많은 노인일지라도 몰지각하면 철부지한 어린아이와 같다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구릿골에서 밤나무로 약패(藥牌)를 만들어 패면(牌面)에다 「만국의원(萬國醫院)」이라고 글자를 새겨 그 글자 획에다 경면주사(鏡面朱砂)를 바르시고 「이 약패를 원평(院坪) 길거리에 갖다 세우라」고 공우(公又)에게 명하셨도다. 공우가 약패를 갖고 원평으로 가려고 하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 약패를 세울 때에 경관이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려 하느뇨」 하시니 공우 여쭈길 「만국의원(萬國醫院)을 설치하고 죽은 자를 재생케 하며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도 걷게 하며 그 밖에 모든 질병을 다 낫게 하리라고 하겠나이다」고 아뢰니 「네 말이 옳도다. 그대로 시행하라」 하시고 그 약패를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김 형렬의 집에 이르시니 형렬이 식량이 떨어져서 손님이 오는 것을 괴롭게 여기는 기색이 보이므로 가라사대 「개문납객(開門納客)에 기수기연(其數其然)이라 하나니 사람의 집에 손님이 많이 와야 하나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六월 어느 날 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하셨도다.
다시 말씀을 계속하시기를 「九년간 행하여 온 개벽공사를 천지에 확증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이 참관하고 확증을 마음에 굳게 새겨 두라. 천지는 말이 없으니 뇌성과 지진으로 표명하리라.」 상제께서 모든 종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별안간 천둥 치고 땅이 크게 흔들렸도다.
상제께서 공사를 행하실 때 대체로 글을 쓰셨다가 불사르시거나 혹은 종도들에게 외워 두도록 하셨도다.
天下自己神古阜運回
天下陰陽神全州運回
天下通情神井邑運回
天下上下神泰仁運回
天下是非神淳昌運回
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
道傳於夜天開於子 轍環天下虛靈
敎奉於晨地闢於丑 不信看我足知覺
德布於世人起於寅 腹中八十年神明
厥有四象包一極 九州運祖洛書中
道理不暮禽獸日 方位起萌草木風
開闢精神黑雲月 遍滿物華白雪松
男兒孰人善三才 河山不讓萬古鍾
龜馬一道金山下 幾千年間幾萬里
胞連胎運養世界 帶道日月旺聖靈
元亨利貞道日月 照人腸腑通明明
經之營之不意衰 大斛事老結大病
天地眷佑境至死 慢使兒孫餘福葬
面分雖舊心生新 只願急死速亡亡
虛面虛笑去來間 不吐心情見汝矣
歲月如流劍戟中 往劫忘在十年後
不知而知知不知 嚴霜寒雪大洪爐
「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爲天下者不顧家事
桀惡其時也湯善其時也天道敎桀於惡天道敎湯於善
桀之亡湯之興在伊尹」
「束手之地葛公謀計不能善事
瓦解之餘韓信兵仙亦無奈何」
我得長生飛太淸 衆星照我斬妖將
惡逆摧折邪魔驚 躡罡履斗濟九靈
天回地轉步七星 禹步相催登陽明
一氣混沌看我形 唵唵急急如律令
상제께서 어떤 공사를 행하셨을 때
所願人道 願君不君 願父不父 願師不師
有君無臣其君何立 有父無子其父何立
有師無學其師何立 大大細細天地鬼神垂察
의 글을 쓰시고 이것을 「천지 귀신 주문(天地鬼神呪文)」이라 일컬으셨도다.
상제께서 기유(己酉)년 정월 一일 사시(巳時)에 현무경(玄武經) 세 벌을 종필하고 한 벌은 친히 품속에 지니고 한 벌은 도창현(道昌峴)에서 불사르고 나머지 한 벌은 경석의 집에 맡기셨도다.
言 聽 一面
益者三友
其瑞在東 神
損者三友
計 用
己酉正月一日巳時
玄武經
(符圖省略)
水火金木待時以成 水生於火 故天下無相克之理 二面
玄武經
(符圖省略)
天地之中央心也 故東西南北身依於心 三面
玄武經 死
無
(符圖省略) 餘
恨
符
充者慾也 以惡充者成功 以善充者成功 四面
玄武
(符圖省略)
動於禮者靜於禮曰道理 靜於無禮則曰無道理 五面
玄武
(符圖省略)
誓者元天地之約 有其誓 背天地之約 則雖元物其物難成 六面
玄武經
(符圖省略)
天文 七面
陰陽
政事
武玄經 八面
史略
通鑑
大學
小學 ⁀ 結 ⁀
中庸 反 五 反
論語 書 字 書
孟子 體 一 體
詩傳 ‿ ‿
書傳
周易
消滅陰害符 九面
消 ⁀
滅 反
陰 書 (符圖省略)
害 體
符 ‿
戊申臘(反書體) 十面
基礎(反書體)
棟梁(反書體)
天地人神有巢文(反書體)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基礎棟梁 十一面
(符圖省略)
基礎 十二面
棟梁
魂魄(反書體) 東西南北(反書體)
基礎棟梁(反書體) 十三面
飛者走者
(符圖省略)
符文天(符圖中) 干從
(反書體) 干衡
陰陽(符圖中) 十四面
(符圖省略)
基礎 十五面
(符圖省略) 政事符(符圖中)
棟梁 (反書體)
(反書體)
曰有道 十六面
道有德
德有化
化有育
育有蒼生
蒼生有億兆
願載有唐堯
基礎棟梁終
耳 十七面
目 八
性理大全 十
口 卷
鼻
震默大師
聰明道通
心 ⁀ 十八面
靈反
神書 (符圖省略)
臺體
‿
祝 文(反書體) 十九面
維歲次己酉正月二日昭告(反書體)
化被草木賴及萬方(反書體)
魂返本國勿施睚眦伏祝(反書體) 南
無
陣 阿
大 亨 設(符圖省略) 亨員 彌
圖 陀
佛
宙宇詠歌 二十面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
宙宇壽命
至氣今至願爲大降
天地誠敬信
虛靈符(反書體) 二十一面
武夷九曲(符圖中) (符圖省略)
(反書體)
⁀
智反 曲 ⁀ ⁀ 二十二面
覺書 (符圖省略) 九 符反
符體 夷 圖書
‿ 武 中體
‿ ‿
神明符(反書體) 武 ⁀ ⁀ 二十三面
夷 符反
(符圖省略) 九 圖書
曲 中體
‿ ‿
受天地之虛無仙之胞胎 二十四面
受天地之寂滅佛之養生
受天地之以詔儒之浴帶
冠旺(反書體) (符圖省略)
兜率虛無寂滅以詔
玉樞統符(符圖中) 二十五面
(反書體)
(符圖省略)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
도주께서 기유년부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다하시니 신도의 무리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니라. 그러나 일본이 이차대전을 일으키고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리니 도주께서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으시고 인덕 도수와 잠복 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고 하셨도다. 이 선포 후에 도장은 일본 총독부에 기증되니 도주께서는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도다.
도주께서는 고향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도수에 의한 공부를 계속하셨고 종도 몇 사람이 왜경의 눈을 피하면서 도주를 도우니라. 도주께서는 회문리(會文里)에 마련된 정사 회룡재(廻龍齋)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두루 다니시면서 수행하셨도다.
경상도 이 용직(李容稷)이 한 다리가 불구인 몸으로 회룡재에 와서 도주를 모셨으니 그는 문경에서 회룡재에 왕래할 때 거지 노릇을 하면서 밤길을 이용하여 출입하였도다. 도주께서 하루는 그를 보고 「그대의 불구가 나의 공사를 돕는도다」고 말씀하시고 웃으셨도다.
제수(祭需)는 깨끗하고 맛있는 것이 좋은 것이요, 그 놓여 있는 위치로써 귀중한 것은 아니니라. 상복은 죽은 거지의 귀신이 지은 것이니라.
상제께서는 항상 종도들에게 일을 명하실 때에는 반드시 기한을 정하여 주시고 종도들로 하여금 어기지 않게 하셨도다. 상제께서는 종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찌 고르지 못한 날을 일러주랴」 하시니, 상제께서 정하여 주신 날은 한번도 순조롭지 아니한 때가 없었도다.
공사를 행하실 때나 또 어느 곳에 자리를 정하시고 머무르실 때에는 반드시 종도들에게 정심을 명하시고 혹 방심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보신 듯이 마음을 거두라고 명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떤 사람이 계룡산(鷄龍山) 건국의 비결을 물으니 「동서양이 통일하게 될 터인데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 그자가 다시 「언어(言語)가 같지 아니하니 어찌 하오리까」고 묻기에 「언어도 장차 통일되리라」고 다시 대답하셨도다.
내가 일 하고자 들어앉으면 너희들은 아무리 나를 보려고 하여도 못 볼 것이요 내가 찾아야 보게 되리라.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문왕은 유리(羑里)에서 三百八十四효를 지었고 태공(太公)은 위수(渭水)에서 三千六百개의 낚시를 버렸는데 문왕의 도술은 먼저 나타나고 태공의 도술은 이때에 나오나니라」 하시고 「천지 무일월 공각(天地無日月空殼) 일월 무지인 허영(日月無知人虛影)」이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매양 뱃소리를 내시기에 종도들이 그 연유를 여쭈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 이제 배에 실어 오는 화물표에 따라 넘어오게 되므로 그러하노라」
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빗물로 벽에 인형을 그리고 그 앞에 청수를 떠 놓고 꿇어앉아서 상여 운상의 소리를 내시고
「이마두를 초혼하여 광주 무등산(光州無等山) 상제봉조(上帝奉詔)에 장사하고 최 수운을 초혼하여 순창 회문산(淳昌回文山) 오선위기(五仙圍碁)에 장사하노라」 하시고 종도들에게 二十四절을 읽히고 또 말씀하시니라.
「그때도 이때와 같아서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匡正)하려고 당 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二十四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 너희들도 그들에게 밑가지 않는 대접을 받으리라.」
상제께서 또 어느 날 약방 대청에 앉고 류 찬명을 마루 아래에 앉히고 「순창 오선위기(淳昌五仙圍碁), 무안 호승례불(務安胡僧禮佛), 태인 군신봉조(泰仁群臣奉詔), 청주 만동묘(淸州 萬東廟)」라 쓰고 불사르셨도다. 이때에 찬명이 좀 방심하였더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명(神明)이 먹줄을 잡고 있는데 네가 어찌 방심하느냐」 하셨도다.
또 상제께서 용두치(龍頭峙)에 가서 계실 때 하루는 마당에 촛불을 밝히고 「천유 일월지명(天有日月之明) 지유 초목지위(地有草木之爲) 천도 재명 고(天道在明故) 인행 어일월(人行於日月) 지도 재위 고(地道在爲故) 인생 어초목(人生於草木)이라 써서 불사르셨도다. 이때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바람이 크게 일어도 촛불이 요동하지 않았도다. 상제께서 찬명의 서북 하늘의 구름 사이에 별 하나가 반짝이고 동남 하늘에 구름이 흩어져 별이 많이 반짝인다는 복명을 들으시고 「서북(西北)에서 살아날 사람이 적고 동남(東南) 쪽에서 많으리라」고 이르셨도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어느 날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늘 청국 만리창 신명이 오리니 잘 대접하여야 하리라」고 이르셨도다.
또 말씀하시기를
「스물네 가지 약종만을 잘 쓰면 만국 의원(萬國醫員)이 되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공우에게 말씀하시길
「동학 신자는 최 수운의 갱생을 기다리고, 불교 신자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예수 신자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나, 누구 한 사람만 오면 다 저의 스승이라 따르리라」고 하셨도다.
또 하루는 공사를 행하시고 오주(五呪)와 글을 쓰시니 이러하도다.
天文地里 風雲造化 八門遁甲 六丁六甲 智慧勇力
道通天地報恩
聖師
醫統 慶州龍潭
无極神 大道德奉天命奉神敎大先生前如律令
審行先知後覺元亨利貞布敎五十年工夫
1910년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 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1917년
도주께서는 九년의 공부 끝인 정사년에 상제의 삼계 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시도다.
도주께서 어느 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 제민(救世濟民)하리라」고 말씀하시기에 도주께서 예(禮)를 갖추려 하시니 그 신인은 보이지 않았으되, 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도다.
그 후에 도주께서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시니 이때 도주께서 이국땅 만주 봉천에 계셨도다.
그리하여 도주께서 정사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바 도중에 폭풍을 맞아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상제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안면도(安眠島)에 옮기셨도다. 도주님을 반가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곳 창기리(倉基里)의 이 정률(李正律)이었도다. 도주께서 이 섬의 정당리(正當里)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섬사람 三十여 명이 도주를 좇으니 그중에서 이 정률(李正律)이 지극히 따랐도다.
1918년
도주께서 무오년 가을에 재실에서 공부하실 때 상제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에 이 정률외 두 사람을 앞세우고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에 이르셨도다. 이 길은 상제께서 九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좇은 것이라 하시도다.
이해 十월에 도주께서 권 태로(權泰魯)외 몇 사람을 이끄시고 모악산의 대원사에 이르시니라. 이때에 도주께서 「개벽 후 후천(後天) 五만 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구」라 하시고 이 정률에게 원평 황새마을에 집을 구하여 가족들을 그곳에 이사 거주하게 하고 자신은 대원사에 몇 달 동안 머무셨도다.
이 정률이 집을 구하려고 황새마을에 이르러 마을 사람 권씨를 만나니 그가 「간밤에 꿈을 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 이사 거주하기를 간청하는지라. 정률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안면도에 건너가 가족을 모셔오니 권씨는 모든 것에 불편 없게 지성껏 보살폈도다.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
선돌부인이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라, 하루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라고 도주께 아뢰니라. 이때 도주께서는 도수에 따라 이 준세(李俊世)의 재실에서 도수를 보고 계셨도다. 이곳은 황새마을에 가까운 통사동(通士洞)이니라.
도주께서 七월 보름에 이 우형(李佑衡)을 앞세우고 금산사에 다녀오시니라. 권 태로ㆍ이 상우ㆍ박 붕래(朴朋來)와 여러 무리들의 앞에서 「오늘이 백종일(百種日)이니 인간 백종의 허물을 청산하는 날이니라.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니라」고 분부하시니 그들이 모두 자기의 허물을 개과하기에 힘쓰니라.
1919년
도주께서 기미년 九월에 들어서서 정읍 대흥리(井邑大興里) 차 경석(車京石)의 보천교 본부에 둔(遁)궤를 가져다 둔 것을 확인하시고 그것을 재실로 옮기고자 하셨도다.
조 용의(趙鏞懿)와 권 태로(權泰魯)ㆍ권 영문(權寧文)ㆍ이 정두(李正斗)ㆍ김 사일(金士一)ㆍ박 붕래외 두 명이 대흥리로 가니라. 이들이 보천교 본부에 당도하니 九월 四일 새벽 한 시경이 되니라. 본부의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든 때인지라. 그들이 한 방에 들어가 병풍으로 가려 놓은 둔궤와 약장을 찾아가지고 나왔으나 약장만은 도중에 놓고 왔기에 옮겨지지 못하였도다.
도주께서 통사동(通士洞) 재실에서 어느 날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하시고 다시 추종하는 여러 사람들을 앞에 모으고 무극대운(无極大運)의 해원상생 대도(解冤相生大道)의 진리를 설법하시어 도(道)를 밝혀 주셨도다.
도주께서 이 상우를 데리고 부안 변산(扶安邊山) 굴바위에 이르러 이곳에서 공부하시면서 상제의 대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시니라. 이에 따르고자 하는 무리 二百이 넘었도다.
1920년
도주께서 경신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二월 열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 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그 속에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 있고 양피(羊血) 스물넉 점이 궤에 찍혀 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도다. 그 후 둔궤는 도주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 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도주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도다.
1921년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하시고 도주께서 대원사에 들어가셔서 백일 도수를 마치셨도다. 마치신 날이 바로 신유년 七월 칠석날이라, 그때에야 종도들이 칠성경을 외운 뜻을 깨달으니라. 그들을 보시고 도주께서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신유년 九월 五일에 권 태로와 그 외 네 사람이 도주의 분부를 받고 구릿골에서 통사동 재실로 상제의 성골을 모시고 돌아오니라.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번개가 번쩍였도다.
성골이 옮겨진 후 十五일이 되니 상제께서 구세 제민하시고자 강세하신 날이 되니라. 이날 재실에 모여 치성을 올린 후에 도주께서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 일체동(時時黙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이라」 말씀하셨도다. 그러나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그들 속에 권 태로ㆍ이 상우ㆍ이 우형이 끼어 있었도다. 이들은 재실에서 매일 밤낮으로 치성을 올리고 공부하시는 도주의 시종을 들었도다.
1922년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니라. 이 좇는 무리들에게 도주께서 말씀하시길 「임술년 섣달에 이르면 납월 도수에 북현무 도수(北玄武度數)가 닥쳐서 금전이 아니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 하시고 소액의 금품을 남겨 놓으셨도다. 좇던 무리 중 한 사람이 문 공신(文公信)과 합세하여 야밤에 재실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끝에 상제의 성골과 약간의 금품을 훔쳐가니 섣달 그믐 새벽 두 시였도다.
1923년
도주께서 계해년 정월에 함안 회문리를 순회하고 그곳에 잠시 머무시다가 밀양 종남산(密陽終南山) 세천동(洗川洞) 김 병문(金炳文)의 집에 가셨도다. 이때 배 문걸이 도주를 모시고 따르니라. 그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종이에 글을 쓰셔서 둔 도수라 하시고 석 달 동안 행하셨는데 그 종이가 심한 바람에도 날리지 않았도다.
도주께서 그 후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란 두 직책을 마련하고 전교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시니라. 이해 六월 치성일 전날에 밀양의 이 우형ㆍ김 용국ㆍ최 창근ㆍ안 병문 그리고 부산의 박 민곤과 안동의 권 태로와 의성의 조 원규와 예천의 이 종창ㆍ신 용흠 그리고 봉화의 박 붕래ㆍ김천의 김 규옥과 풍기의 조 진명과 청도의 장 득원 외 여러 사람들이 회문리에 모인 자리에서 도주께서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을 마치고 전교를 내리시니라.
傳 敎
七閏十九歲爲章 二十七章是會當
按 間一年置閏則有餘日 間二年置閏則日不足 及至十九年 置七閏則無餘不足故以
十九年爲一章 二十七章爲一會 一會凡五百十三年也 孟子所謂五百年必有王者
興者此也
三會爲統 三統爲元 循環往復互無彊
按 一會各五百十三年則 三會合一千五百三十九年也 一統各一千五百三十九年
則三統合四千六百十七年是爲一元
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軒轅立極肇斯元
按 黃帝距今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上元甲前計算)
萬像萬事皆有是 諸法諸書總此源
按 天文地理人事 皆黃帝之所始敎而 史記記年亦自黃帝始也
傳囂頊嚳勛華禹 初統初會世世聖
按 自黃帝至於舜禹畧五百年矣 初統初會者以黃帝爲始則 以黃帝元年計 以至於舜
禹五百十三年者也
日出萬暈同發明 春回品物共華盛 初統之中降中季 聖不承承但一時
按 初統者黃帝以後凡一千五百三十九年之謂而 五百十三年以後則初統之中會也 一
千二十六年以後則爲初統之季會也
禹後有湯湯後文 一會一聖應會期 中統由來世漸降 聖不道行但敎傳
按 中統者黃帝卽位 後千五百三十九年以後爲仲統也
釋後有孔孔後耶一會一敎各門筵
按 釋迦如來距今二千九百五十年(癸亥年計)癸丑生 孔子距今二千四百七十四年庚
戌生 耶蘇距今一千九百二十三年辛酉生
季統敎亦無肇聖 惟有述聖斷啓來
按 季統者黃帝卽位 後三千七十八年以後之季統也 距今一千五百年前六朝及新羅之
時佛道中興 其後五百年距今略一千年前大宋之時濂洛諸賢一時傳道 其後五百年
以後羅馬法王以耶蘇敎爲西洋之盟主
佛梁儒宋耶羅馬 一敎一昌應會回
도주께서 청도 유천(淸道楡川)의 박 동락(朴東洛)의 집에서 단 도수를 행하시니 이것이 곧 진인 보두법(眞人步斗法)이니라. 이때 배 문걸이 시종을 들었도다.
계해년 九월에 이를 마치시고 도주께서는 十월부터 다음 해 二월 중순까지 청도의 적천사(磧川寺) 도솔암에 있는 칠성각 뒤에 돌단을 높이 쌓고 二十四방위를 정하고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공부시간은 저녁 일곱 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 시로 정하여 일분일초도 어김없이 넉 달 동안 계속하셨는데 낮에는 공부 행하실 때 쓰실 글을 많이 쓰셨도다. 이때에 공부는 단 도수라 하셨으며 시종한 사람은 배 문걸ㆍ이 우형ㆍ박 민곤이니라.
1924년
날로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도주께서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
갑자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시어 폐백 도수(幣帛度數)를 밤 열 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 시까지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
갑자년 十一월에 태인도장에 가셔서
庚은 변경지이시(變更之伊始)하고
申은 신명지의당(神明之宜當)이라
천어사어경신(天於斯於庚申)하고
지어사어경신(地於斯於庚申)이라
만물종어경신(萬物終於庚申)하고
아역여시경신(我亦如是庚申)이라
고 밀양의 이 우형ㆍ김 용국ㆍ박 민곤ㆍ안동의 권 태로ㆍ청송의 조 호규ㆍ의성의 김 장회ㆍ봉화의 박 붕래ㆍ김천의 김 규석 등에게 말씀하셨도다.
1925년
을축년에 구태인 도창현(舊泰仁道昌峴)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때 도주께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 응원 뇌성 보화 천존 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시고 종지(宗旨) 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도다.
종지(宗旨)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
(陰陽合德 神人調化 解冤相生 道通眞境)
신조(信條)
사강령(四綱領)∙∙∙ 안심(安心)ㆍ안신(安身)ㆍ경천(敬天)ㆍ수도(修道)
삼요체(三要諦)∙∙∙ 성(誠)ㆍ경(敬)ㆍ신(信)
목적(目的)
무자기(無自欺) 정신개벽(精神開闢)
지상 신선 실현(地上神仙實現) 인간 개조(人間改造)
지상 천국 건설(地上天國建設) 세계 개벽(世界開闢)
도주께서 이해에 각도문을 말씀하시니라.
覺 道 文
夫聖人之經典不求文章之色彩而求其眞理眞人之心求其實而不求外飾求其物之事理則求其天然而不求造作也故聖人明心達道而不求聞達書不求文章之色彩衣不求綾羅也求於文章者聖人之心法難得求乎外飾者聖人之眞實難得大哉聖人之道德元亨利貞大經大法道正天地數定千法而理定心法正大光明仙佛儒大道正通是以天命代語先後天道理氣生大矣至矣聖矣惟我奉敎後學以光大道以承大德以弘大業淸華五萬年龍華仙境一一同躋之地千萬幸甚焉
봄 어느 날에 도주께서 부안 변산(邊山)에 가셔서 육정(六丁)신장을 불러 응기케 하시니 뇌성벽력이 크게 일고 산천이 진동하는 듯하였도다.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三百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그러나 두 섬의 네 곳에서 뜻을 이룩하고자 하셨으되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 후 일본(日本) 마상 회사(馬上會社)가 성과를 거두게 되었도다. 안면도의 二十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도다. 도주께서 제민 사업을 돕는 한편 안면도 창기리에 있는 재실 홍일우(洪一宇)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이때에 서산읍의 사람 이 동만(李東萬)이 도주를 가까이 모셨도다.
개척의 제민 사업으로 안면도에 와 계신 도주를 이 정률이 모시고 그의 아들이 심부름을 하였도다. 어느 날 밤에 도주께서 그 아들에게 가지고 계시던 큰 칼을 숨겨 두라고 이르셨도다. 그러나 그 아들은 칼이 무거워서 옮기지 못하여 그 사연을 도주께 아뢰니 「네 마음으로 숨겨 보라」고 다시 이르시니 아들이 마음속으로 뒤뜰 대밭에 숨길까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 칼이 없어졌도다. 이튿날 창기리 촌장이 경관을 데리고 도주께서 머물고 계신 방을 샅샅이 뒤지다가 경관이 큰 칼의 향방을 도주께 물으니라. 이것은 그들이 도주를 요술쟁이로 안 까닭이나 증거를 잡지 못하고 돌아가니라. 도중에서 경관이 그 아들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그 아이가 「몸을 위해 해변에 수양하러 왔노라」고 대답하니라. 이들이 돌아간 후에 그 아이는 도주께 「저도 모르게 그런 대답이 나왔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이에 도주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으며 큰 칼은 대밭에 있었도다.
얼마 후 그 촌장이 급히 도주를 찾아와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들이 죽게 되어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는지라. 도주께서는 시종하는 아이와 함께 그 집으로 가서 병자실에 아이를 들여보내시니 아이는 그 방에 들어서자 병자의 머리맡에 갑옷을 입은 무장이 칼을 뽑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나와서 그 사정을 아뢰니 이 말을 들으시고 아무 말씀 없이 병자실에 들렀다 나오셔서 거처에 돌아오셨도다. 다음날에 촌장이 황급하게 도주를 찾더니 「아들이 죽었으니 어찌 하오리까」고 여쭈니 도주께서는 그를 앞세우고 시체실에 드시어 자신의 손가락을 죽은 자의 가슴에 대시니 죽었던 자가 깨어 가족들을 돌아보고 「나는 한명이 되어 가니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말하니라. 이때 도주께서 손가락을 몸에서 떼시니 병자는 그제야 숨을 거두었도다.
1926년
도주께서 병인년 봄 어느 날 공부를 마치고 담뱃대 도수라고 하시면서 담뱃대의 담배통과 물부리에 크고 작은 태극을 그려 여러 개를 만들어 여러 종도들에게 등급별로 나눠 주시고 일반 신도들에게는 제각기 설대에 태극을 그려 넣게 하셨도다.
여름에 도주께서 태인과 서울 도염동에 오르내리시다가 겨울에 태인에 머무셨도다. 서울에서의 공부는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았도다.
1927년
도주께서 태인에 계시다가 정묘년 九월부터 배 문걸을 데리시고 통사동의 재실에 가셔서 주(籌)를 놓는 공부를 석 달 동안 보시고 그 후에도 계속하셨도다. 주의 판을 오동목으로, 숫가지를 대나무 조각으로 하셨도다. 숫가지 놓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고 숫가지가 이리저리로 옮겨질 때마다 불빛이 번쩍였도다.
1928년
무진년에 포유문이 선포되었느니라.
布 喩 文
曰人生處世惟何所欲惟名惟榮曰名曰榮人所共欲而求之難得是何故也都是無他未知捷徑捷徑非他求也吾之所求有無量至寶至寶卽吾之心靈也心靈通則鬼神可與酬酢萬物可與俱序惟吾至寶之心靈無路可通汨沒無形之中一世虛過幸於此世有無量之大道正吾之心氣立吾之義理求吾之心靈任上帝之任意洋洋上帝在上浩浩道主奉命明明度數無私至公引導乎無量極樂五萬年淸華之世肅我道友嚴我道友極誠極敬至信至德難求之欲虛過一世之冤至于斯而豈不解冤哉喜吾道友勖哉勉哉
당시에 奉祝呪 ∙ 眞法呪 ∙ 二十八宿呪 ∙ 二十四節呪 ∙ 心經道通呪 ∙ 七星呪 ∙ 願戴呪 ∙ 觀音呪 ∙ 解魔呪 ∙ 伏魔呪 ∙ 陰陽經 ∙ 運合呪 ∙ 開闢呪 ∙ 玉樞統 ∙ 太極呪 ∙ 明耳呪 ∙ 五方呪 ∙ 五臟呪 ∙ 九靈三精呪 ∙ 曳鼓呪 등이 주문으로 쓰였으나 대부분이 전하지 않고 몇 주문만이 전하여 오니라.
二十八宿呪
星宿下鄧禹馬成吳漢王梁賈復陣俊耿弇杜茂寇恂傅俊岑彭堅鐔馮異王覇朱祐任光祭遵李忠景丹萬修蓋延邳肜銚期劉植耿純藏宮馬武劉隆喼喼如律令
二十四節呪
候下長孫無忌孝恭杜如晦魏徵房玄齡高士廉尉遲敬德李靖蕭瑀段志玄劉弘基屈突通殷開山柴紹長孫順德張亮侯君集張公謹程知節虞世南劉政會唐儉李世勣秦叔寶喼喼如律令
陰 陽 經
乾定坤順乾陽坤陰日行月行日陽月陰有神有人神陰人陽有雄有雌雌陰雄陽有內有外內陰外陽有右有左左陰右陽有隱有顯隱陰顯陽有前有後前陽後陰天地之事皆是陰陽中有成萬物之理皆是陰陽中有遂天地以陰陽成變化神人以陰陽成造化
天無地化無布於其下地無天功無成於其上天地和而萬物暢天地安而萬象具
神無人後無托而所依人無神前無導而所依神人和而萬事成神人合而百工成神明竢人人竢神明陰陽相合神人相通然後天道成而地道成神事成而人事成人事成而神事成神明神明天地諸神明下鑑垂察奉命身太一聖哲所願成就就
運 合 呪
元亨利貞天地之道仁義禮智人神之道乾坎艮巽坤离兌震八位之精東西南北四位之精周天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轉換之度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天十之精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地十二之精金木水火土五行之精靑紅黃白黑五色之精宮商角徵羽五音之精黃鐘大呂太簇夾鐘姑洗仲呂蕤賓林鐘夷則南呂無射應鐘律呂之精酸苦甘辛醎五味之精春夏秋冬四時之精日月星辰風雲霹靂造化之精雨陽燠寒調和之精六洲山岳鍾陸之精江湖河海鍾水之精原濕井野率土之精走飛草木品物之精正直剛柔淸濁之精萬國國都京邑之精萬國州郡人民之精儒佛仙一合之精文武才兼用之精壽富貴攸好德多男子五福之精喜怒哀樂中和之精貌言視聽思五事之精食貨祀司空司徒司寇賓師八政之精世界人民觀測之精王公侯伯子男六爵封秩之精萬國各都一合之精天下壯士使用之精四海蒼生赤子之精四海疆土一統之精海印造化如意做作之精仙佛儒諸修道者修道一合之精諸道度諸精氣茁茁歸合太一聖哲茁茁歸合太一聖哲茁茁歸茁茁歸合太一聖哲聖哲崩騰績宇周隨利隨唵哈喑玆散利周利遵則娑婆啊
開 闢 呪
天上玉京天尊神將天上玉京太乙神將玉京玉樞守門將軍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白馬元帥大將軍雷聲霹惡將軍惡鬼雜鬼禁亂將軍三首三界都元帥地神霹靂大將軍天動地動陰陽霹靂大將軍左部關元帥右部馬元帥天地造化風雲神將陰陽五行奇門神將六丁六甲遁甲神將太極斗破八門神將山上吹嘯猛虎將軍多率神軍百騎將軍龍盤虎踞鬼哭神將千萬惡鬼打節神將魑魅魍魎揮致神將法律邪魔盡滅神將風濤殺首呼天神將五百年間一享神將三台七星諸大神將二十八宿諸位神將啓明長庚二府神將九辰太白禁令神將二十四節諸位神將十二辰諸部神將天地五方呼令神將上下八位巡察神將萬里風雨轉化神將六丁六甲所率神將九靈三精應元神將萬古歷代英雄豪傑諸大神將統合天四將四十八大將軍四萬神將八萬四千諸大神將感我微誠助我宇一大運大事改改降臨降臨侍衛我奉命身大運大命太一聖哲常隨不離大道通大位定與天地合與陰陽合與五行合通天地通萬古通五方通四海四海應身力拔山岳威振乾坤天地道通天地造化無窮不息進退有法吾奉九天上世君勅速勅速唵喼喼如律令
玉 樞 統
天門地戶玉樞大判上帝出座萬神擧令左右劒戟前後旗幟風雨大作日月晦冥霹靂聲震山水崩潰天轉地轉陰陽變化海印造化無窮無極無山退海移野崩陵殺氣消滅惡物自死神急人忙不分晝夜北斗樞西斗樞南斗樞東斗樞中斗樞轉環東岳柱西岳柱南岳柱北岳柱中岳柱改立東海門西海門南海門北海門開闢金元氣水元氣木元氣火元氣土元氣改定急如雷火疾如直矢億兆蒼生手下生活天地人大判決大事定位陰陽五行順平定位萬物群生各各定位天地復定日月更明山通水遠淸明世界和順世界萬理新制建哲極于中五廣濟化四極大定永定五萬年淸化之世唵喼喼如律令
明 耳 呪
天地昇光地支昇曠日月昇曠開呪聞耳聞呪耳曠耳邊有聲速通人義唵喼喼如律令
五 方 呪
謹請東方工曹太冲天罡靑帝將軍南方太乙勝光小吉赤帝將軍西方傳送從魁河魁白帝將軍北方登明神后大吉黑帝將軍中央黃帝將軍降我局所侍吾主人太一聖哲吾奉三淸眞王喼喼如律令
五 臟 呪
天尊曰木肝中靑氣氣從左便重出化爲火心中赤氣氣從前面重出化爲金肺中白氣氣從右便重出化爲水腎中黑氣氣從背上重出化爲土脾中黃氣氣從額上重出化爲百節氣從千脉貫通百事如意萬事如意天上天下地上地下人間萬事無不通知喼喼如律令
九靈三精呪
天有貪狼巨文祿存文曲廉貞武曲破軍左輔右弼九星人有天生武靈玄珠定中孑丹雷雷丹元太靈靈童九靈天有虛精六淳曲生三台人有太光爽靈幽精三精天人爲一星靈不移相隨人間守護吾身上照下應道氣團圓延命長生福祿無邊與天同德與日同明與時順序與物會合江山不老九州淵源上天入地無不通明觀形察色無不通知遠報近報禍福影應如谷有聲如形隨影我兮神兮感應感應一如所願吾奉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玉淸眞王律令
1945년
이 용직이 을유년 七월 이튿날 회룡재를 찾고 초나흗날에 떠나려고 도주를 뵈었더니 도주께서 며칠 더 묵어가라고 만류하시니라. 그가 초엿샛날에 다시 떠나려고 하니 도주께서 「오늘 무슨 큰 일이 일어나고 도수가 바꿔지리라」고 말씀을 하시니 이 용직은 그 까닭을 의심하니라. 다시 도주께서 「이제 두려워 말라. 다녀오도록 하라」고 이르시고 그를 떠나보내니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도다.
1949년
도주께서 기축년 겨울에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방 한간에서 정화수 스물네 그릇을 받들고 四十九일을 한 도수로 정하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이 광석(李光石)이 대웅전에서 도주를 위해 발원 염불을 올리니라. 四十九일이 거의 될 무렵에 도주께서 승려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달려가 보니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도다. 도주께서 四十九일을 다 채우신 새벽에 공부실 위에 학이 울며 날아가고, 시종자에게 그동안 모아 놓은 글씨 종이를 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에 띄우라고 이르시므로 시종자가 그대로 하니 시냇물에 무지개가 서는도다.
도주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도주께서 그 자리에서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의 상제의 글귀를 외우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 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1951년
박 한경(朴漢慶)이 도주의 부르심을 받고 청주 근방에 있는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를 찾으니 건물은 왜정 때에 없어지고 빈터만이 남아있는 사정을 도주께 아뢰었도다. 또 그는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 한규(柳漢珪)를 데리고 화양동에 가서 도주께서 거처하실 곳을 마련하고 기다렸으되 다음 기회로 미루신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도다. 신묘년 三월에 있었던 일이니라.
1954년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부산 대신동(釜山大新洞)의 산비탈 판자촌에 큰 불이 갑오년 三월에 일어나니라. 그 불길이 강한 동남풍을 타고 보수동 도장을 향해 번져오므로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하니라. 이때 오 치국ㆍ박 봉상이 이를 도주께 아뢰니 듣고 계시다가 문을 열고 대신동 쪽을 바라보셨도다. 거세던 동남풍이 누그러지고 서풍이 일더니 불이 꺼지는도다.
이해 봄 어느 날 도주께서 보수동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의 사정을 물으셨도다. 이때 박 한경ㆍ오 치국ㆍ임 규오ㆍ박 중하ㆍ박 봉상ㆍ이 인호 등이 시좌하였도다.
도주께서 갑오년 가을에 박 한경에게 사략 상하권(史略上下卷)과 사서 삼경(四書三經)의 구판을 구하게 하시므로 이때에 통감(通鑑)ㆍ소학(小學)ㆍ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시전(詩傳)ㆍ서전(書傳)ㆍ중용(中庸)ㆍ주역(周易)의 구판을 구하여 올렸더니 이 책들은 그 후에 도장에 비치되었도다.
도주께서 다음 달에 박 한경(朴漢慶)과 김 용화(金容和)ㆍ김 해구(金海九)ㆍ오 치국(吳治國)ㆍ류 철규(柳喆珪)ㆍ이 윤섭(李允燮)ㆍ류 한규(柳漢珪)ㆍ김 영하(金永河)ㆍ오 영식(吳永植) 등을 데리시고 해인사(海印寺) 경내에 있는 관음전(觀音殿)이자 심검당(尋劒堂) 뒤편의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사흘 동안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나 공부에 관한 말씀은 없으시고 「사명당(四溟堂)의 입적실에 가서 불공이나 드리고 가리라」 말씀하시니 박 한경과 그 외 세 사람이 먼저 그곳을 돌아보고 와서 가시기를 청하니 「너희들이 다녀왔으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근처에 있는 백련암과 그 외 여러 암자를 돌아보시고 길에 오르셨도다.
도주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에 여러 종도들을 모아 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 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 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 바닷물을 보라. 전부 전기이니라. 물은 흘러 내려가나 오르는 성품을 갖고 있느니라. 삼라 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어느 날 시종자들이 도주를 뵈옵고 조수(潮水) 이치를 알고자 여쭈니 도주께서 「바다의 조석(潮汐) 이치는 음이다. 一매부터 五매까지는 동몽(童蒙)이요, 六매는 성년(成年)이요 六매가 한 사리이요, 十五일은 六매 한 사리이고 十六일은 二사리이고 十七일은 三사리이고 十八일은 四사리이고 十九일은 五사리이며 二十일은 六사리이며 곧 六격기이니라. 二十一일은 소격기이고 二十二일은 호(湖)이며 二十三일은 조금이고 二十四일은 무시이니라. 二十五일은 一매이고 二十六일은 二매이며 二十七일은 三매이며 二十八일은 四매이고 二十九일은 五매이며 三十일은 六매 한 사리이니라」고 알려주시고 또 「二十九일의 작은 달에서는 그믐날의 아침의 조와 저녁의 석을 계산하느니라. 말하자면 아침의 조를 五매로 저녁의 석을 六매로 계산하여 그믐날 하루를 두 사리로 계산하는도다」고 일러 주셨도다.
1956년
병신년 三월에 박 한경은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 철규ㆍ박 종순과 함께 정하신 바에 따라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雞祠)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 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데 이날따라 그 후손이 도주께서 불러 나온 듯이 미리 와서 문을 여니 도주께서는 배종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두루 살피셨도다. 그리고 동학사 염화실(拈花室)에서 이레 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길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神明解冤)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도다.
도주께서 종도들에게 「다섯 화공이 각기 맡은 대로 용 한 마리를 그렸느니라. 그림이 잘 되고 못 된 것은 그들이 모두 그린 뒤에야 알게 되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또 도주께서 하루는 「있는 말 없는 말을 꾸며서 남을 유혹하지 말고 올바르게 진리를 전하라. 혹세무민하는 행동은 천지 안에서 용납할 길이 없도다」고 종도들을 깨우치셨도다.
박 한경이 이해 八월에 충청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교화에 힘을 다하고 있던 중에 급히 도장으로 귀환하라는 도주의 분부를 받고 류 철규와 함께 돌아오니 도주께서 지리산 쌍계사(智異山雙磎寺)에 갈 터인데 배종할 것을 분부하시니라. 다음날에 박 한경ㆍ류 철규ㆍ한 상덕ㆍ김 재복이 도주를 모시고 절에 이르러 정하신 바에 따라 청학루(靑鶴樓)의 뒷계단 위에 있는 영주각(瀛洲閣)의 정결한 방으로 주지의 안내를 받았도다. 도주께서 이레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생각하였던 바와는 달리 쉽게 마쳤다고 하시고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이라
고 말씀하셨도다.
1957년
도주께서 청명한 정유년 가을 어느 날에 감천에서 박 한경에게 「누구의 소유지냐」고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물으시기에 그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고 아뢰니라. 그곳이 훗날에 도주의 묘소(墓所)로 정하여지도다.
도주께서 이해 十一월에 도인들의 수도공부의 설석을 명령하고 공부는 시학(侍學) 시법(侍法)으로 구분케 하고 각 공부반은 三十六명으로 하며 시학은 五일마다 초강식(初降式)을 올리고 十五일마다 합강식(合降式)을 올리며 四十五일이 되면 봉강식(奉降式)을 행하게 하고, 시법은 시학공부를 마친 사람으로서 하되 강식을 거행하지 않고 각 공부 인원은 시학원(侍學員) 정급(正級) 진급(進級)의 각 임원과 평신도로써 구성하고, 시학원은 담당한 공부반을 지도 감독하고 정급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리고 진급은 내빈의 안내와 수도처의 질서 유지를 감시하여 수도의 안정을 기하게 하고, 시학관(侍學官)을 두어 당일 각급 수도의 전반을 감독하도록 하셨도다.
박 한경은 이해 섣달에 「도전(시봉) 오 치국을 교체하려 하니 적임자를 말하라」는 도주의 분부를 받고 몇 사람을 아뢰오니 「마땅치 않다」 하시므로 다시 류 철규를 아뢰니 아무 말씀이 없으시므로 응낙하신 줄 생각하고 류 철규에게 지방에 내려가서 모든 일을 정리케 하니라. 다음 달에 박 한경이 류 철규가 올라온 것을 도주께 아뢰니 「그만 두라」고 분부하셨도다.
도주께서 다음 해 二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 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도다.
박 한경은 도전이 된 후에 지방의 일로 며칠 다녀오기를 도주께 청하였으되 허락을 얻지 못하였도다.
도주께서 정유년 十一월 二十一일 자시부터 무술년 三월 三일까지 도장에서 불면 불휴하고 백일 도수를 마치시니라. 五일에 심히 괴로워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 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 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무술년 三월 六일 미시요 양력으로 一九五八년 四월 二十四일이오. 수는 六十四세로다.
화천을 고하듯 뇌성이 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듯 빗방울이 뿌리더니 무지개가 도장을 덮으셨도다.
시기 미상
이제 천하 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에만 눈이 어두우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
삼생(三生)의 인연이 있어야 나를 좇으리라.
너희들이 믿음을 나에게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
나의 일은 남이 죽을 때 잘 살자는 일이요 남이 잘 살 때에 영화와 복록을 누리자는 일이니라.
우리 공부는 물 한 그릇이라도 연고 없이 남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공부이니 비록 부자와 형제간이라도 함부로 의지하지 말지어다.
상제께서 김 형렬에게 말씀하시니라. 「망하려는 세간살이를 아낌없이 버리고 새로운 배포를 차리라. 만일 애석히 여겨 붙들고 놓지 않으면 따라서 몸마저 망하게 되리니 잘 깨달아라.」
지금은 해원시대니라. 양반을 찾아 반상의 구별을 가리는 것은 그 선령의 뼈를 깎는 것과 같고 망하는 기운이 따르나니라. 그러므로 양반의 인습을 속히 버리고 천인을 우대하여야 척이 풀려 빨리 좋은 시대가 오리라.
상제께서 비천한 사람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쓰셨도다. 김 형렬은 자기 머슴 지 남식을 대하실 때마다 존댓말을 쓰시는 상제를 대하기에 매우 민망스러워 「이 사람은 저의 머슴이오니 말씀을 낮추시옵소서」 하고 청하니라. 이에 상제께서 「그 사람은 그대의 머슴이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나뇨. 이 시골에서는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말을 고치기 어려울 것이로되 다른 고을에 가서는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다 존경하라. 이후로는 적서의 명분과 반상의 구별이 없느니라」 일러 주셨도다.
상제께서 김 갑칠이 항상 응석하여 고집을 부리나 상제께서 잘 달래여 웃으실 뿐이고 한 번도 꾸짖지 아니하시니 그는 더욱 심하여 고치지 않는도다. 형렬이 참지 못해 「저런 못된 놈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으니 상제께서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그대의 언행이 아직 덜 풀려 독기가 있느니라.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 남을 잘 말하면 덕이 되어 잘 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나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 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당신에 대하여 심히 비방하고 능욕하는 사람에게도 예로써 대하셨도다. 종도들이 불경한 자를 예우하시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기에 상제께서 말씀하시되 「저희들이 나에게 불손하는 것은 나를 모르는 탓이니라. 그들이 나를 안다면 너희가 나를 대하듯이 대하리라. 저희들이 나를 알지 못하고 비방하는 것을 내가 어찌 개의하리오」 하셨도다.
상제께서는 항상 밥알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면 그것을 주우셨으며 「장차 밥을 찾는 소리가 구천에 사무칠 때가 오리니 어찌 경홀하게 여기리오. 한 낟 곡식이라도 하늘이 아나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종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가라사대 「칠산(七山)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도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그물에 잡히며 농사도 또한 그와 같이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맺느니라. 굶어 죽는 일은 없느니라」 하셨도다.
경석이 벼논에 날아드는 새 떼를 굳이 쫓거늘 말씀하시되 「한 떼의 새가 배를 채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어찌 천하 사람의 배를 채워 주기를 뜻하리오」 하셨도다.
세상에서 수명 복록이라 하여 수명을 복록보다 중히 여기나 복록이 적고 수명만 길면 그것보다 욕된 자가 없나니 그러므로 나는 수명보다 복록을 중히 하노니 녹이 떨어지면 죽나니라.
상제께서 몇 달 동안 객망리 앞 주막에서 천지공사를 행하시니 종도가 많아지니라. 그 덕에 주막집 주인 오 동팔(吳東八)이 돈을 모았는데 그 후 상제께서 비용이 떨어진 것을 알고 배척하는지라. 모든 종도가 그 주인의 무례에 노하니 상제께서 종도들의 언행을 억제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찌 예절을 알겠느뇨. 내가 무례에 성을 내면 신명이 그에게 큰 화를 줄 것이니 대인의 과차에 큰 덕을 베풀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끼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리오」 하고 타이르셨도다.
세속에 전하여 내려온 모든 의식과 허례를 그르게 여겨 말씀하시길 「이는 묵은 하늘이 그르게 꾸민 것이니 장차 진법이 나리라」 하셨도다.
자고로 화복이라 하나니 이것은 복보다 화를 먼저 겪는다는 말이니 당하는 화를 견디어 잘 받아 넘겨야 복이 이르느니라.
상제께서 남을 비방하는 데 대해서 「사람마다 제 노릇 제가 하는 것인데 제 몸을 생각지 못하고 어찌 남의 시비를 말하리오」 하고 깨우쳐 주셨도다.
「마음을 깨끗이 가져야 복이 이르나니 남의 것을 탐내는 자는 도적의 기운이 따라들어 복을 이루지 못하나니라」 하셨도다.
마음은 성인의 바탕으로 닦고 일은 영웅의 도략을 취하여야 되느니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부귀한 자는 빈천을 즐기지 않으며 강한 자는 약한 것을 즐기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음을 즐기지 않으니 그러므로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가 곧 나의 사람이니라」 하셨도다.
인망을 얻어야 신망에 오르고 내 밥을 먹는 자라야 내 일을 하여 주느니라.
뱀도 인망을 얻어야 용이 되나니 남에게 말을 좋게 하면 덕이 되나니라.
상제께서 까닭 없이 오해를 받고 구설을 사서 분개하는 사람을 가리켜 「바람도 불다가 그치나니 남의 시비를 잘 이기라. 동정에 때가 있나니 걷힐 때에는 흔적도 없이 걷히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의 덜미를 쳐서 물리치나니라. 자리를 탐내지 말며 편벽된 처사를 삼가하고 덕을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히리라.
한 사람의 품은 원한으로 능히 천지의 기운이 막힐 수 있느니라.
창생이 큰 죄를 지으면 천벌을 받고 작은 죄를 지은 자는 신벌 혹은 인벌을 받느니라.
수운(水雲) 가사에 「난법 난도(亂法亂道)하는 사람 날 볼 낯이 무엇인가」라 하였으니 삼가 죄 짓지 말지니라.
동학 가사에 「운수는 길어가고 조같은 잠시로다」 하였으니 잘 기억하여 두라.
죄가 없어도 있는 듯이 잠시라도 방심 말고 조심하라.
상제께서 경석이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고 심히 근심하는 것을 아시고 가라사대 「일찍 모든 허물을 낱낱이 생각하여 풀어 버리라고 하였는데 어찌 지금까지 남겨 두었느냐. 금후 다시 생각지 말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안 내성에게 말씀하셨도다. 「불의로써 남의 자제를 유인하지 말며 남과 다투지 말며 천한 사람이라 천대하지 말며 남의 보화를 탐내지 말라. 보화라는 글자 속에 낭패라는 패자가 들어 있느니라.」
상제께서 어느 날 부친에게 「일생을 살아오시는 중에 잘못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시라」 하시므로 상제의 부친은 낱낱이 기록하여 유 칠룡(兪七龍)을 시켜 올리니 상제께서 받고 일일이 보신 후 불사르시며 「이제 잘못된 과거는 다 풀렸으나 짚신을 더 삼아야한다」고 하시더니 부친은 종전대로 임자(壬子)년까지 八년간 신을 삼았도다.
상제께서 정 남기의 집에 이르셨을 때 그 아우의 부모에 대한 불경한 태도를 보시고 그의 죄를 뉘우치게 하시니라. 그 아우가 부친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불손하게 대답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문 앞에서 갑자기 우뚝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땀만 뻘뻘 흘리면서 연달아 소리만 지르니 가족들이 놀라 어찌할 줄 모르는지라. 상제께서 조금 지나서 그의 아우를 돌아보시고 「어찌 그렇게 곤욕을 보느냐」고 물으시니 그제서야 그의 아우가 몸을 굽히고 정신을 차리는지라. 그 까닭을 가족들이 물으니 그의 아우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데 갑자기 정신이 아찔하더니 숨이 막혀 마음대로 통하지 못하였다 하니라.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그때에 너는 숨이 막히고 답답하여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하시며 크게 꾸짖어 가라사대 「네가 부친에게 불경한 태도를 취했을 때 부모의 가슴은 어떠하였겠느냐 너의 죄를 깨닫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지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상제께서 장 익모(張益模)의 집에 가셨을 때 그가 자기 어린 아들을 지극히 귀여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교훈하시기를 「복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도의로서 부모를 잘 공양하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김 보경에게 글을 써 주시면서 이르시기를 「너의 소실과 상대하여 소화하라.」 보경이 그 후 성병에 걸려 부득이 본가로 돌아와 달포 동안 머물고 있을 때 웅포에 살던 소실은 다른 곳으로 가버렸느니라.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본처를 저버리지 말라」 하시고 성병을 곧 낫게 하셨도다.
세상에서 우순(虞舜)을 대효라 일렀으되 그 부친 고수(瞽瞍)의 이름을 벗기지 못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하리오.
「내가 너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네 뱃속에 경우가 많은 연고니라. 여자도 경우가 많아야 아이를 많이 낳으리라」고 공우(公又)에게 말씀하셨도다.
상부하여 순절하는 청춘과부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악독한 귀신이 무고히 인명을 살해하였도다」 하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그 글은 이러하였도다.
忠孝烈 國之大綱然 國亡於忠 家亡於孝 身亡於烈
「곡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는 종도들의 궁금증을 상제께서 풀어주시고자 말씀하시기를 「원통하게 죽은 신에게 우는 것이 가하나 그렇지 않게 죽은 신에게는 곡하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도다.
신은 사람이 먹는 대로 흠향하니라.
유부녀를 범하는 것은 천지의 근원을 어긋침이니 죄가 워낙 크므로 내가 관여치 않노라.
너희들은 항상 평화를 주장하라. 너희들끼리 서로 싸움이 일어나면 밖에서는 난리가 일어나리라.
사람들끼리의 싸움은 천상에서 선령신들 사이의 싸움을 일으키나니 천상 싸움이 끝난 뒤에 인간 싸움이 결정되나니라.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어서 복을 이루게 되나니라.
남을 속이지 말 것이니 비록 성냥갑이라도 다 쓴 뒤에는 빈 갑을 반드시 깨어서 버려야 하나니라.
죄 중에 노름의 죄가 크나니라. 다른 죄는 혼자 범하는 것이로되 노름 죄는 남까지 끌어들이고 또 서로 속이지 않고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식불언(食不言)이라 하였으니 먹는 것을 말하지 말며 침불언(寢不言)이라 하였으니 남의 누행을 말하지 말라.
글도 일도 않는 자는 사 농 공 상(士農工商)에 벗어난 자이니 쓸 데가 없느니라.
선천에서는 하늘만 높이고 땅은 높이지 아니하였으되 이것은 지덕(地德)이 큰 것을 모름이라. 이 뒤로는 하늘과 땅을 일체로 받들어야 하느니라.
선천에는 눈이 어두워서 돈이 불의한 사람을 따랐으나 이 뒤로는 그 눈을 밝게 하여 선한 사람을 따르게 하리라.
돈이란 것은 순환지리로 생겨 쓰는 물건이니라. 억지로 구하여 쓸 것은 못되나니 백년 탐물(百年貪物)이 일조진(一朝塵)이라.
서교는 신명의 박대가 심하니 감히 성공하지 못하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맞이하였으니 사람도 명색이 없던 사람이 기세를 얻고 땅도 버림을 받던 땅에 기운이 돌아오리라.
후천에서는 그 닦은 바에 따라 여인도 공덕이 서게 되리니 이것으로써 예부터 내려오는 남존여비의 관습은 무너지리라.
인간의 복록은 내가 맡았으나 맡겨 줄 곳이 없어 한이로다. 이는 일심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지체 없이 베풀어 주리라.
이제 범사에 성공이 없음은 한마음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한마음만을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무슨 일을 대하든지 한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한할 것이로다. 안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
부귀한 자는 자만 자족하여 그 명리를 돋우기에 마음을 쏟아 딴 생각을 머금지 아니하나니 어느 겨를에 나에게 생각이 미치리오. 오직 빈궁한 자라야 제 신세를 제가 생각하여 도성 덕립을 하루 속히 기다리며 운수가 조아들 때마다 나를 생각하리니 그들이 내 사람이니라.
공우는 종도들이 모두 상투를 틀고 있는데 자신은 삭발하였기에 그들과 싸이기 어려우므로 불안하게 생각한 나머지 머리를 길러 솔잎상투에 갓망건을 쓰고 다니다가 금구(金溝)를 지나던 어느 날 일진회의 전 동지 十여 명을 만나 그들의 조소를 받고 머리를 깎여 두어 달 동안 바깥 출입을 금하고 다시 머리를 기르는 중이었도다. 돌연히 상제께서 찾아오셔서 한동안 출입하지 않는 까닭을 물으시니 공우가 사실 그대로 아뢰니라.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 머리와 무슨 상관하리오.」 이 말씀을 하시고 공우를 데리시고 구릿골로 떠나셨도다.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후천에서는 약한 자가 도움을 얻으며 병든 자가 일어나며 천한 자가 높아지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얻을 것이요 강하고 부하고 귀하고 지혜로운 자는 다 스스로 깎일지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너희들이 항상 도술을 배우기를 원하나 지금 가르쳐 주어도 그것은 바위에 물주기와 같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흘러가니라. 필요할 때가 되면 열어주리니 마음을 부지런히 하여 힘쓸지니라」 하셨도다.
내가 비록 서촉에 있을지라도 일심을 가지는 자에게 빠짐없이 찾으리라.
이제 각 선령신들이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그 선자 선손을 척신의 손에서 빼내어 덜미를 쳐 내세우나니 힘써 닦을지어다.
「나는 해마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의 발동이 있으리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고 타이르셨도다.
허물이 있거든 다 자신의 마음속으로 풀라. 만일 다 풀지 않고 남겨두면 몸과 운명을 그르치니라.
모든 일에 외면수습을 버리고 음덕에 힘쓰라. 덕은 음덕이 크니라.
남이 나에게 비소하는 것을 비수로 알고 또 조소하는 것을 조수로 알아라. 대장이 비수를 얻어야 적진을 헤칠 것이고 용이 조수를 얻어야 천문에 오르나니라.
사람들이 예로부터 「길성 소조(吉星所照)」라 하여 길성을 구하러 다니나 길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때는 해원시대이므로 덕을 닦고 사람을 올바르게 대우하라. 여기서 길성이 빛이 나니 이것이 곧 피난하는 길이니라.
믿는 자를 손가락으로 세어 꼽았으되 그자가 배신하여 손가락을 펼 때에는 살아나지 못하리라.
도를 닦은 자는 그 정혼이 굳게 뭉치기에 죽어도 흩어지지 않고 천상에 오르려니와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정혼이 희미하여 연기와 물거품이 삭듯 하리라.
전쟁사를 읽지 마라. 전승자의 신은 춤을 추되 패전자의 신은 이를 가나니 이것은 도를 닦는 사람의 주문 읽는 소리에 신응(神應)되는 까닭이니라.
가장 두려운 것은 박람 박식(博覽博識)이니라.
시속에 어린 학동에게 통감을 가르치는 풍습이 생겼나니 이것은 어릴 때부터 시비로써 성품을 기르려는 것이니 웅패의 술이로다. 어찌 합당하다 하리오.
상제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서전 서문(書傳序文)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 대학 상장(大學上章)을 되풀이 읽으면 활연 관통한다」 하셨느니라. 상제의 부친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끊임없이 읽었으므로 지혜가 밝아져서 마을 사람들의 화난을 덜어 준 일이 많았도다.
어느 때 종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상제께서 「선비는 항상 지필묵(紙筆墨)을 지녀야 하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김 형렬이 출타하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수교 신자 김 중구(金重九)가 술이 만취되어 김 형렬을 붙들고 혹독하게 능욕하는지라. 형렬이 심한 곤욕을 겪고 돌아와서 상제께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형렬에게 「청수를 떠 놓고 네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 하시니 형렬이 명하신 대로 시행하였도다. 그 후 김 중구는 한때 병으로 인해서 사경을 헤매었다고 하느니라. 이 소식을 형렬로부터 들으시고 상제께서 다시 그에게 충고하시기를 「금후에 그런 일이 있거든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네 몸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만일 허물이 네게 있을 때에는 그 허물이 다 풀릴 것이요 허물이 네게 없을 때에는 그 독기가 본처로 돌아가리라」 하셨도다.
종도 두 사람이 상제 앞에서 사담하기를 남기(南基)는 일본말을 배우지 못함을 후회하고 영서(永西)는 배우가 되지 못함을 후회하니라. 이때 갑자기 남기는 유창하게 일본말을 하고 영서는 상복을 입은 채 상건을 흔들며 일어나서 노래하고 춤추고 상복 소매로 북치는 시늉을 해보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지라. 상제께서 이를 보시고 웃으며 가라사대 「남기의 말은 일본사람과 틀림없고 영서의 재주는 배우 중에서도 뛰어나니라」 하시니 두 사람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부끄러워하느니라. 그제야 상제께서 타이르시기를 「대인을 배우는 자는 헛된 일을 하지 않느니라」 하셨도다.
또 공우의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자주 다투기에 하루는 상제께서 공우에게 「너는 표단이 있으니 인단으로 갈음하라」고 말씀하시고 난 뒤로는 성질이 누그러지고 남에게 이기려고 하지 않고 다시 다투지 아니하였도다.
김 광찬은 동곡에 있으면서 상제께서 차 경석과 상종하시는 것을 과히 좋게 생각하지 않으니라. 그는 경석이 본래 동학당이고 일진회에 참가하여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였을 터인데도 이제 그를 도문에 들여놓은 것은 상제의 공평하지 못하심이라고 불평하고 때로는 「우리가 도덕을 힘써 닦아 온 것이 모두 허탕이 되리라」고 상제를 원망하기도 하기에 형렬이 상제를 배알하여 그 사유를 고하리라고 말하여 그를 위로하였도다. 어느 날 형렬이 광찬을 데리고 상제께 배알하였으나 그 사유를 모두 고하지 못하고 오후에 돌아가려 할 때에 상제께서 광찬에게 「주인은 김 형렬이 좋으니 동곡에 가서 있으라」 일러 주시고 형렬을 따로 불러 가만히 「광찬을 데리고 집에 돌아가서 잘 위로하여 주라」고 일러 보내셨도다.
현하의 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아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후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나니라.
상제께서 경석에게 가르치시기를 「모든 일이 욕속부달(欲速不達)이라. 사람 기르기가 누에 기르기와 같으니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다 인공에 있느니라.」
믿기를 활을 다루듯이 하라. 활을 너무 성급히 당기면 활이 꺾어지나니 진듯이 당겨야 하느니라.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가르치시기를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헤아릴 수 없는 공력을 들이나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선령신들은 六十년 동안 공에 공을 쌓아 쓸 만한 자손 하나를 타 내되 그렇게 공을 들여도 자손 하나를 얻지 못하는 선령신들도 많으니라. 이같이 공을 들여 어렵게 태어난 것을 생각할 때 꿈같은 한 세상을 어찌 잠시인들 헛되게 보내리오」 하셨도다.
이제 너희들에게 다 각기 운수를 정하였노니 잘 받아 누릴지어다. 만일 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것은 성심이 없는 까닭이니라.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운수는 열려도 자신이 감당치 못하면 본곶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기도 하리라. 잘 믿을지어다」고 경고하셨도다.
공사의 일꾼이 된 자는 마땅히 씨름판을 본따를지니 씨름판에 뜻을 두는 자는 반드시 판 밖에서 음식을 취하고 기운을 길렀다가 끝판을 벼르느니라.
상제께서 공사하신 일을 어떤 사람이 「증산(甑山)께서 하는 일은 참으로 폭 잡을 수 없다」 말하거늘 상제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대인의 일은 마땅히 폭을 잡기 어려워야 하나니 만일 폭을 잡힌다면 어찌 범상함을 면하리오」 하셨도다.
「동학가사(東學歌辭)에 세 기운이 밝혀있으니 말은 소ㆍ장(蘇秦 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ㆍ두(李太白 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이르셨도다.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이는 척이 없어야 잘 된다는 말이라.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짓지 말라. 이것이 척이 되어 보복하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
이웃 사람이 주는 맛없는 음식을 먹고 혹 병이 생겼을지라도 사색을 내지 말라. 오는 정이 끊겨 또한 척이 되나니라.
고부(古阜)는 예절을 찾는 구례(求禮)이니라.
바람이 불었다가도 그치느니라(風亦吹而息)」 하듯이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은 다 때가 있느니라.
「한 고조는 소하(蕭何)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나니 너희들은 아무것도 베풀 것이 없는지라. 다만 언덕(言德)을 잘 가져 남에게 말을 선하게 하면 그가 잘 되고 그 여음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악하게 하면 그에게 해를 입히고 그 여음이 밀려와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 삼가할지니라」 하셨도다.
대학(大學)에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卽近道矣)」라 하였고 또 「기 소후자에 박이요 기 소박자에 후하리 미지유야(其所厚者薄 其所薄者厚 未之有也)」라 하였으니 이것을 거울로 삼고 일하라.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 량(諸葛亮)은 유상 팔백 주(有桑八百株)와 박전 십오 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나니라.
상제께서 「양이 적은 자에게 과중하게 주면 배가 터질 것이고 양이 큰 자에게 적게 주면 배가 고플 터이니 각자의 기국(器局)에 맞추어 주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지난 선천 영웅시대는 죄로써 먹고 살았으나 후천 성인시대는 선으로써 먹고 살리니 죄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선으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이제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써 먹고 살 도수를 짜 놓았도다.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
상제께서 하루는 공사를 행하시고 「대장부(大丈夫) 대장부(大丈婦)」라 써서 불사르셨도다.
후천에는 계급이 많지 아니하나 두 계급이 있으리라. 그러나 식록은 고르리니 만일 급이 낮고 먹기까지 고르지 못하면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상제께서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 이는 비록 초목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게 되는 연고이니라」 말씀하셨도다.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지나니라.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 놓았으니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또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의 뱃속에 출입케 하여 그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니 이는 비록 말뚝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임이 되는 연고니라. 오직 어리석고 가난하고 천하고 약한 것을 편이하여 마음과 입과 뜻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죄를 조심하고 남에게 척을 짓지 말라. 부하고 귀하고 지혜롭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두 척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니 묵은 기운이 채워 있는 곳에 큰 운수를 감당키 어려운 까닭이니라. 부자의 집 마루와 방과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 차 있나니라.
지금은 신명시대니 삼가 힘써 닦고 죄를 짓지 말라. 새 기운이 돌아 닥칠 때에 신명들이 불칼을 들고 죄지은 것을 밝히려 할 때에 죄지은 자는 정신을 잃으리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만고 역신을 해원하여 모두 성수(星宿)로 붙여 보내리라. 만물이 다 시비가 있되 오직 성수는 시비가 없음이라. 원래 역신은 포부를 이루지 못한 자이므로 원한이 천지에 가득하였거늘 세상 사람은 도리어 그 일을 밉게 보아 흉악의 머리를 삼아 욕설로 역적놈이라 명칭을 붙였나니 모든 역신은 이것을 크게 싫어하므로 만물 중에 시비가 없는 성수로 보낼 수밖에 없나니라. 하늘도 노천(老天)과 명천(明天)의 시비가 있으며 땅도 후박의 시비가 있고 날도 수한의 시비가 있으며 바람도 순역의 시비가 있고 때도 한서의 시비가 있으나 오직 성수는 시비와 상극이 없나니라」 하셨도다.
내가 보는 일이 한 나라의 일에만 그치면 쉬울 것이로되 천하의 일이므로 시일이 많이 경과하노라.
상제께서 형렬에게 교훈하시기를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 말라. 아직도 남아 있는 복이 많으니 남은 복을 구하는 데에 힘쓸지어다. 호한 신천 유불사(呼寒信天猶不死)이니라.」
상제께서 타인에게 도움을 베푸셔도 그 사람이 알지 못하는도다. 이 일을 언제나 마땅치 않게 여겨 오던 형렬이 상제께 아뢰기를 「상제께서 자식을 태어주시고도 그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시오니 무슨 까닭이오니까.」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할 일을 할 뿐이고 타인이 알아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니라.」
상제께서 천원(川原)장에서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큰 돌에 맞아 가슴뼈가 상하여 수십 일 동안 치료를 받으며 크게 고통하는 공우를 보시고 가라사대 「너도 전에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생각하여 뉘우치라. 또 네가 완쾌된 후에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하나 네가 전에 상해한 자가 이제 너에게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니 오히려 그만하기 다행이라. 네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 그러면 곧 나으리라.」 공우가 크게 감복하여 가해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풀고 후일에 만나면 반드시 잘 대접할 것을 생각하니라. 수일 후에 천원 예수교회에 열두 고을 목사가 모여서 대전도회를 연다는 말이 들려 상제께서 가라사대 「네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하여 열두 고을 목사가 움직였노라」 하시니라. 그 후에 상처가 완전히 나았도다.
상제께서 몇 달 동안 경석을 대동하시고 공사를 보셨도다. 이때 상제께서 임피(臨陂) 최 군숙(崔君淑)의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어느 날 이곳을 떠나 동곡에 들르지 아니하고 바로 태인으로 가셨느니라. 이 일로써 광찬은 「우리는 다 무용지물이라」고 더욱 불평을 품고 상제를 크게 원망하는지라. 형렬은 민망하여 태인 하마가로 찾아가서 상제를 배알하고 광찬의 불평을 알리면서 「어찌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를 문하에 머물게 하시나이까」고 의견을 아뢰니 상제께서 「용이 물을 구할 때에 비록 가시밭길이라도 피하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시니라. 형렬이 곧 돌아와서 광찬에게 「고인 절교 불출오성(古人絶交不出惡聲)」이라 이르고 금후부터 불평을 말끔히 풀라고 달랬도다.
하루는 상제께서 자신이 하시는 일을 탕자의 일에 비유하시니라. 「옛날에 어떤 탕자가 있었느니라. 그는 자신이 방탕하여 보낸 허송세월을 회과자책하여 내 일생을 이렇게 헛되게 보내어 후세에 남김이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하리요, 지금부터라도 신선을 만나서 선학을 배우겠노라고 개심하니라. 그러던 차에 갑자기 심신이 상쾌하여지더니 돌연히 하늘에 올라가 신선 한 분을 만나니라. 그 신선이 네가 이제 뉘우쳐 선학을 뜻하니 심히 가상하도다. 내가 너에게 선학을 가르치리니 정결한 곳에 도장을 짓고 여러 동지를 모으라고 이르니라. 방탕자는 그 신선의 말대로 정신을 차리고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방탕을 알고 따르지 않는지라. 겨우 몇 사람만의 응낙을 받고 이들과 함께 도장을 차렸던바 갑자기 천상으로부터 채운이 찬란하고 선악소리가 들리더니 그 신선이 나타나서 선학을 가르쳤도다.」
그리고 하루는 종도들에게 지난날의 일을 밝히시니라. 「최 풍헌(崔風憲)이라는 고흥(高興) 사람은 류 훈장(柳訓長)의 하인인데 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언행이 거칠으나 일 처리에 남보다 뛰어난지라 훈장은 속으로 그 일꾼을 아꼈도다. 훈장은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악해지는 터에 피난할 길을 그에게 부탁하였으되 풍헌은 수차 거절하다가 주인의 성의에 이기지 못하여 「가산을 팔아서 나에게 맡길 수 있나이까」 하고 물었느니라. 류 훈장이 기꺼히 응낙하고 가산을 팔아서 그에게 맡겼도다. 풍헌은 그 돈을 받아가지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하여도 류 훈장은 아예 모르는 체하더니 하루는 최 풍헌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뜻밖의 일로 크게 낙담하면서 풍헌의 집에 가서 보니 초상난지라. 그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을 위로하고 「혹 유언이나 없었더냐」고 물으니 그 아들이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족들에게 복을 입혀 상여를 따라서 나를 지리산(智異山) 아무 곳에 장사하게 하라」고 전하니라. 이 유언을 듣고 류 훈장은 풍헌을 크게 믿었던 터이므로 집에 돌아와서 가족에게 의논하니 다만 큰 아들만이 아버지의 말씀을 좇는도다. 사흘이 지나 모두들 운상하여 지리산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산상에서 「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빨리 오르라」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모두 그쪽을 바라보니 최 풍헌이라. 모두들 반겨 쫓아 올라가니 그곳의 집 한 채에 풍부한 식량이 마련되어 있느니라. 다시 최 풍헌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그가 가리키는 대로 내려다보니 사방이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지라.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왜병이 침입하여 마을마다 불을 지른 것이라 이르도다.」
상제께서 깊은 밤중에 태인읍에서 종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공사를 행하신 후에 그들에게 「이 공사에 천지 대신명이 모였으니 그들이 해산할 때에 반드시 참혹한 응징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마치시자 뜻밖에 태인읍으로부터 군중의 고함소리가 일어나는지라. 종도들이 상제를 모시고 산에서 내려와 이를 살피니 군중이 신 경현(辛敬玄)의 주막에 뛰어들어가서 세간살이와 술 항아리를 모두 부쉈도다. 원래 신 경현은 술장사를 시작한 이후 읍내 청년들의 호감을 얻어서 돈을 모았으나 그 청년들이 궁핍하면 냉대하므로 그들이 그의 몰인정에 분개하여 습격한 것이었도다. 그 이튿날 상제께서 경현의 주막에 가시니 그 부부가 서로 울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 하거늘 상제께서 아무 말씀을 않고 경현의 부인에게 술을 청하였으나 그 여인이 「술 항아리를 모두 깨었으니 무슨 술이 있사오리까」고 말하거늘 가라사대 「저 궤 속에 감추어 둔 소주를 가져오라」 하시니라. 그 여인은 당황하여 「선생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나이다」고 말하면서 작은 병에 담겨 있는 소주를 따라 올리니 상제께서 경현 부부에게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다 나에게 있는 것이지 위치에 의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후로 모든 일을 잘 생각하여 할지어다. 그렇게 하면 앞길이 다시 열리고 영업이 흥성하리라」고 타이르시니라. 이 부부는 타이르신 대로 이사를 중지하고 허물을 고치고 장사를 계속하더니 얼마 안 되어 영업이 다시 흥성하여지니라.
상제께서 일찌기 손바래기 시루산에서 호둔을 보시고 범의 성질이 너무 사나워 사람을 잘 해친다 하기에 그 성질을 알아보시니라. 「사람이 전부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이니 범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그 피해를 심하게 입을 것이므로 종자를 전할 만큼 남겨 두고 번성치 못하게 하였노라」고 종도들에게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최 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라사대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 낙언(鄭樂彦)은 죽고 최 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최 익현의 만장을 다음과 같이 지으셨도다.
讀書崔益鉉 義氣束劒戟
十月對馬島 曳曳山河橇
죄는 남의 천륜을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나니 최 익현이 고종(高宗) 부자의 천륜을 끊었으므로 죽어서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제각기 소원에 따라 부족함이 없이 받들어 줄 것이므로 도인들은 천하사에만 아무 거리낌 없이 종사하게 되리라.
세계의 모든 족속들은 각기 자기들의 생활 경험의 전승(傳承)에 따라 특수한 사상을 토대로 색다른 문화를 이룩하였으되 그것을 발휘하게 되자 마침내 큰 시비가 일어났도다. 그러므로 상제께서 이제 민족들의 제각기 문화의 정수를 걷어 후천에 이룩할 문명의 기초를 정하셨도다.
상제께서 교훈하시기를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 이제 먼저 난법을 세우고 그 후에 진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 의사에 맡기노니 범사에 마음을 바로 하라. 사곡한 것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 되니라. 이제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임하여 마음에 먹줄을 겨누게 하고 사정의 감정을 번갯불에 붙이리라.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사곡을 행하는 자는 지기가 내릴 때에 심장이 터지고 뼈마디가 퉁겨지리라. 운수야 좋건만 목을 넘어가기가 어려우리라.」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요란하게 치는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뒷날 출세할 때는 어찌 이러할 뿐이리오. 뇌성 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리라. 잘못 닦은 자는 앉을 자리에 갈 때에 나를 따르지 못하고 엎드려지리라. 부디 마음을 부지런히 닦고 나를 깊이 생각하라」 하셨도다.
나는 생ㆍ장ㆍ염ㆍ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 되게 하고 못 될 일을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 빈(孫臏)의 재조는 방 연(龐涓)으로 하여금 마릉(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 량(諸葛亮)의 재조는 조 조(曺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 데 있느니라.
천지 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 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하나니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란하였도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그러므로 최 제우(崔濟愚)는 작란한 사람이요 나는 치란하는 사람이니라. 전 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
옛적부터 상통천문(上通天文)과 하달지리(下達地理)는 있었으나 중찰인의(中察人義)는 없었나니 이제 나오리라.
위 징(魏徵)은 밤이면 옥경에 올라가 상제를 섬기고 낮이면 당 태종(唐太宗)을 섬겼다 하거니와 나는 사람의 마음을 뺐다 넣었다 하리라.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선천에서는 상극지리가 인간과 사물을 지배하였으므로 도수가 그릇되어 제자가 선생을 해하는 하극상(下克上)의 일이 있었으나 이후로는 강륜(綱倫)이 나타나게 되므로 그런 불의를 감행하지 못할 것이니라. 그런 짓을 감행하는 자에게 배사율(背師律)의 벌이 있으리라」 하셨도다.
천하의 대세가 가구판 노름과 같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이 세상에 전하여 오는 모든 허례는 묵은 하늘이 그릇되게 꾸민 것이니 앞으로는 진법이 나오리라.
이제 동서양이 교류되어 여러 가지 주의(主義)가 일고 허다한 단체가 생기나니 이것은 성숙된 가을에 오곡을 거둬 결속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어떤 사람이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을 묻기에 상제께서 이렇게 이르시니라. 「일본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鄭氏)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
후천에서는 종자를 한 번 심으면 해마다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추수하게 되고 땅도 가꾸지 않아도 옥토가 되리라. 이것은 땅을 석 자 세 치를 태우는 까닭이니라.
원시반본하는 때라 혈통줄이 바로잡혀 환부역조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세상이 급박해질 때 산도 물도 붉어지리라. 자식이 지중하지마는 제 몸을 돌볼 겨를이 없으리라. 어찌 자식의 손목을 잡아 끌어낼 사이가 있으리오.
상제께서 이런 말씀을 종도들 앞에서 하신 적이 있느니라. 「내가 출세할 때에는 하루 저녁에 주루 보각(珠樓寶閣) 十만 간을 지어 각자가 닦은 공덕에 따라 앉을 자리에 앉혀서 신명으로 하여금 각자의 옷과 밥을 마련하게 하리라. 못 앉을 자리에 앉은 자는 신명들이 그 목을 끌어 내리라.」
대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편하리라. 닥쳐오는 일을 아는 자는 창생의 일을 생각하여 비통을 이기지 못하리라.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때때로 시를 읽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셨도다.
非人情不可近 非情義不可近
非義會不可近 非會運不可近
非運通不可近 非通靈不可近
非靈泰不可近 非泰統不可近
不受偏愛偏惡曰仁 不受全是全非曰義
不受專强專便曰禮 不受恣聰恣明曰智
不受濫物濫欲曰信
德懋耳鳴 過懲鼻息
潛心之下道德存焉 反掌之間兵法在焉
人生世間何滋味 曰衣 曰食 衣食然後 曰色也
故至於衣食色之道 各受天地之氣也
惑世誣民者 欺人取物者 亦受天地之氣也
事之當旺在於天地 必不在人
然無人無天地 故天地生人 用人
以人生 不參於天地用人之時 何可曰人生乎
閑談叙話可起風塵 閑談叙話能掃風塵
一身收拾重千金 頃刻安危在處心
心深黃河水 口重崑崙山
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
道通天地無形外 思入風雲變態中
상제께서 환자를 대하실 때에 환자의 가슴과 배 속을 들여다보시는 듯이 경락(經絡)과 장부(臟腑)를 낱낱이 가리키시며 이곳은 어디이고 저곳은 어디이며 어느 장부에서 병이 났고 또 누릿누릿하게 장부에 끼어 있는 것이 담이라 하시며 하나하나 환자가 알도록 가르쳐 주셨도다.
상제께서 처음으로 의법(醫法)을 화정동(花亭洞)에서 베푸셨도다. 이 경오(李京五)는 화정동에 사는 사람이라. 어느 날 그와 친분이 있는 박 금곡이란 대원사(大院寺) 주지가 경오의 신병을 아뢰고 심방을 상제께 간청하므로 상제께서 그의 병세를 보시니라. 왼쪽 발가락이 저리고 쑤시며 오후부터 새벽까지 다리가 부어 기둥과 같이 되는지라. 그러나 그 부기가 아침에는 내렸다가 정오경에 원상대로 회복되다가도 오후에 붓기 시작하느니라. 이 증세가 三ㆍ四년 계속되어 이제 촌보를 옮기지 못하고 앉은뱅이 노릇을 하게 되었도다. 상제께서 진맥하시기를 「진실로 괴상한 병세로다. 모든 일이 작은 일로부터 큰 일을 헤아리나니라. 내가 이 병으로 표준을 삼고 천하의 병을 다스리는 시험을 하리라.」 상제께서 손수 다리 끝까지 만지고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서 씻으라」 이르시니라. 경오가 명하신 대로 하니 곧 나으니라.
상제께서 전주 능소(陵所)에 가 계실 때 황 응종(黃應鍾)이 본댁으로부터 와서 상제의 부친의 병보를 아뢰므로 상제께서 응종에게 술과 돈 열 냥을 주시며 「해가 저물었으나 불쾌히 생각지 말고 곧 돌아가다가 청도원(淸道院) 김 송환(金松煥)의 집에서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동곡 김 갑칠에게 가서 나의 모시 두루마기 한 벌을 가지고, 가서 부친에게 입혀 드리고 이 돈으로 영양분 있는 음식을 만들어 공양하라」고 이르셨도다. 응종이 날은 저물었으나 감히 명을 거역치 못하고 능소를 떠나 행길에 나온 지 한 시간도 못 되어 길옆에 돌비석이 보이는지라. 청도원에 이른 것이니라. 능소로부터 六十리나 되는 청도원을 한 시간도 못 되게 당도한 것에 놀라고 이것은 반드시 상제의 도력임을 깨닫고 기뻐하였도다. 김 송환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 동곡에 들러 두루마기를 찾아 가지고 객망리에 가서 상제의 부친에게 입혀 드리니 부친이 곧 정신을 회복하고 영양분 있는 음식 대접을 받으니 몸도 완쾌하였도다.
장 효순은 지병인 횟배앓이로 생명을 잃게 된 시집간 딸 때문에 전주부에 머물고 계시는 상제를 찾아와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하였느니라. 상제께서 그 집에 이르러 그 두 부부를 불러 벽을 사이에 두고 등지고 서게 하여 부인 병이 남편에 옮아가게 하신 후에 상제께서 남편의 배를 만져 회복하게 하시니라.
고부(古阜) 사람 이 도삼이란 자가 간질병이 있었느니라. 그자의 청을 받으시고 상제께서 「나를 따르라」 이르시고 눕혀놓고 자지 못하게 하시니라. 그자가 밥을 먹고 난 후에 배가 아프고 변에 담이 섞여 나오다가 열나흘 만에 간질 기운이 사라졌도다.
상제께서 동곡에 머무실 때 그 동리의 주막집 주인 김 사명(金士明)은 그의 아들 성옥(成玉)이 급병으로 죽은 것을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업고 동곡 약방으로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미리 아시고 「약방의 운이 비색하여 죽은 자를 업고 오는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성옥의 모는 시체를 상제 앞에 눕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상제께서 웃으시며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밀어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미수(眉叟)를 시켜 우암(尤菴)을 불러라」고 외치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 주시니 그 아이는 곧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고 소리를 치며 깨어나니라. 그리고 그 아이는 미음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걸어서 제 집으로 돌아가니라.
김 창여(金昌汝)가 동곡에서 살았는데 여러 해 동안 체증으로 고생하던 중 어느 날 상제를 찾아 자기 병을 보아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상제께서 그를 평상 위에 눕히고 배를 만지면서 형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하였더니 창여(昌汝)는 체증으로부터 제생되었도다.
調來天下八字曲 淚流人間三月雨
葵花細忱能補袞 萍水浮踵頻泣玦
一年明月壬戌秋 萬里雲迷太乙宮
淸音鮫舞二客簫 往劫烏飛三國塵
용두치에 교자를 타고 다니는 김 모란 앉은뱅이가 살고 있었도다. 그가 하루 상제를 찾아뵈옵고 편히 걸어 다니게 하여 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상제께서 그를 앞에 앉히고 담뱃대에 따라 일어서라고 이르고 그가 담뱃대가 높아짐에 따라 점점 높이 일어서려고 애를 쓰게 하시고 형렬에게 「예고신 예팽신 석란신 동서남북 중앙신장 조화조화 운오명령훔(曳鼓神曳彭神石蘭神東西南北中央神將造化造化云吾命令吽)」을 읽게 하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다시 그를 뜰에 세우고 걷게 하시며 광찬으로 하여금 그의 종아리를 쳐서 빨리 걷게 하시니라. 그는 교자를 버리고 걸어서 돌아갔도다. 그 후에 그는 걷게 된 인사로 상제께 三十냥을 공양하니 상제께서 그것으로 행인들에게 주식을 베풀어 주시고 그 사람은 행인들 앞에서 상제께서 다리를 펴주셨다고 고마운 인사를 하니라.
박 순여(朴順汝)는 어머니를 모시고 동곡에서 살아 왔는데 모친이 나이 육순으로서 병이 도를 넘었으므로 식구들이 치상의 준비를 하니라. 이 소식을 전하여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 집을 찾아가시니라. 그곳에 이르셔서 순여에게 시장에 나가 초종지례에 쓰는 제주를 쓰지 않도록 하여 주십소사 하고 지성껏 심고(心告)하고 돌아오게 하시고, 사물탕 한 첩을 달여서 병실의 바깥뜰로부터 열두 걸음이 되는 곳에 광중과 같이 땅을 파서 그 첩약을 묻고 「오래된 병이니 약을 땅에 써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돌아오는 순여에게 「누구에게 심고하였느뇨」고 물으시니라. 순여가 「선생님께 심고하였나이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웃으시고 그에게 빚어 넣은 술을 가져와서 이웃 사람들과 함께 모두들 마시게 하시니라. 병자는 곧 회생하였도다.
전 순일(田順一)은 동곡의 주막 주인인데 오랫동안 신병으로 고생한 끝에 상제께 치료를 청하여 오므로 이에 이기지 못하여 한 공숙을 데리고 병자의 집에서 병을 보셨도다. 상제께서 병자에게 죽 한 그릇을 먹이고 공숙에게 주머니 속에 있는 은행 한 개를 방안에 있는 거울 조각 위에 얹어 으슥한 곳에 두게 하시고 병자에게 술 한 상을 청하셨도다. 十여 분 지나서 상제께서 「의원이 떠나니 병자는 문밖에 나와 전송하라」 이르시니 순일이 가까스로 일어나 전송하였더니 그 후 곧 완쾌하였도다. 그 뒤에 순일이 상제를 공양하지 않기에 상제께서 「이 사람은 입맛을 잃고 신고하리라」 말씀하셨는데 이후 몇 달 동안 순일은 병상에서 일어났으나 입맛을 잃고 고통을 받았도다.
동곡 김 갑진(金甲辰)은 문둥병으로 얼굴이 붓고 눈섭이 빠지므로 어느 날 상제를 찾고 치병을 청원하였도다. 상제께서 갑진을 문 바깥에서 방쪽을 향하여 서게 하고 형렬과 그 외 몇 사람에게 대학 우경일장을 읽게 하시니라. 十여 분 지나서 갑진을 돌려보내셨도다. 이때부터 몸이 상쾌하여 지더니 얼마 후에 부기가 내리고 병이 멎었도다.
김 광찬은 상제를 모시고 김 성화가 있는 고을 임피 군둔리(臨陂軍屯里)에 이르러 며칠 동안 머물렀도다. 상제께서 죽게 된 성화의 이웃 사람을 제생하셨느니라. 상제께서 환자를 만나 그 병은 그대로 치료하기 어려우니 함열(咸悅) 숭림사(崇林寺) 노승을 조문하고 돌아오게 하셨도다. 환자는 중병의 몸을 이끌고 그곳을 돌아옴으로써 사경에서 벗어났도다. 그가 이튿날 다시 숭림사에 찾아가니 노승이 죽었는지라. 조문하고 돌아오면서도 상제 말씀에 위력을 느끼고 두려워하였도다.
상제께서 원일의 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어 돈 千냥을 가져오게 하시니 원일의 아버지는 전약을 어기고 보내지 않는지라. 상제께서 원일에게 가라사대 「이것은 대인에 대한 기만이니라. 나의 일은 일동이라도 사사롭게 못하나니 이제부터는 그대 집의 어업이 철폐케 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이 말씀이 계신 후부터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아 그의 부친은 마침내 어업을 폐지하였도다.
이 일이 있은 며칠 후에 상제께서 원일의 집에 가셨는데 때마침 원일의 부친이 서울 채권자로부터 변제의 독촉에 시달리는지라. 상제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사 원일의 부친을 대신하여 채권자에게 「우리 두 사람이 오늘 일기를 알아맞추어 탕감의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시니 그도 쾌히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만일 그대가 비가 온다고 하면 나는 안 온다 할 것이요 또 비가 안 온다고 그대가 말하면 나는 온다고 할 것이니 먼저 말하라」 하시니라. 그날은 유난히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인지라. 그 채권자가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상제께서는 「반드시 비가 오리라」고 하시니라. 조금 지나서 비가 내리니 그자는 할 수 없이 빚을 탕감하고 돌아가니라. 그 비는 상제께서 내리게 하신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믿었도다.
전주부 사람 문 태윤이 상제를 배알하니라. 상제께서 「네가 갖고 있는 보따리를 끌러 보이라」 이르시니 그자가 주춤하자 「소란 때문에 수상한 자를 근방에서는 재우지 않느니라」고 말씀을 이으시니 그제서야 그자가 풀어 보이는도다. 그것은 그자와 숙질 간의 금전 소송 서류였도다. 태윤은 상제께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므로 선생님께 그 해결 방법을 얻고자 방문한 까닭을 아뢰니라. 상제께서 글을 써서 봉하여 주시며 이것을 조카 집 문 앞에서 불사르라고 방법을 가르쳐 주셨도다. 태윤이 명을 좇으니라. 그 후에 듣자니 숙질 간의 불화가 가셨다 하니라.
상제께서 명하신 대로 六十四괘를 암송하고 갑자기 각통으로 생긴 오한 두통을 즉각에 고쳤느니라. 형렬이 이상히 여겨 그 연유를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八괘 가운데 오행이 감추어 있으니 오행의 기운을 응하게 한 것이 곧 약이 되었느니라」고 알려 주시니라.
김 갑칠의 형수가 발바닥의 종창으로 죽을 고생을 당하고 있는지라. 상제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그 환부가 용천혈(龍泉穴)이니 살기 어려우리라. 준상(俊相)과 갑칠은 오늘 밤 서로 번갈아 환자를 잠에 들지 못하게 하면서 밤을 새우라. 명부사자와 나의 사자 중 누가 강한가 보리라」고 말씀하셨도다. 두 사람은 명을 좇았으나 환자는 한때 잠을 이루지 못하여 정신이 혼몽하고 위독하여지다가 날이 밝으니 차차 정신을 차리는지라. 그제서야 상제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근심을 놓게 하시고 쌀뜨물을 환부에 바르고 百냥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돈을 청하셨도다. 준상이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가옥을 방매하여야 되겠나이다」고 여쭈어 난색을 보이므로 상제께서 그의 집을 상제께 팔게 하시니 준상이 기꺼이 승낙하기에 상제께서 그로부터 가옥 매도 문서를 받아 가지고 계시다가 잠시 후에 그것을 불사르고 준상을 그 집에서 눌러 살게 하고 방 한 간을 빌려서 수리하여 약방으로 쓰셨도다.
상제께서 덕찬을 동행케 하여 김 낙범의 집에 가셔서 그의 아들 석(碩)을 사랑으로 업어 내다가 엎드려 놓고 발로 허리를 밟으며 「어디가 아프냐」고 묻고 손을 붙들어 일으켜 걸려서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닭 한 마리를 삶아서 먹이라고 일러 주시니라. 이로부터 석의 폐병이 나았도다.
이 무렵에 괴질이 청주(淸州)와 나주(羅州)에 창궐하여 인심이 흉흉한지라. 상제께서 「남북으로 마주 터지니 장차 무수한 생명이 잔멸하리로다」고 말씀하시고 글을 써서 괴질신장에게 「호불범 제왕 장상지가 범차 무고 창생지가호(胡不犯帝王將相之家 犯此無辜蒼生之家乎)」라 칙령하시고 「내가 이것을 대속하리라」고 말씀하시니라. 상제께서 형렬에게 새 옷 다섯 벌을 급히 지어 오게 하시니라. 가져온 옷으로 상제께서 설사하시면서 다섯 번 갈아입고 「약한 자는 다 죽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이후부터 그 괴질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없어졌도다.
상제께서 두루 다니시다가 동곡 약방에 들러 그곳에 계셨도다. 그 동리에 평양집이 있었는데 이 집의 다섯 살 난 아들이 갑자기 앉은뱅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주인이 병을 보아달라고 상제를 찾아오니 상제께서 「아이에게 쇠고기와 참기름을 먹여서 내일 아침에 안고 오너라」고 이르시니라. 평양집이 가난하여 참기름만 먹이고 아이를 안고 와서 아뢰니 상제께서 아무 말씀 없이 누우시는도다. 주인이 화가 나서 「차라리 죽어라」 하면서 아이를 마구 때리니 아들이 하도 아프기에 울면서 도망치려고 일어서는지라. 그제서야 평양집이 깨닫고 매우 기뻐하면서 상제께 감사드리며 사과를 드렸더니 상제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도다.
박 순여가 왼쪽 다리에 부종이 생겨 다리가 큰 기둥과 같이 부어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므로 상제께 간청하니라. 상제께서 자현에게 「순여의 병을 다스려 살게 함이 옳으냐. 또는 그대로 두어 죽게 함이 옳으냐. 네 말 한 마디에 달렸느니라」고 물으시기에 자현이 조금 주저하다가 「살려주심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니 가라사대 「박 순여는 불량한 사람이니라. 너에게 매우 무례하였으니 너와 함께 가서 치료하리라」 하시고 자현을 앞세우고 순여의 집에 가시니라. 상제께서 손수 부운 다리를 주물러 내리시며 백탕 한 그릇을 마시게 하시는도다. 원래 순여는 나이가 자현보다 많다 하여 항상 자현을 무례하게 대하여 왔느니라. 자현은 입 밖에 내지 않으나 속으로 불쾌하게 여기고 있기에 상제께서 이것을 아시고 자현에게 물으신 것이었도다. 순여는 그 후에 부기가 내려 걸어 다니게 되었도다.
차 경석의 소실이 바늘에 손가락이 찔린 것이 팔까지 쑤시다가 마침내 반신불수가 된 것을 상제께서 육십간지를 써서 주시고 그녀의 상한 손가락으로 한 자씩 힘있게 짚어 내려가며 읽게 하고 다시 술잔을 들고 거닐게 하시니라. 이로부터 혈기가 유통하여 곧 완쾌하였도다.
김 경학의 여덟 살 난 아들이 병들어 여러 날 일어나지 못하거늘 상제께서 병실에 들어가 보시고 「일어나지 않으니 그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 빨리 일어나라」 하시니 곧 병이 나았도다.
그 후 또 김 경학이 병들어 매우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상제께서 경학에게 명하시어 사물탕(四物湯)을 끓여 땅에 묻고 달빛을 우러러보게 하시더니 반 시간 만에 병이 완쾌하였도다.
장 성원(張成遠)은 대흥리에 살면서 주막을 업으로 삼는 자인데 그의 아기가 낮에 잘 있다가도 밤이 되면 신열과 해소로 잠을 자지 못하고 몇 달을 보냈도다. 성원이 아기를 안고서 상제를 뵙고 치료를 애원하니라. 상제께서 불쌍히 여겨 아기를 보시고 성원에게 「비별(飛鼈)이니 낮이면 나와 놀고 밤이면 들어와 자니라. 불가불 다른 곳으로 옮겨야 나을 것인바 산으로 옮기려 하나 금수도 또한 생명이요 바다로 옮기려 하나 어류도 또한 생명이니 부득이 전선으로 옮겨야 하리라. 전선 두어 자를 구하여 와서 그것을 앓는 아기의 머리 위에 놓았다가 전주 밑에 버리라」고 이르시니라. 성원이 명하신 대로 시행하니 아기는 밤에 잠자기 시작하고 얼마 후에 신열과 해솟병에서 제생되었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과 함께 가시다가 한 주막에 들어가셨도다. 상제께서 그 집 주인을 보시더니 「저 사람이 창증으로 몹시 고생하고 있으니 저 병을 보아주라」고 종도들에게 이르시고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在明明德 在新民在止於至善)」을 읽히시니라. 집 주인은 물을 아래로 쏟더니 부기가 빠지는도다. 상제께서 웃으시며 「너희들의 재조가 묘하도다」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에 오르셨도다.
김 낙범은 천포창으로 몹시 고통을 받으면서도 상제께서 용두리에 계시는 동안 지성을 다하였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김 준찬과 김 덕찬과 함께 계실 때 낙범을 꾸짖으셨도다. 「네가 어찌 그렇게 태만하느뇨.」 낙범이 무슨 영문인지 분간치 못하여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하니 더욱 꾸짖으시니라. 「네가 어른이 꾸짖는데 어디로 가려 하느뇨.」 낙범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쪼그리고 앉아 꾸중만을 들으면서 땀만 흘리고 있노라니 한참 지난 뒤에 허락이 있어서 집에 돌아왔도다. 그는 꾸지람을 들을 허물을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깨닫지 못하여 송구스럽게만 여기면서 나날을 지냈도다. 그 후 천포창이 점점 나아서 그 병으로부터 제생되었도다. 그제서야 비로소 상제의 진노 견책하심이 약임을 깨달았도다.
또 상제께서 김 낙범의 아들 영조(永祚)가 눈에 핏발이 생겨 눈을 덮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 안질을 자신의 눈에 옮겨 놓으시고 그의 아들의 안질을 고치셨도다.
상제께서 공신(公信)의 독조사 도수를 말씀하신 후에 동곡(銅谷)으로 가셨도다. 공신(公信)은 고부(古阜) 옥에서 얻은 신병이 도져 집안 출입도 제대로 못하여 응종을 동곡에 계시는 상제께로 보내어 아뢰게 하였으되 좀 기다리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도다. 공신은 불끈 화가 나서 아무 약도 쓰지 않고 드러누웠노라니 병은 점점 무거워지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는지라. 응종이 민망히 여겨 구릿골에 가서 상제를 뵈오니 상제께서 공신의 병세를 묻는도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나이다」고 응종이 대답하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를 죽게 하여서야 되겠느냐. 찹쌀 아홉 되로 밥을 지어 먹이라」고 이르시니라. 응종이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니라. 공신은 그대로 믿고 행하였던바 병에 큰 차도를 보아 병석에서 일어났도다.
상제께서 어느 때 공신의 집에 계신 일이 있었도다. 그때에 공신의 모친이 요통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상제께서 들으시고 매실 한 냥쭝을 종이에 싸서 들보에 매어달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곧 제생되었도다.
상제께서 이질로 고통하는 사람에게 사물탕(四物湯) 본방에 목과(木果) 세 돈을 넣어 약으로 주셨는데 대체로 그 탕을 즐겨 쓰셨도다.
상제께서 부안 사람이 감주를 올리기에 「이것은 구천 하감주라. 어찌 도적 음식을 받으리오」라고 하셨도다.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이 그에게 사유를 물으니 그 사람이 아내 몰래 가져왔다고 알리는도다.
어느 해 여름 천원(川原)에 계실 때 참외를 올리는 자가 있었으나 상제께서 잡수시지 않고 그대로 두셨는데 공우가 사사로이 한 개를 먹었더니 갑자기 설사가 나고 낫지 않느니라. 할 수 없이 상제께 사유를 고하니 가라사대 「그 아내가 주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가져왔으므로 살기가 붙어 있었는데 그 살기에 맞았도다」 하시고 「닭국을 먹어라」 하시기에 공우가 명하신 대로 하였더니 곧 설사가 나았도다.
어느 날 고부인은 모친이 단독을 앓는다는 기별을 듣고 근친하려고 하니 상제께서 좀 기다려서 함께 가자고 하시기에 마음 속으로 기뻐하여 기다리니라. 그러던 중에 모친이 아랫방에 들어오니라. 상제께서 「왕대 뿌리에 왕대 나고 시누대 뿌리에 시누대 나나니 딸이 잘 되도록 축수하라」고 부탁하시니 이로부터 단독이 곧 나았도다.
상제께서 이 직부의 집에 가 계셨을 때에 그가 굳이 자기 부친의 당년 신수를 논평하시기를 청하므로 상제께서 부득이 백지 한 장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다시 다른 종이에 글을 써서 「급한 일이 있거든 뜯어보아라」고 이르시고 봉하여 주셨도다. 그의 부친은 그것을 깊이 간수하였다가 얼마 후에 그의 자부가 난산으로 위경에 빠져 있음을 듣고 그 봉서를 가지고 갔더니 벌써 순산하였으므로 그는 그 봉서를 다시 잘 간수하였도다. 연말에 치안이 병들어 매우 위독하게 되자 아들 직부가 그 봉서를 열어보니 「소시호탕(小柴胡湯) 두 첩」이라 쓰여 있었도다. 그 약으로 치안은 바로 쾌유하였도다.
상제께서 전주 이 치안의 집에 「고견 원려 왈지(高見遠慮曰智)」의 글을 써 놓으셨도다.
智者 與天地同 有春夏秋冬之氣 每事 任意用之 謂之智慧勇力
大智 與天地同 有春夏秋冬之氣
其次 與日月同 有弦望晦朔之理
又其次 與鬼神同 有吉凶禍福之道
萬事起於陰 以布陽 先察陰晦 以觀陽明 每事先觀始發處
陰起事而陽明 陽起事而陰匿 要須先察陰陽 陰陽則水火而已
日用事物起居動靜 在於耳目口鼻聰明道理 耳屬水 目屬火 明白然後萬事可知
水生於火 火生於水 金生於木 木生於金 其用可知然後 方可謂神人也
陰殺陽生 陽殺陰生 生殺之道 在於陰陽 人可用陰陽然後 方可謂人生也
人爲陽 神爲陰 陰陽相合然後 有變化之道也
不測變化之術 都在於神明 感通神明然後 事其事則謂之大仁大義也
事有決斷然後 有變化之道也
春夏秋冬秋爲義 義則決斷也
六用三德 三德則天德地德人德也 統合謂之大德也
德義有生殺之權 生殺則陰陽 知此兩端而已
天用地用 人用之 調理綱紀 統制乾坤 此之謂造化手段也
理雖高 出於太極无極之表 不離乎日用事物之間
年月日時分刻輪廻 皆是元亨利貞天地之道也
天地之用 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而已
養則收藏處 藏則出用處 觀其收藏出用之物 以致出也
人而用之之道 捨此而何以也
入而養中 出而形外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自然心自開也
김 광찬은 상제께서 의복을 갈아입게 되었음을 눈치 채고 미리 의복 한 벌을 지어 두었다가 올렸더니 상제께서 그 의복의 바느질의 정묘함을 칭송하시니라. 광찬이 「옷을 지은 여자는 침선과 모든 범절이 훌륭하나 앉은뱅이라 신세가 가긍하나이다」고 여인의 신세를 아뢰니 상제께서 긍측하게 여기사 「나와 함께 한번 가자」고 하시더니 광찬을 앞세우고 두어 차례 찾아가 보시고 별다른 치료는 베푸시지 아니하셨으나 그 여인은 스스로 힘을 얻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도다.
상제께서 광구 천하하심은 김 일부의 꿈에 나타났으니 그는 상제와 함께 옥경에 올라가 요운전에서 원신(元神)이 상제와 함께 광구 천하의 일을 의논하는 것을 알고 상제를 공경하여야 함을 깨달았도다.
상제께서 광구천하하심에 있어서 「판 안에 있는 법으로써가 아니라 판 밖에서 새로운 법으로써 삼계공사를 하여야 완전하니라」 하셨도다.
그 삼계공사는 곧 천ㆍ지ㆍ인의 삼계를 개벽함이요 이 개벽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예전에도 없었고 이제도 없으며 남에게서 이어받은 것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다만 상제에 의해 지어져야 되는 일이로다.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경의 운로를 열어서 선천에서의 상극에 따른 모든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道)로써 세계의 창생을 건지려는 상제의 뜻은 이미 세상에 홍포된 바이니라.
그리하여 상제께서 이 세상에 탄강하여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서 신명이 사람에게 드나들 수 있게 하시고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자들을 찾아 쓰고 모든 것에 운을 붙여 쓰기로 하셨도다. 이것은 삼계를 개조하기 위함이로다.
삼계가 개벽되지 아니함은 선천에서 상극이 인간지사를 지배하였으므로 원한이 세상에 쌓이고 따라서 천ㆍ지ㆍ인(天地人) 삼계가 서로 통하지 못하여 이 세상에 참혹한 재화가 생겼나니라.
그러므로 상제께서 오셔서 천지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를 세워 후천 선경을 열어 놓으시고 신도를 풀어 조화하여 도수를 굳건히 정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신 후에 인사를 조화하니 만민이 상제를 하느님으로 추앙하는 바가 되었도다.
상제께서 삼계가 착란하는 까닭은 명부의 착란에 있으므로 명부에서의 상극 도수를 뜯어고치셨도다. 이로써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이 서로 상생하게 되었으니 대세가 돌려 잡히리라.
이 공사를 행함으로써 일체의 아표신이 천상으로 올라가니 땅에 굶주림이 사라지고 그 신들의 재해가 없어지도다.
상제께서 모든 도통신과 문명신을 거느리고 각 민족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文化)의 정수(精髓)를 뽑아 통일하시고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 놓으시니라.
선천에서는 판이 좁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 도(道)만을 따로 써서 난국을 능히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후천에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도법을 합(合)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리라.
금산사에 상제를 따라갔을 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후 천하지 대금산(天下之大金山)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이라
만국 활계 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 명월 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문명 개화 삼천국(文明開花三千國) 도술 운통 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
란 구절을 외워 주셨도다.
또 상제께서는 때로 금산사의 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하시고 세속에 있는 말의 양산도와 비유하기도 하셨도다.
상제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도수로써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어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 놓으셨으니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게 되니라.
상제께서 본댁에 간수했던 선대의 교지를 찾아 옥새가 찍힌 부분을 도려내고 불사르신 다음에 그 부분과 엽전을 비단에 싸서 한쪽에 끈을 달아 손에 들고 목에 붉은 베를 매고 딸각딸각 소리를 내시며 시루산을 오르내리면서 큰 목성으로 도통줄이 나온다고 외치시니 이 뜻을 모르고 사람들은 없어진 교지만을 애석하게 여겼도다.
모친에게 장삼을 입혀 자리에 앉힌 다음에 쌀 서 말로 밥을 지어서 사방에 흩으시고 문수보살의 도수를 보시니라.
상제께서 「강 태공(姜太公)이 十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千六百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 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함이니라. 나는 이제 七十二둔으로써 화둔을 트니 나는 곧 삼이화(三离火)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말씀하시기를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 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강 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 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오.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
고 하셨도다.
또 상제께서
「이제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四十九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
고 말씀하시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또 어느 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차 청일 사이에 싸움이 두 번 나리니 첫 번에는 청국이 패하리라. 다시 일어나는 싸움은 十년이 가리니 그 끝에 일본이 쫓겨 들어가려니와 호병(胡兵)이 들어오리라. 그러나 한강(漢江)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고 하시고
「만국 제왕의 기운을 걷어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더니 이상한 기운이 제왕의 장엄한 거동의 모양을 이루고 허공에 벌여 있더니 사라지는도다.
상제께서 종도들을 데리고 계실 때
「현하 대세가 오선위기(五仙圍碁)와 같으니 두 신선이 판을 대하고 있느니라.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는데 한 신선은 주인이라 어느 편을 훈수할 수 없어 수수방관하고 다만 대접할 일만 맡았나니 연사에만 큰 흠이 없이 대접만 빠지지 아니하면 주인의 책임은 다한 것이로다.
바둑이 끝나면 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려지리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우리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 하리라」
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재제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 바람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신의 위엄을 떨쳐 불의를 숙청하기도 하며 혹은 인애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복을 구하는 자와 삶을 구하는 자는 힘쓸지어다」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여러 종도들의 집에서 선기 옥형(璿璣玉衡) 도수를 정하시니 신 경수의 집에 저울 갈고리 도수를, 황 응종의 집에 추 도수를, 문 공신의 집에 끈 도수를, 그리고 신 경수 집에 일월 대어명(日月大御命) 도수를, 문 공신 집에 천지 대팔문(天地大八門) 도수를 정하고 이 세 종도의 집에 밤낮으로 번갈아 다니시며 공사를 행하셨도다.
상제께서 순창 피노리(淳昌避老里)에 계실 때 황 응종이 배알하니 상제께서 「고부 사람이 오니 바둑판을 가히 운전하리라」 하시고
영웅 소일 대중화(英雄消日大中華)
사해 창생 여낙자(四海蒼生如落子)
란 글을 외워주셨도다.
상제께서 함열의 종도 김 보경으로 하여금 큰 북을 대들보에 달아매게 하시고 병자정축(丙子丁丑)을 밤이 새도록 내리 외우시면서 북을 치며 「이 소리가 서양에 까지 울리리라」고 하셨도다.
최 창조는 상제께서 자기 집에 오셔서 짚을 물에 축여 상투 모양으로 매셨다가 풀고 풀었다가 매기도 하시면서 「머리를 깎으려니 가위를 가져오라」 하시고 글을 쓰신 후에 불사르고 땅에 묻으시는 것을 보았느니라.
상제께서 백지 일곱 장에 병 자기이발(病自己而發)과 장 사 병 쇠 왕 관 대 욕 생 양 태 포(葬死病衰旺冠帶浴生養胎胞)의 글을 써서 각각 봉하신 후에 김 형렬을 시켜 전주에 있는 일곱 사람에게 전하고 해가 지기 전에 되돌아오게 하셨도다. 종도들이 그 뜻을 물었으되 대답하시기를 「지금은 모르고 성편 뒤에는 스스로 알게 되리라」고 하셨도다.
김 형렬은 전주에 가서 이르신 대로 김 병욱ㆍ김 광찬ㆍ김 윤근ㆍ김 준찬ㆍ김 낙범 등에 나눠주었으되 나머지 사람은 출타하였으므로 날이 저물까봐 그냥 돌아오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늦어도 다 돌리고 올 것이었거늘」 하시면서 꾸짖으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차 경석의 집 서쪽 벽에 二十四장과 二十八장을 써 붙이고 박 공우의 왼팔을 잡고 「만국 대장(萬國大將) 박 공우(朴公又)」라고 음성을 높여 부르셨도다. 이후에 공우가 어디에 떠나려면 문밖에서 방포성(放砲聲)이 갑자기 울리곤 하였도다.
그리고 어느 날 상제께서 경석의 집 앞에 있는 버드나무 밑에 서시고 종도들을 줄을 지어 앉히신 다음에 북쪽을 향해 휘파람을 부시니 별안간 방장산으로부터 한 줄기의 안개가 일더니 사방으로 퍼져 문턱과 같이 되었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곤이내 짐제지 곤이외 장군제지(閫以內朕制之 閫以外將軍制之)」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하루는 공우에게 마음속으로 육임(六任)을 정하라고 명하셨도다. 공우가 생각한 여섯 사람 중 한 사람이 불가하다 하시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정하였더니 이 사람들을 부르사 불을 끄고 동학 주문을 외우게 하여 밤새도록 방안을 돌게 하다가 불을 켜 보게 하시니 손씨가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느니라.
상제께서 「나를 부르라」고 그에게 이르시니 그는 겨우 정신을 돌려 상제를 부르니 기운이 소생하니라.
상제께서 이 일을 보시고 종도들에게
「이는 허물을 지은 자니라.
이후에 괴병이 온 세상에 유행하리라.
자던 사람은 누운 자리에서 앉은 자는 그 자리에서 길을 가던 자는 노상에서
각기 일어나지도 못하고 옮기지도 못하고 혹은 엎어져 죽을 때가 있으리라.
이런 때에 나를 부르면 살아나리라」
고 이르셨도다.
또 이르셨도다.
「부녀자들이 제 자식이라도 비위에 맞지 아니하면 급살 맞으라고 폭언하나니 이것은 장차 급살병이 있을 것을 말함이니라.
하루 짚신 세 켤레를 닳기면서 죽음을 밟아 병자를 구하러 다니리니 이렇게 급박할 때 나를 믿으라고 하면 따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러므로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 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 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원평이 장상지지(將相之地)이고 대흥리는 왕자 포정 분야처(王子布政分野處)로써 가작 천간옥(可作千間屋)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태인 도창현에 있는 우물을 가리켜 「이것이 젖(乳) 샘이라」고 하시고 「도는 장차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응기하여 일만이천의 도통군자로 창성하리라. 그러나 후천의 도통군자에는 여자가 많으리라」 하시고
「상유 도창 중유 태인 하유 대각(上有道昌中有泰仁下有大覺)」
이라고 말씀하셨도다.
「세상 사람이 나를 광인이라 이르되 광인은 일을 계획도 못하고 일을 치르지도 못하니라. 광인이라고 하던 사람이 광인이라고 듣던 사람에게 절할 날이 오리라. 나는 시골에서 농판의 칭호를 듣되 군자나 천진으로 평이 있는 자를 택하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학동을 떠나던 어느 날 박 공우에게 「나의 이번 길은 한 사람의 절을 받기 위함이니 이 절이 천하에 널리 미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김 경학이 김 자선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을 때 상제께서 「어젯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라」고 경학에게 이르시니 그는 「개 한 마리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보고 구하러 달려갔더니 그 개가 우물에서 뛰어나와 다른 곳으로 가 버렸나이다」고 꿈 이야기를 여쭈니 상제께서 「속담에 강성(姜姓)을 강아지라 하니라. 네가 꿈을 옳게 꾸었도다」고 말씀하셨도다.
천지에 수기(水氣)가 돌 때 만국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통어(通語)하게 되나니 수기가 돌 때에 와지끈 소리가 나리라.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이에 철도선을 그리고 북쪽에 점을 찍어 정읍(井邑)이라 쓰고, 남쪽에 찍은 점을 사거리라 쓰고, 가운데에 점을 찍으려다가 몇 번이나 망설이시더니 대흥리로 떠나실 때에 그 점을 치시고 「이 점이 되는 때에 세상일이 다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이후에 상제께서 김 보경의 집에 계시면서 공사를 보고 계셨는데 어느 날 백지에 二十七년이라고 쓰셨도다. 이에 대해 종도들이 묻기에 상제께서 「홍 성문(洪成文)이 회문산(回文山)에서 二十七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二十七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
고 말씀하시고 다시 백지 한 장을 열두 쪽으로 오려서 쪽지마다 글을 써서 한 쪽만을 불사르고 나머지 열한 쪽을 치복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셨도다. 이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 가뭄에 마르던 보리가 생기를 되찾더라.
이 헛도수를 말씀하신 후 어느 날 상제께서 이 치복과 여러 종도에게
「불가지(佛可止)는 불이 가히 그칠 곳이라는 말이오. 그곳에서 가활 만인(可活萬人)이라고 일러왔으니 그 기운을 걷어 창생을 건지리라」
고 말씀하시고 교자를 타고 그곳으로 가시는 길에
金屋瓊房視逆旅 石門苔壁儉爲師
絲桐蕉尾誰能解 竹管絃心自不離
匏落曉星霜可履 土墻春柳日相隨
革援瓮畢有何益 木耜耕牛宜養頣
라고 외우셨도다.
상제께서 앞뒤에 친히 쓰신 병풍 한 벌을 재종숙이 되는 강 성회(姜聖會)에게 주신 것을 그 후 석환의 종형인 강 계형(姜烓馨)이 간수하고 있다가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十一년 후에 입양한 강 석환(姜石幻)에게 전하였느니라.
그 글귀는 이러하였도다.
其略曰
戒爾學立身 莫若先孝悌 怡怡奉親長 不敢生驕易
戒爾學干祿 莫若勤道藝 嘗聞諸格言 學而優則仕
戒爾遠恥辱 恭則近乎禮 自卑而尊人 先彼而後己
擧世好承奉 昻昻增意氣 不知承奉者 以爾爲玩戱
표면(表面) 한 폭에
萬事已黃髮 殘生隨白鷗 安危大臣在 何必淚長流
또 한 폭에는 고전체(古篆體)로
靈源出
綿空早移 浮邑梧弦 枇緣足柰 新兒大琴 杷晩笑谷 阮背帶代
라고 쓰여 있고 또 석환(石幻)이 병풍 속을 뜯어보니
吾家養白鶴 飛去月蘆夜
라 쓰여 있다 하니라.
상제께서 이해 여름에 김 덕찬을 데리고 불가지(佛可止)에서 신령(神嶺)을 넘다가 고사리를 캐던 노구를 만났도다. 상제께서 그 여인에게 중이 양식을 비노라고 청하시니 그 여인이 없다고 하더니 재차 청하시니 두 되 중에서 한 홉을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양식을 받아 들고서 덕찬에게 「중은 걸식하나니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하는 것이 옳도다」고 이르셨도다.
불가지에 류 찬명ㆍ김 송환ㆍ김 덕찬ㆍ김 낙범ㆍ이 치화가 모여왔도다. 이들에게 상제께서 말씀하시니라.
「일본인이 백호 기운을 띠고 왔으니 숙호 충비(宿虎衝鼻)하면 해(害)를 받으리라. 그들을 사사로운 일로는 너무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 범이 새끼친 곳은 그 부근 마을까지 돌보아준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피란하는 길이로다. 청룡이 동하면 백호는 곧 물러가느니라.」
대장이 삼군을 통솔하여 적진에 쳐들어감이 장쾌하고 영귀하다 할지라도 인명을 사지에 몰고 많은 살해를 입혔으므로 악척이 되어 앞을 막느니라.
「대인의 행차에 삼초가 있으니 갑오(甲午)에 일초가 되고 갑진에 이초가 되었으며 삼초를 손 병희(孫秉熙)가 맡았나니 삼초 끝에 대인이 나오리라.」
이렇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불사르셨도다.
知忠知義君事君 一魔無藏四海民
孟平春信倍名聲 先生大羽振一新
이어 말씀하시기를
「나의 일은 여 동빈(呂洞賓)의 일과 같으니라. 그가 인간의 인연을 찾아서 장생술을 전하려고 빗장사로 변장하고 거리에서 이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흰 머리가 검어지고 굽은 허리가 곧아지고 노구가 청춘이 되나니 이 빗 값은 千냥이로다고 외치니 듣는 사람마다 허황하다 하여 따르는 사람이 없기에 그가 스스로 한 노구에게 시험하여 보이니 과연 말과 같은지라. 그제야 모든 사람이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오니 승천하였느니라.」
또 원평이 지금은 건너다보이나 훗날에는 건너다보이지 않을 때가 오리라. 그러나 또 다시 건너다보일 때가 있으리니 그때가 되면 세상 일이 가까워짐을 깨달을지어다.
상제의 부친이 말년에 짚신을 삼아 호구를 하시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도다. 그러던 어느 날 상제께서 짚신을 삼고 있는 부친을 가리켜 차꼬를 벗는 중이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객망리 본댁에 돌아와 계실 때에 가족들에게 매사 부대 자연래(每事不待自然來)라고 이르시고 성회(聖會 : 석환 생가 조부)의 집에 가셔서 영택(永澤 : 석환의 부친)에게 「장차 나를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라. 고목에 꽃이 피리라」고 이르시니라.
속담에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은 올바로 일러 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상제께서 구릿골 약방에서
「약장은 안장롱이고 신주독(神主櫝)이니라. 여기에 배접한 종이를 뜯을 날이 속히 이르러야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그 후 대흥리에서 고부인에게 「약장은 네 농바리가 되리라」고 이르셨도다.
다시 약방에 이르사 여덟 종도를 벌여 앉히고 사물탕 한 첩을 지어 그 첩면에 인형을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두르시면서 시천주를 세 번 외우신 후에 종도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도다.
「남조선 배가 범피중류(泛彼中流)로다. 이제 육지에 하륙하였으니 풍파는 없으리로다」 하셨도다.
신도(神道)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측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 신도를 바로잡아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서 한량없는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가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지나간 임진란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 진묵(震默)이 당하였으면 석 달이 넘지 않고, 송 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에 평란하였으리라. 이것은 다만 선ㆍ불ㆍ유의 법술이 다른 까닭이니라. 옛적에는 판이 좁고 일이 간단하므로 한 가지만 써도 능히 광란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되 오늘날은 동서가 교류하여 판이 넓어지고 일이 복잡하여져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능히 바로잡지 못하리라.
또 지난 임진왜란 때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성공치 못하고 도리어 세 가지의 한만 맺었으니 소위 삼한당(三恨堂)이니라.
첫째로 저희들이 서울에 들어오지 못함이 一한이오. 둘째는 무고한 인명이 많이 살해되었음이 二한이오. 셋째는 모 심는 법을 가르쳤음이 三한이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저들이 먼저 서울에 무난히 들어오게 됨으로써 一한이 풀리고, 다음 인명을 많이 살해하지 아니함으로써 二한이 풀리고, 셋째로는 고한 삼년(枯旱三年)으로 백지 강산(白地江山)이 되어 민무 추수(民無秋收)하게 됨으로써 三한이 풀리리라.
용력술을 배우지 말지어다. 기차와 윤선으로 百만 근을 운반하리라. 축지술을 배우지 말라. 운거(雲車)를 타고 바람을 제어하여 만 리 길을 경각에 왕래하리라.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앞으로 술수를 거두리라」고 이르시니라.
선천에는 백팔 염주였으되 후천에는 백오 염주니라.
四十八장을 늘여세우고 옥추문을 열 때에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우리라.
후천에는 사람마다 불로불사하여 장생을 얻으며 궤합을 열면 옷과 밥이 나오며 만국이 화평하여 시기 질투와 전쟁이 끊어지리라.
후천에는 또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조화로써 창생을 법리에 맞도록 다스리리라. 벼슬하는 자는 화권이 열려 분에 넘치는 법이 없고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하는 것을 면하여 불로불사하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마음대로 왕래하고 하늘이 낮아서 오르고 내리는 것이 뜻대로 되며 지혜가 밝아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시방 세계에 통달하고 세상에 수ㆍ화ㆍ풍(水火風)의 삼재가 없어져서 상서가 무르녹는 지상선경으로 화하리라.
이제 너희들이 지금은 고생이 있을지라도 내가 단식하여 식록을 붙여 주고 여름에는 겹옷을 겨울에는 홑옷을 입어 뒷날 빈궁에 빠진 중생으로 하여금 옷을 얻게 함이니 고생을 참을지어다. 장차 천하 만국을 주유하며 중생을 가르칠 때 그 영화는 비길 데가 없으리라.
보라. 선술을 얻고자 十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그의 성의로 하늘에 올림을 받은 머슴을. 그는 선술을 배우고자 스승을 찾았으되 그 스승은 선술을 가르치기 전에 너의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하니라. 그 머슴이 十년 동안의 진심갈력(盡心竭力)을 다한 농사 끝에야 스승은 머슴을 연못가에 데리고 가서 「물 위에 뻗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물 위에 뛰어내리라. 그러면 선술에 통하리라」고 일러 주었도다. 머슴은 믿고 나뭇가지에 올라 뛰어내리니 뜻밖에도 오색 구름이 모이고 선악이 울리면서 찬란한 보련이 머슴을 태우고 천상으로 올라가니라.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七八年間古國城 畵中天地一餠成
黑衣飜北風千里 白日傾西夜五更
東起靑雲空有影 南來赤豹忽無聲
虎兎龍蛇相會日 無辜人民萬一生
이라고 옛글을 외워 주셨도다.
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三人同行七十里 五老峰前二十一
七月七夕三五夜 冬至寒食百五除
옛글 한 수(首)를 외워주시며 잘 기억하여 두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종도 김 병선에게
日入酉 亥子難分
日出寅卯辰 事不知
日正巳午未 開明
日中爲市交易退 帝出震
이라고 글 한 장을 써 주셨도다.
상제께서 형렬(亨烈)의 집에 머무르고 계실 때 형렬이 집안이 가난하여 보리밥으로 상제를 공양하여 오던 차에 八월 추석절을 맞게 되어 쇠솥을 팔아서 공양코자 하는지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彌勒佛)이 출세하리라」고 이르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너희들은 손에 살릴 생자를 쥐고 다니니 득의지추(得意之秋)가 아니냐 마음을 게을리 말지어다. 삼천(三遷)이라야 일이 이루어지느니라」
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화천하시기 전 김 형렬에게 글 한 수를 읊어주시니 다음과 같도다.
後人山鳥皆有報
勸君凡事莫怨天